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세서 귀걸이 - billeobideu seseo gwigeol-i

Toni Morrison : Beloved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최인자 옮김/문학동네/2016

육천만 명 그리고 그 이상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사랑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로마서> 9:25

<상처의 문신>

나의 의지에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존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타자와 나의 관계는 서로 얽혀 살아간다.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아픔을 주는 상생의 관계에서 악인으로 선인으로 남기도 한다.

예전의 주인과 노예의 주종관계는 사회 변화에 따라서 진화, 발전되었다.

자유인으로 개인의 삶이 중요해진 요즈음, 타인이 던지는 시선에서, 언어에서 아픈 상처가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져 무의식속에서 억압된 채 나의 행동에 제동을 건다.

아픈 상처의 문신이 나를 제어하며 끝까지 좇는다. 타인을 두려워하며 나의 감옥에 갇힌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얻게 된 지혜는, 아픔을 준 타인도 있었고, 나도 또한 남한테 나도 모르는 아픔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아픔을 주는 타인을 지렛대 삼아 내가 살아가는데 자극제가 되게 한다.

타인이 있기에 내가 성장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생기고 깨달을 수 있는 계기와 자극제가 되는 서로의 관계는 필수가 되어야 하는 세상살이다.

타자가 있기에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었고, 타인이 주는 상처는 나의 자극제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피하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피어나는 꽃으로 거듭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지혜가 밝은 등불로 나의 앞길을 밝혀 주리라.

내 생각

토니 모리슨은 이 소설의 모티브를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상상력을 더해 쓰게 되었다고 했다.

기사 내용은 달아난 흑인 노예 여성이 붙잡히는 상황에서 자기 아기를 칼로 죽인다. 주인에게 붙잡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노예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자기 아이 만큼은 자기와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모성애의 결과였다.

처절 하리 만치,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고,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노예로 팔려온 흑인종과 주인으로서의 백인종. 차이로 인해 주인과 노예로서 인간이 행하는 극렬한 형태의 저주와 형벌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다. 그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인고의 시간은 죽음보다 더 한 영원의 시간이었다.

잔혹한 것도 인간이었고, 도움을 받은 것도 인간이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운명으로 지어진 삶을 그려낸 소설은 고통과 환상적인 영혼의 출몰과 엉키어 산다. 마치 죽었던 아이가 부활해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죽은 집이었다.

채찍으로 맞은 등짝은 마치 나무모양으로 그려진 문신 같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가 주어져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되는가?

사회에서의 타자와 합류해 즐거움을 찾아가는 숙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를 남겨준 의미를 남겨준 책이었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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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해설/빌러비드, 차마 말할 수 없는 기억할 수 없는

밑줄 친 문장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1873년에 이르자 집에 남은 희생자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뿐이었다. 할머니 베이브 석스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 하워드와 뷰글러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그저 들여다보기만 했는데 거울이 깨져버리고(뷰글러는 이 일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케이크 위에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가 찍히는 걸(하워드에겐 이것이 신호였다) 보자마자 그길로 달아나버렸다.

베이비 석스. 그녀의 과거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이 결코 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 그녀는 색깔을 궁리하는 데 얼마남지 않은 기력을 다 쏟아부었다.

색깔에 빠진 사람에게 오하이오의 겨울은 특히 힘들었다. 하늘이 유일하게 색채의 드라마를 제공해주긴 했지만, 삶의 주된 기쁨을 신시내티의 지평선을 의존하는 건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그들은 빛의 근원을 알듯 이 원한의 근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했던 마음만큼 세지는 않아.” 세서가 대답하자 다시 그것이 찾아왔다. 이름 없는 비석의 친숙한 한기. 그녀가 직접 골라 무덤처럼 두 무릎을 활짝 벌린 채 발끝으로 기대섰던 비석. 손톱처럼 분홍빛이 감돌고 흩뿌려진 돌가루가 반짝이던. 십 분이오. 남자가 말했지. 십 분을 허락하면 공짜로 해주겠소.

네 글자를 새기는 데 십 분. 십 분을 더 허락했더라면 디얼리란 글자도 새길 수 있었을까? 그때는 남자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못했지만,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는 미련이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이 십 분, 아니 삼십 분이었다면 장례식에서 들은, ‘디얼리 빌러버드(참으로 사랑하는)’라고 한 목사의 말(사실 목사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을 전부 아기의 묘비에 새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중요한 한마디만을 새겨넣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비석들 사이에서 비문 새기는 사내와 그 짓을 하면서. 사내의 어린 아들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주 오래된 분노와 함께 새롭게 눈뜬 욕망이 어려 있었다. 그 정도면 분명 충분했다. 또다른 목사나 또다른 노예제 폐지론자, 그리고 혐오로 가득찬 마을 사람들에게도 대답이 될 만큼.

제 영혼의 평안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녀는 또다른 영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린 딸아이의 영혼을. 그 어린 것이 그렇게 엄청난 원한을 품을 수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문 새기는 사내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석들 사이에서 그 짓을 한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목이 잘린 아기의 원한이 서린 집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별처럼 반짝이는 돌가루가 점점이 박힌 새벽하늘 빛의 비석에 기대어 짓눌린 채 가랑이를 무덤처럼 활짝 벌리고 있어야 했던 그 십 분은 일평생보다 더 길었고, 기름처럼 끈끈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적시던 아기의 피보다 더 생생하게 고동쳤다.

이사를 갈 수도 있잖아요.” 시어머니에게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햇다.

