전시에 징병되면 개죽음 당하는 이유 feat. 국민방위군사건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은 1·4후퇴 시기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에 많은 병력들을 병사시킨 사건임.1. 국민방위군 창설6.25전쟁 당시, 한국 정부는 중공군 개입 즈음 기존의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를 해체하고,'국민방위군'을 창설했음.이들의 목적은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지역의 청장년을 보호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까놓고 이야기하면 공산군이 다른 청장년층들 다시금 징병할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미리 병력을 빼돌려 놓을 계획이였음. 이는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이 점령함에 따라 점령지의 많은 청년들이 북한군 의용군으로 재편되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조치였다고 볼 수 있음.그래서, 1950년 12월 21일에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인원중 군경이나 공무원이 아닌 사람들을 제2국민병으로 등록하였음.병력 응모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17세부터 40세까지의 장정들이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정부는 이들을 경남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수용하였고. 간부는 대체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었음.2. 경과하지만, 국민방위군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음.일단, 제대로 된 예산안이 결정되지 않을 상태에서 법이 제정되었음. 후에 1951년 1월 30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방위군 총인원을 50만 명으로 추산하여 3개월분 총 209억 원으로 책정되었음.문제는 이 금액은 1인당 배당액은 식량도 조달하기 어려운 액수였음. 당시, 1인당 하루 4홉의 양곡을 지급하도록 정했는데, 이는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양이었음.또한, 장교와 하사관의 봉급을 아예 책정하지도 않았음.심지어, 당시가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방비와 피복비는 아예 책정조차 하지 않았다.이것도 모자라 상부에서 온갖 횡령과 착복이 판을 쳤음. 1951년 3월 29일 정파별 3명씩 15명으로 구성된 '국회진상조사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인원수 허위보고에 의한 현금횡령액 23억 5,126만 원 + 인원수 허위보고에 따른
양곡횡령액 20억 4,710만 원 + 공제액이란 명목으로 예하의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28억 8,328만 원으로 위의 부정액만 72억 8,164만 원이었다.(휴대용 제리, 자동차 구입, 명태 등 현품 횡령 제외)이는 50만 명 기준으로 책정된 1951년 1~3월 3개월분 예산 209억 830만 원 중 약 1/3에 달했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는 김윤근과 윤익헌 등 수뇌부에서만 해먹은 금액이고, 예하 51개 교육대에서 얼마나 횡령했는지는 추산조차 불가능함.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국민방위군 제도가 잘 굴러갈 일이 없었음.1·4후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창설 작업을 하고 있던 국민방위군은 지역별로 대구, 부산 등지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령부와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함으로써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음. 사령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예산안에 장교와 부사관들 월급이 책정도 안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필연적으로 비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음. 당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고, 교실 하나에 수백 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음.따라서,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장정들은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곧바로 병력 1천여 명의 아사 및 동사자가 발생하였고 수 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9만명이나 달하는 무고한 청년들이 비전투 손실로 사망하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큰 상해를 입었다.나중에 가서는 이러한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음.3. 결과나중에 가서, 이승만 정부는 여론을 의식하여 현장조사를 실시하였지만 처음부터 방위군 간부 몇 명만을 기소하여 무마하였음. 그러다 여론이 들끓자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음. 그러나 그러나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았던 정계의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상납된 자금에 대한 수사도 착수되지 못했음.따라서, 국민방위군 사건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의혹이 남아있는 상태임.과연 현재는 그때보다 달라졌을까? 전쟁 나면, 군대에 징집 되는 게 과연 더 안전할까?전쟁은 꼭 총이랑 포탄에 맞아야만 죽는 게 아닌데? 초중고 역사를 배우면서 국민방위군에 대해 들어본적은 있는가?당장,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수많은 청년들이 개죽음 당한 사건이 불가 몇십년 전, 이 나라에서 벌어졌다.그리고 그 나라는 아직도 그 사건을 개 무시하고 있지.만약, 너가 정말로 개죽음 당하고 싶다면 전쟁나면 누구보다 빨리 소집 장소로 뛰어가라.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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