이 나라에 죽은 검둥이의 한이 서까래까지 그득그득 쌓이지 않은 집은 한 채도 없다. 그나마 아기 귀신이라 다행인 게야. 난 여덟이나 낳았는데 죄다 내 곁을 떠났다. 넷은 빼앗기고, 넷은 달아났지. 아마 그것들 모두 누군가의 집에 들러붙어 생지옥을 만들고 있을 게다.” 베이비 석스는 눈썹을 비볐다.

세서 역시 살아 있는 자식은 하나뿐인 신세가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불빛조차 반사되지 않았다. 그 눈은 들여다보기조차 두려운 두 개의 우물 같았다. 비록 뚫어놓기는 했지만, 반드시 뚜껑을 덮어막고 그 안에 얼마나 깊디깊은 공허가 도사리고 있는지 경고하는 표지판을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우물.

세서를 두들겨패 강철 같던 눈빛을 빼앗고 그 자리에 불빛조차 반사되지 않는 두 개의 우물을 남겨놓은 것뿐이었다.

평온하게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크림처럼 부드럽게 돌아가셨다면서.” 폴 디가 상기시켰다.

폴 디는 슬픔이 자신을 흠뻑 적셨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붉은빛은 사라졌지만, 흐느낌 같은 것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폴 디는 문득 첫날밤 드레스가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세서는 열세 살에 스위트홈에 왔는데, 그때 이미 강철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고귀한 원칙 때문에 베이브 석스를 잃은 가너 부인에게 그녀는 시기적절한 선물이었다. 스위트홈 남자 다섯 명은 새로 온 아가씨를 보고 절대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혈기왕성했고, 암송아지라도 덮칠 만큼 여자가 없는 처지에 신물이 나 있었다. 그렇지만 강철 같은 눈빛의 그 아가씨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서로 치고받아 짓뭉개버리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선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선택을 하기까지는 한 해가 걸렸다. 그녀에 대한 꿈으로 애간장이 녹으며 초라한 침상에서 몸부림쳤던 참으로 힘들고 긴 한 해였다.

강간만이 삶의 유일한 선물처럼 느껴지던, 갈망으로 애타던 한 해였다. 그런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그들이 스위트홈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스위트홈 검둥이들은 하나같이 사내란 말일세. 그런 녀석들만 사서 그렇게 키웠거든. 죄다 진짜 사내라니까.

그들은 모두 이십대였고 여자가 없었다. 암소와 그 짓을 하고, 겁탈하는 꿈을 꾸고, 침상에서 몸부림을 치고, 허벅지를 문지르면서 새로운 아가씨를 기다렸다. 핼 리가 오년 동안 일요일을 바쳐 몸갑을 치른 베이비 석스의 자리를 대신하러 온 아가씨였다. 그녀가 그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저 어머니가 편히 쉬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려고 오 년이나 안식일을 포기할 만큼 효성 깊은 스무 살의 청년이라면 당연히 진지하게 추천할 만한 신랑감 아니겠는가.

그녀는 꼬박 일 년을 기다렸다. 스위트홈 남자들도 함께 기다리며 암소들을 범했다. 마침내 그녀는 핼리를 선택했고 두 사람의 첫날밤을 위해 남몰래 드레스를 만들었다.

좀 머물다 가지 않을래? 지난 십팔 년 세월을 어떻게 하루 만에 다풀어놓겠어.”

폴 디가 앉아 있는 어두침침한 방 끝에 하얀 계단이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벽지가 발린 이층으로 뻗어 있었다. 폴 디가 앉은 자리에서는 벽지 앞머리만 겨우 보였는데, 온통 파란 바탕에 하얀 눈송이가 휘날리는 가운데 노란색 반점이 잔잔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그는 눈부시게 새하얀 난간과 계단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온몸의 감각이 저 계단 위에 저주에 걸리고 매우 산소가 희박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공기 속에서 걸어내려온 것은 갈색 피부에 깜짝 놀란 인형 같은 얼굴을 한 통통한 소녀였다. “내 딸 덴버야.”“가너라고 부르렴. 폴 디 가너야.”

핼리는 나머지 날 동안 봐야 할 그림자를 위해 햇빛 속에서 본 것을 저장이라도 해두려는 듯이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처음 두 번은 가너 씨가 경작하는 작은 옥수수밭에서였다. 옥수수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이용할 수 있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핼리와 세서 모두 몸을 숨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옥수숫대를 우두둑 부러뜨리며 그 사이에 누워 있으면 두 사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일렁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 눈에 띄었을 옥수숫대 꼭대기도.

세서는 어리석었던 핼리와 자신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까마귀까지 알고 구경하러 날아왔을 텐데. 꼬았던 발목을 풀면서, 세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고요한 날 옥수수밭에서 일렁이는 잔물결을 누가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그와 식소 그리고 나머지 폴들은 형제밑에 앉아 조롱박으로 머리 위에 물을 끼얹으며 샘처럼 줄줄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저 아래 밭에서 옥수수수염이 어지럽게 출렁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발정난 개처럼 발딱 세운 채, 한낮에 벌어지는 옥수숫대의 춤을 지켜보고 앉아 있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 괴롭고, 또 괴로웠다. 머리 위로 줄줄 흐르는 물은 더 가관이었다.

폴 디는 한숨을 쉬고는 돌아누웠다. 세서도 그가 움직이는 틈을 타서 몸을 돌렸다. 폴 디의 등을 바라보며, 핼리의 등에 깔려 부러지던 옥수숫대를 떠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에 잡히던 옥수수 껍질과 비단같이 부드러운 수염도.

수염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즙을 어찌나 꼭꼭 가두고 있던지.

지켜보던 남자들의 질투 어린 감탄은 그날 밤 그들 마음대로 벌인 햇옥수수 잔치와 함께 녹아버렸다. 가너 씨가 너구리의 소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부러진 옥수숫대를 뽑아다 잔치를 벌인 것이다. 폴 에프는 구워먹고 싶어했고 폴에이는 삶아먹고 싶어했는데, 결국 먹기에는 너무 설익은 옥수수들이라서 어떻게 요리했는지 이제 폴 디는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한 알갱이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옥수수수염을 헤치고 손톱 끝을 밀어넣던 일뿐이었다.

팽팽한 옥수수 껍질을 벗길 때면 짝 찢어지는 소리가 나서, 세서는 언제나 옥수수가 무척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한 꺼풀만 벗기고 나면 나머지는 술술 벗겨졌다. 옥수수 알갱이는 그에 굴복하여 마침내 나란히 늘어선 모습을 수줍게 드러냈다. 수염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꼭꼭 갇혀 있던 옥수수 향내가 얼마나 빨리 달아나버리던지.

이와 젖은 손가락이 아무리 기대에 차 있었다 한들, 그 소박한 기쁨에 몸이 떨리던 순간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수염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얼마나 가늘고 부드럽고 자유롭던지.

P54

덴버의 비밀은 향기로웠다. 향수를 알기 전까지는 항상 야생 베로니카를 사용했다. 첫 번째 향수는 선물로 받았고, 두 번째는 엄마 향수를 훔쳐서 회양목 사이에 감춰두었는데 결국 얼어서 깨져버렸다. 그해 겨울은 저녁식사 시간에 급작스레 찾아와서는 여덟 달이나 머물렀다. 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해였다. 백인 여자 보드윈 양이 엄마와 덴버에게 향수를, 사내애들에게는 오렌지를, 베이비 석스에게는 질좋은 양모 숄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그 여자는 행복하고 들뜬 듯 보였다. 목소리는 남자처럼 낮았지만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에게서 마치 방안 가득 꽃이 핀 것처럼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덴버는 회양목 속에 그 모든 걸 혼자 간직할 수 있었다. 124번지 뒤에는 숲 앞까지 좁은 들판이 있었다. 그숲 저편에는 시냇물이 흘렀다. 들판과 시냇물 사이 숲속, 우뚝 선 떡갈나무들로 가려진 곳에 둥글게 마주보고 자라난 회양목 다섯 그루가 1미터 정도 높이에서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어 2미터 높이의 둥근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은 120센티미터 두께의 벽이었다.

덴버는 허리를 깊이 숙이면 이 방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에메랄드빛 속에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처음에는 꼬마 소녀의 소꿉장난이었지만 그녀의 욕망이 변하자 놀이도 달라졌다. 놀이는 조용하고 지극히 사적이었으며, 토끼들을 전율하게 하다가 곧 혼란에 빠뜨리는 독한 향수의 신호를 제외하면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 장소는 처음에는 놀이방(그곳에서는 정적조차 더 부드러웠다)이었다가 그다음에는 은신처(오빠들의 위협으로부터)가 되었고, 곧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안락한 나무 그늘 아래서, 상처받은 세상으로부터 입은 상처에서 완전히 단절된 채, 덴버의 상상력은 스스로 허기와 그 허기를 채울 양식을 생산했다. 그것은 덴버가 외로움에 지쳐,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었다. 덴버는 살아 있는 녹색 벽에 감싸여 보호를 받고 있노라면 성숙하고 맑아진 느낌이 들었고, 구원은 그렇게 소망만큼이나 쉬운 것이었다.

엄마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작 이상한 일(죽은 이가 생생하게 활개치고 다니는 집에서 평생을 산 소녀에게조차)은 하얀 드레스가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맷자락으로 엄마의 허리를 감고 있는 것이었다. 덴버가 문득 자기가 태어날 때의 자세한 상황을 떠올린 까닭은 그 드레스 소매의 부드러운 포옹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가 맞고 서 있는, 마치 들풀의 씨앗처럼 가늘게 휘날리는 눈 때문이기도 했다. 드레스와 엄마는 절친한 두 여인네 같았다. 한 사람(드레스)이 다른 한 사람을 도와주는. 그리고 그녀의 마법 같은 출생, 그 기적은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그 우정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남겨진 덴버의 세상은 숲속에 있는 2미터 높이의 에메랄드빛 비밀 방만 빼고는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폴 디 옆에서 눈을 뜬 그날 아침, 딸아이가 몇 년 전에 한 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고, 덴버가 보았다는, 자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는 그 드레스가 생각났다. 세서는 또한 화덕 앞에 선 자신을 힘껏 끌어안아주던 그의 두 팔을 떠올리며 믿고 싶어졌던 유혹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이대로 진도를 나가며 감정을 느껴도 괜찮을까? 진도를 나가며 뭔가에 의지해도?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하는 곁방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베이비 석스가 왜 그토록 색깔에 목말라했는지 분명해졌다. 온 집안에 색깔이라고는 누비이불에 누벼진 오렌지색 천조각 두 개 말고는 없었고, 그 유일한 색깔 때문에 오히려 색의 부재가 도드라졌다. 그야말로 검약과 절제가 허용하는 모든 칙칙한 색깔들의 총집합이었다. 그 수수한 배경 속에서 오렌지 색 천 두 조각만 유독 야단스럽게 튀어 보였다. 마치 날것 그대로의 생명처럼.

빌러버드의 허기를 채워주는 수단이 되었다. 단 것이 빌러버드를 기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덴버가 발견하고 거기에 의존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서는 빌러비드가 이야기에서 깊은 만족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거의 삶과 관련된 언급치고 상처가 아니게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것은 고통 혹은 상실이었다. 그래서 세서와 베이비 석스는 과거를 절대 입에 올릴 수 없다는 데 말없이 동의했었다. 덴버가 아무리 캐물어도 세서는 그저 짧게 대답하거나 불완전한 몽상만 두서없이 늘어놓곤 햇다. 심지어 폴 디와 이야기할 때도, 과거의 일부를 함께 나눈 그였기에 적어도 차분하게 말할 수는 있었지만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치 재갈이 물린 흉터가 입가의 보드라운 부분에 남아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막상 귀고리 이야기를 시작하자, 세서는 자기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또 즐긴다는 걸 깨달았다. 빌러비드가 사건 자체와 거리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전혀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난 마땅히 결혼에는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이 결혼이 정당하고 진실하다고 말해줄 뭔가가 말이야.

오늘은 항상 여기 있지. 내일이란 건 없고.” 세서가 타일렀다.

갑자기 베이비 석스에 대한 엄청난 그리움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철썩거리는 해일이 지나간 뒤 고요가 찾아왔고, 세서는 화덕 옆에 앉은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빌러비드는 광채가 났고 폴 디는 그게 영 못마땅했다. 여자란 가느다란 넝쿨을 내뻗기 직전의 딸기와 같다. 먼저 초록색의 때깔 자체가 변한다. 그다음 가느다란 넝쿨이 뻗고 꽃봉오리가 맺힌다. 하얀 꽃잎이 시들고 아직 파란 딸기가 고개를 내밀 때쯤, 반짝거리는 이파리는 더욱 팽팽해지고 매끄럽게 윤이 나는 법이다. 빌러비드의 모습이 그랬다. 반들반들하고 반짝거렸다.

폴디는 세서와 덴버가 배근육에 힘을 꼭 주고 끈끈한 거미줄을 뽑아내 서로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폴 디는 커다란 은빛 물고기의 꼬리를 움켜쥐었다가 순식간에 놓쳐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물고기는 검은 물속으로 헤엄쳐 돌아갔고, 지나간 자리에 반짝이는 물살만이 남았다.

그가 알기로 특정한 상대도 없는데 빛을 발하는 여자는 절대 없었다. 그저 만인에게 선언을 하듯이 광채를 발하는 여자는 절대 없었다. 그의 경험상 그 빛은 언제나 초점이 있을 때만 나타났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검푸르게 물들고 있었지만 아직 저 너머 들판에 선 나무들의 검은 그림자는 구별할 수 있었다. 세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통 말을 듣지 않는 머리를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어째서 이 머리는 거절이란 걸 모를까?

난 알고 싶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걸. 내일 일도, 덴버도, 빌러비드도 걱정해야 하고, 사랑은 물론이고 늙고 병들 일도 걱정해야 해.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앞날에는아무 관심도 없었다. 과거로 꽉 차있으면서도 여전히 배고프니 더 달라고 성화를 부려서, 내일을 계획하기는커녕 상상해볼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야생 양파밭에서의 그날 오후와 똑같이. 그저 한 치 앞이 그녀가 가장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미래였던 그때처럼.

입술이 뒤로 확 당겨지는 순간, 두 눈에서 사나운 빛이 솟구쳐올랐다. 재갈을 벗고 며칠이 지나도, 거위 기름을 입꼬리에 문지르며 온갖 방법을 다 써봐도 혀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고 사나운 눈빛도 사라지지 않았다.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사나운 분노를 심어줬으니까.

집어넣을 방법이 있으면 빼낼 방법도 있는 법이지.”

미스터는 자기가 타고난 대로 사는 게 허락되었고 그렇게 살았지. 하지만 난 내 모습 그대로 사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설사 놈을 잡아 먹는다 해도 미스터란 이름의 수탉을 요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 하지만 난 죽든 살든 두 번 다시 폴 디가 될 수 없었어. 학교 선생이 날 바꿔놓은 거야. 난 다른 뭔가가 되었어. 햇살을 받으며 물통 위에 앉아 있는 수탉보다도 못한 게 되었어.”

도리어 잘됐어. 더 길게 이야기했다가는 두 사람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갈 수도 있다. 나머지 이야기는 원래의 자리, 그의 가슴속, 붉은 심장이 잇었던 자리에 묻은 양철 담뱃갑 속에 그대로 둘 것이다. 담뱃갑의 뚜껑은 녹슬어서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다정하고 강인한 여인 앞에서 그 뚜껑을 열지는 않으리라. 세서가 그 안에 담긴 것의 냄새라도 맡는다면, 그에게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 게다가 그의 가슴속에 미스터의 볏처럼 빛나는 붉은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도 상처받을지 모른다.

반죽을 주무르고, 또 주무르는 일. 밀려드는 과거를 내쫓는 힘겨운 일과를 시작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전염성 강한 웃음이 빌러비드에게로 옮았다.

두 사람의 침묵이 마치 공포에 질린 새처럼 이벽 저벽에 마구 부딪혔다. 마침내 덴버의 숨소리가 견딜 수 없는 상실의 위협을 이겨내고 차분해졌다.

서커스에 다녀오고 빌러비드가 이 집 앞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그날 이후로, 덴버는 숲속 나무 사이의 비밀 방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 이 절박한 순간까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었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언니가 훨씬 많이, 넘치도록 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 꿈결같은 기분, 친구, 아슬아슬함, 아름다움, 덴버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침을 두 번 삼키고 나서, 평생 들어온 이야기를 실 삼아 빌러비드를 낚을 그물을 짜기 시작했다.

p133

캄캄한 밤은 오히려 무섭지 않다. 그녀는 밤과 같은 색깔이니까. 하지만 낮에는 모든 소리가 총소리나 추적자들의 숨죽인 발소리로 들린다.

덴버는 비러비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어머니와 할머니한테서 얻어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에 피와 살과 뛰는 심장을 더했다. 사실상 그 독백은 두 사람이 함께 누워 부르는 이중창이 되었다. 덴버는 사랑하는 이를 배불리 먹이는 게 커다란 즐거움인 연인처럼 빌러비드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에이미는 등판을 풀어 헤치더니 이런, 세상에라고 중얼거렸다. 세서는 상태가 꽤 나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에이미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이미가 말문이 막혀버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세서는 힘 좋은 그 손가락들이 가볍게 등을 어루만지는 걸 느꼈다.

네 등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자라고 있어. 꽃이 만발한 채로. 대체 하느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거미줄이 전부야.

어쩌면 내가 네 등의 꽃송이들을 짜야 할지도 몰라. 고름이 줄줄 흐르겠지?

대체 하느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아무튼 넌 치료를 좀 받아야 해.

에이미가 떠나자마자 뱃속의 아기가 몸을 뻗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이야. 세서는 생각했다. 대체 하느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에이미가 등판을 풀어 헤쳐놓은 채 나갔기 때문에 바람의 꼬리가 상처를 살랑살랑 건드려 등의 통증이 한층 줄었다. 안도하는 순간, 그나마 아픔이 덜했던 짓무른 혓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에이미가 두 손 가득 거미줄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거미줄에 붙은 벌레를 깨끗이 떼어내고 세서의 등을 붙여주면서 꼭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얼굴에 햇살을 받으며 자는 기분은 정말 최고더라.

세서가 잇새로 헉하고 숨을 몰아쉬자,

세서는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앗다. 그래서 누군가 발끝으로 자기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걸 느꼈을 때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잠에서 깨어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세서는 부들부들 떨며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에이미가 수액 가득한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 필요하니? 방법이 있거든

세서의 숄에서 천을 두 조각 찢어내 낙엽을 채운 다음, 발에다 묶어주었다.

주님이 널 돌보시나봐.

세서는 1.5킬로미터 폭의 검은 강물을 바라보았다. 달랑 노 하나와 아무 쓸모없는 배 한 척만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미시시피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흘러가는 물살에 맞서 저 강을 건너야만 했다. 세서는 그 강물이 고향처럼 보였다. 뱃속의 아기(결코 죽지 않앗다)도 그렇게 생각한 게 분명햇다. 그녀가 강에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양수가 터져 강물과 합류했으니까. 양수가 터지고 산고를 알리는 진통마저 뒤따르자 그녀의 등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세서는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돌풍처럼 진통이 지나가고 달콤한 박동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밑에서 배가 출렁거렸다. 낙엽 주머니를 묶은 발을 배의 좌석에 걸쳐놓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두 번째 진통이 숨통을 죄어왔다. 네 개의 여름 별 아래서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는 양쪽 뱃전에 다리를 걸쳤다. 마치 세서는 전혀 모를 거라는 듯, 산통이 마치 쌓아놓은 밤나무 장작더미가 무너지는 일이나 가죽 같은 하늘을 지그재그로 찢는 번개이기라도 하다는 듯한 말투로 에이미가 친절히 알려준 대로, 아기 머리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는 걸려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위로 한 채, 엄마의 핏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다. 에이미는 예수에게 빌다못해 예수의 아빠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힘줘!” 에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잡아당겨요.” 세서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꼭 알맞은 때에 온갖 구멍을 통해 스며든 강물이 세서의 엉덩이 위로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에이미가 아기의 머리를 말 그대로 끄집어내는 동안, 세서는 한팔을 뒤로 뻗어 밧줄을 움켜쥐었다. 발 하나가 강바닥에서 솟아올라 배 바닥과 세서의 엉덩이를 탁 찼을 때, 그녀는 드디어 끝이 났다는 걸 알고 잠시 마음놓고 기절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아기 울음소리 대신 에이미가 아기를 어르는 소리만 들렸다. 너무 오랫동안 아무소리도 나지 않아서 두 사람 모두 아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세서가 몸을 활처럼 구부리며 후산(後産)을 했다. 그때 아기가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세서는 보았다. 아기는 배꼽에 50센티미터쯤 되는 탯줄을 매단 채 차가운 저녁 공기에 떨고 있었다. 에이미가 자기 속치마로 아기를 감쌌고, 두 여자는 흠뻑 젖고 끈적끈적한 채로 강변을 기어나와 참으로 하느님이 보살핀 아기를 살펴보았다.

강기슭을 따라 음푹한 곳에서 자라는 푸른고사리의 포자들이 수면에 둥둥 떠서 강 한가운데로 흘러갔다. 그 푸르스름한 은빛 행렬은 햇살이 낮고 희미해졌을 때 강기슭에 누워서 그 속이나 바로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종종 벌레로 잘못 보기 쉬웠지만 사실 그것들은 한 세대가 미래를 확신하며 잠자고 있는 씨앗이었다. 잠깐 동안은 모두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기 쉽다. 포자 속에 담긴 모든 것들이 실현될 거라고. 정해진 수명을 다할 거라고. 하지만 이런 확신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포자의 수명보다는 오래가겠지만.

여름 저녁의 서늘함이 감도는 강기슭에 앉은 두 여자는 푸르스름한 은빛 포자의 소나기 아래서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결코 기대하지 않았고,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여름밤, 푸른고사리에 둘러싸인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함께 뭔가를 제대로, 훌륭하게 해냈다.

강물은 그들의 발밑에서 차오른 물을 스스로 빨아들여 삼켜버렸다. 그들의 일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다.

애한테 애기해줘 에이미 덴버 아가씨라고 말해줘. 보스턴에 사는.

세서는 잠이 밀려드는 걸 느꼈고, 아주 깊은 잠이라는 걸 알았다.

잠의 길목에서, 잠 속으로 빠지기 전에 그녀는 생각했다. ‘예쁜 이름이네요. 덴버, 정말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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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폴 디가 와서 그녀 집 현관 계단에 앉기 전에는 곁방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질책하는 유령을 견디게 해주었고, 하워드와 뷰글러의 갓난아이 때 얼굴을 새롭게 떠올려 꿈속에서는 오직 나무들 사이로 일부분만 보이던 아이들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간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속삭임은 남편 역시 그림자처럼 희미하지만 저기 어딘가에 있다고 믿게 해주었다.

베이비 석스는 이렇게 타일렀다. “내려놓아라, 세서. 칼과 방패를. 내려놔. 내려놓아. 둘 다 내려놓아라. 강가에 내려놓아. 칼과 방패 모두. 더는 싸울 궁리를 하지 마라. 그 더러운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 칼과 방패 모두.”

불행과 후회, 원한과 상처를 막아내기 위한 육중한 칼들을. 저 아래 맑은 물이 흘러가는 강기슭에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았다.

베이비 석스의 손길도 목소리도 없는 구 년의 세월은 너무 가혹했다. 곁방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은 너무 희미했다. 하느님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 만드신 남자의 버터 범벅이 된 얼굴에는 속삭임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기념문을 세우거나 수의를 만들거나, 어떤 치유의 의식이. 세서는 베이비 석스가 햇살을 받으며 춤을 추었던 공터에 가기로 결심했다.

124번지와 그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장막을 내려 세상과 단절되기 전, 귀신들의 놀이터가 되고 상처 입은 자들의 보금자리가 되기 전, 124번지는 분주하고 즐거운 집이었다. 그곳에서 베이비 석스 성녀는 사랑하고, 타이르고, 음식을 먹이고, 질책하고, 위로했다. 화덕에서는 항상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의 냄비가 끓고 있었고, 등불은 밤새도록 환했다. 낯선 사람들이 쉬어 갔고, 아이들은 손님의 신발을 신어보곤 했다. 사람들은 이 집에 전갈을 남겼는데, 받을 사람이 누구든 머지않아 이 집에 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대화는 조용하고 간결했다. 베이비 석스 성녀가 쓸데없는 말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만사는 적당한 정도를 아느냐에 달려 있어.”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게 좋아.”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서가 가슴에 갓난아이를 꼭 묶은 채 포장마차에서 내렸던 곳도 바로 그런 124번지 앞이었다. 그때 그녀는 드넓은 시어머니의 품을 난생처음 느꼈다. 신시내티로 간 어머니. 베이비 석스가 신시내티로 가기로 결심한 까닭은 노예 생활이 그녀의 다리와 등, 머리, , ,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에먹고살 수 있는 수단이 심장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당장 심장이 하는 일에 착수했다. 어떤 명예로운 호칭도 이름 앞에 붙이길 거부하고 이름 뒤에 소박한 포옹만을 허락하며 교회 없는 목사가 되었다. 그녀는 신도들을 직접 방문하고 자신의 넓은 심장을 활짝 열어 그들이 마음껏 쓸 수 있게 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넓은 심장을 활짝 열어 그들이 마음껏 쓸 수 있게 햇다. 그러다가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면, 베이비 석스 성녀는 따라올 수 있는 모든 흑인 남자와 여자, 아이 들의 추종을 받으며 자신의 위대한 심장을 가지고 공터로 향했다. 사슴과 누군가 처음 그곳을 개간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 끝, 숲속 깊은 곳에, 누구도 개간한 목적을 모르지만 탁 트인 넓은 장소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뜨거운 열기 속에 석스는 공터에 앉고 사람들은 나무 사이에서 기다렸다.

평평하고 거대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베이비 석스는 고개를 숙여 말없이 기도했다. 회중은 나무 사이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지팡이를 내려놓으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외쳤다. “아이들을 이리 보내요!” 아이들이 나무 사이에서 달려나왔다.

어머니께 웃음소리를 들려드리렴.” 베이비 석스가 아이들에게 말하자, 나무 사이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른들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베이비 석스는 남자 어른들은 이리 나오세요!” 하고 소리쳤다. 남자들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걸어나왔다.

아내들과 아이들에게 춤을 보여주세요.” 그녀가 말하자, 남자들의 발밑에서 지상의 생물들이 부르르 떨엇다.

마침내 그녀는 여자들을 가까이 불럿다. “울어요.” 그녀가 말했다.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해서. 그저 울어요.” 여자들은 두 눈을 가리지도 않고 목놓아 울엇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깔깔 웃는 아이들과 춤추는 남자들, 통곡하는 여자들, 이윽고 모두가 어우러졌다. 여자들이 울음을 멈추고 춤을 추면, 남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아이들이 춤을 추면 여자들이 웃었고, 그러다가 아이들이 울엇다. 모두 기진맥진하고 갈가리 찢긴 채 축축한 공터에 쓰러져 헐떡거릴 때까지. 뒤이어 침묵이 찾아오면, 베이비 석스 성녀는 그들에게 자신의 위대하고 커다란 심장을 내주었다.

그녀는 삶을 정화하라든가,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땅의 축복받은 존재라든가, 세상을 물려받을 온유한 존재라든가, 영광을 누릴 순결한 존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은 오직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은총뿐이라고 말했다. 은총을 볼 수 없다면, 누릴 수도 없다고.

여기, 바로 여기에 우리 몸이 있습니다. 웃고 우는 몸, 맨발로 풀밭에서 추는 몸. 이 몸을 사랑하세요. 열심히 사랑하세요. 저기 저들은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몸을 경멸합니다.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두 손을 들어올려 입을 맞춰요.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서로 토닥이고, 여러분의 얼굴을 토닥이고, 여러분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십시오. 저들은 그 얼굴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해줘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에 영양분을 주기 위해 그 입에 뭔가를 넣으면, 저들은 그걸 낚아채고 대신 찌꺼기를 줄 겁니다. 결코 저들은 여러분의 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몸입니다. 사랑받아야 하는 몸. 휴식을 취하고 춤을 춰야 하는 발. 기대야 하는 등, 두 팔이 있어야 하는 어깨. 튼튼한 두 팔 말입니다. 저기 저 밖의 저들은 올가미를 쓰지 않는 꼿꼿한 여러분의 목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목을 사랑하십시오. 목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쓰다듬고 붙잡아 세워주십시오.

여러분의 심장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받은 상이니까요. 베이비 석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틀린 엉덩이로 춤을 추며 심장이 말하고 싶은 나머지 말들을 표현햇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입을 열어 노래를 불러주었다. 깊이 사랑받는 그들의 몸에 어울리는 완벽한 사부합창이 이루어질 때까지 긴 음들이 이어졌다.

지금 세서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오래전 노랫소리가 떠난 그 장소에 귀라도 기울여보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칼과 방패를 어찌해야 할지 실마리를 얻고 싶었다. 베이비 석스 성녀가 자신이 거짓말쟁이임을 인정하고, 위대한 심장도 내버리고, 곁방 침대에 누워 이따금 색깔만을 갈망하며 깨어나곤 했던 때로부터도 벌써 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맙소사.

저 흰둥이들은 내가 가진 모든 걸, 내가 꿈꿨던 모든 걸 빼앗아갔어.” 베이비 석스는 말했다. “그리고 내 심장마저 부숴놓았지. 세상에 불운 따위는 없어. 흰둥이들이 있을 뿐이지.” 124번지는 굳게 닫혔고 원혼의 독기를 견뎌야 햇다. 밤새 불을 밝히는 등잔도, 들르는 이웃들도 더는 없었다. 저녁식사 후에 도란도란 나누던 대화도 없었다.

베이비 석스 성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었다. 상상이든 실제든, 은총 따위는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공터에서 춤을 춰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며느리가 그 집에 도착한 지 불과 이십팔 일 만에 그녀의 믿음과 사랑, 그녀의 상상력과 위대하고 커다랗고 늙은 심장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세서는 바로 그 공터에 가기로 작정했다. 핼리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빛이 바뀌기 전. 아직 그녀가 기억하는 대로 녹음이 그곳을 축복하는 동안, 식물이 뿜어내는 김이 자욱하고 딸기가 썩어가는 그곳으로.

세서는 숄을 두르고 덴버와 빌러비드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 세 사람은 다 함께 일요일 아침 늦게 집을 나섰다. 세서가 앞장섰고 여자애들은 뒤따라왔다.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세서는 베이비 석스가 무너져버린 걸 자기 탓으로 돌렸다. 세서는 자신이 보스턴으로 가던 백인 여자애의 속치마에 싸인 갓난아이를 가슴에 안고 포장마차에서 뛰어내린 그 순간부터 124번지에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바위가 햇살을 잔뜩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지칠대로 지쳐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려니 햇살이 눈을 파고들어 어지러웠다. 세서의 몸에서 쏟아지는 땀으로 아기도 온몸을 목욕했다. 그렇게 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손에 뱀장어를 쥐고 아기는 발밑에 내려놓은 채, 자꾸 입안이 마르고 땀이 줄줄 흐르는 중에도 세서는 꾸벅꾸벅 졸았다. 저녁이 되자,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남자가 뗏목을 돌려 총알처럼 빠르게 오하이오 강을 건넜다. 남자는 세서사 가파른 강기슭을 기어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는 동안 겉옷을 빼앗긴 사내아이는 자기 옷으로 감싼 아기를 안고 따라왔다. 남자는 덤불로 가려진 우리로 그녀를 데려갔다. 우리 안의 흙바닥이 잘 다져져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요. 곧 사람이 올 거요. 움직이지 마요. 놈들에게 발각될지 모르니까.”

고맙습니다.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게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요. 세서가 말햇다.

내 이름은 스탬프요. 스탬프 페이드.

몇 시간 후 한 여자가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세서 바로 앞에 섰다. 삼베 가방을 멘 키가 작고 젊은 여자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신호는 한참 전에 봤는데, 더 빨리 올 수가 없었어요.

무슨 신호요? 세서가 물었다.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으면 스탬프가 낡은 돼지우리를 열어놓거든요. 어린애가 있으면 기둥에 흰 천을 묶고요.

여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비우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엘라예요.” 엘라는 가방에서 양모 담요 한 장, 무명 헝겊, 구운 고구마 두 개, 남자 신발 한 켤레를 꺼냈다.

세서는 세 아이를 먼저 보내놓은 베이비 석스의 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P158

노간주 기름을 섞은 소금물 양동이에 발을 넣어주었다. 세서는 그날 밤 내내 발을 담그고 앉아 있었다. 젖꼭지 주변에 앉은 딱지는 돼지기름을 발라 부드럽게 한 다음 깨끗이 닦아냈다. 새벽녘이 되자 조용하기만 하던 아기가 깨어나 엄마젖을 물었다.

젖을 다 먹고 갓난아이가 잠이 들자-눈을 반쯤 뜨고 혀로는 꿈속에서도 젖을 빨면서-나이든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꽃이 만발한 며느리의 등에 기름을 발라주고 새로 바느질한 드레스 안쪽에 두꺼운 천을 이중으로 덧대주었다.

아직도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아직도.

공터에서 세서는 베이비 석스가 예전에 설교를 하던 바위를 발견하고, 햇볕에 달아오른 나뭇잎 냄새와 천둥처럼 울리던 발소리, 밤나무가지에서 밤송이들을 덜어뜨리던 함성을 떠올렸다. 그들을 인도하는 베이비 석스의 심장과 더불어 사람들은 감정을 분출했다.

세서는 이 십팔 일-달의 공전주기-동안 노예가 아닌 삶을 살았다. 어린 딸아이의 맑고 순수한 침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진 순간부터 끈끈한 피 속으로 흘러들어가기까지의 이십팔 일이었다. 치유와 안락함, 진정한 대화의 나날이었다. 다른 흑인들 사오십 명의 이름을, 그들의 생각과 습관을 달게 된 사교의 나날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새벽에 눈을 더 그날 뭘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기분이 어떤지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세서는 헬리를 기다리는 시간을 견뎠다.

124번지와 공터에서, 세서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신을 주장하게 되었다. 자유를 찾는 일과 자유를 찾은 자신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별개였다.

핼 리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그런 날은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세서는 생각했다. 사실을 모를 때도 힘들었지만, 알고 나니 더 힘들었다.

베이비 석스가 먼 곳에서 보내주는 사랑은 가까이 살을 맞댄 그 누구의 사랑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새로운 광경과 오래된 재기억을. 핼리에 대해 알지 못해 텅 비어 있던 공간-이따금 그의 비겁함이나 어리석음 혹은 불운에 대한 정당한 분노로 물들던 공간-, 확실한 소식 업이 비어 있던 그 공간이 이제는 갓 태어난 서글픔으로 가득차버린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소식이 더 남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24번지가 살아 있었던 몇 년 전만 해도 슬픔을 나눌 남자 친구들, 여자 친구들이 사방에서 찾아왔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기 유령이 그 집을 차지하고 있는 한, 친구들은 그녀를 찾아오려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는 다른 종류의 환영을 불어다놓았다. 버터와 응고시킨 우유로 범벅이 된 핼리의 얼굴, 쇠 재갈이 가득 물린 폴 디의 입.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그가 그녀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베이비 석스가 기운을 낸 듯 손놀림이 대담해졌다. 어쨌든 베이비 석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움켜 쥐었고 그 때문에 세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세서는 바위에 앉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며 있지도 않은 손을 손톱으로 마구 잡아뜯었다. 덴버가 달려오고 뒤이어 빌러비드가 왔을 때, 세서는 발버둥치고 있었다.

빌러버드가 말하면서 손을 뻗어 세서의 검은 목보다 더 시커멓게 변하고 있는 멍자국을 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말할 수 없이 시원했다.

세서는 신음했다. 빌러비드의 손가락은 매우 시원하고 능숙했다. 우여곡절 많고 은밀했던, 물위를 걷는 듯 위태로웠던 그녀의 인생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서커스에 가던 길에 서로 손을 잡고 흔들던 그림자들 속에서 힐끗 보았던 행복이 어쩌면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폴 디가 전해준 소식과 아직 그 혼자 간직하고 있는 소식을 어덯게든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 몸서리쳐지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를 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거나 울지 않는다면. 베이비 석스의 친구, 보닛을 쓰고 음식을 만들며 눈물을 쏟던 젊은 여자처럼 영영 미쳐버리지 않는다면. 눈을 부릅뜬 채 자던 필리스 아주머니처럼. 침대 밑에 숨어서 자던 잭슨 틸처럼. 세서의 소망은 이대로 계속 사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귀신이 나오는 집에서 딸과 단둘이 살면서 그녀는 온갖 빌어먹을 일들을 감당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귀신 대신 폴 디와 함께 사는 지금 이렇게 무너지는 걸까? 두려움에 떠는 걸까? 베이비 석스를 찾는 걸까? 최악의 순간은 끝나지 않았나? 이미 다 지나오지 않았나? 124번지의 귀신과 살면서도 그녀는 무슨 일이든 다 견뎠고, 해냈고, 해결했다. 그런데 핼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짝 알게 되었다고 해서 어미를 찾는 토끼처럼 멈춰버리다니.

빌러비드의 손가락은 천국 같았다. 그 손길 아래서 다시 안정적으로 호흡하니 고뇌도 잠잠해졌다. 세서가 그곳에 와서 찾고자 했던 평화가 마음속에 서서히 깃들었다.

모두 아까처럼 말이 없었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세서는 마음이 심란했다. 입맞춤 때문이 아니라 그 직전에, 빌러비드의 마사지로 아주 기분좋게 고통을 쫓고 있을 때, 그녀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 그녀가 사랑했던 손가락, 위안받았던 그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떠올려주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처음 생각처럼 베이비 석스가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덴버 말이 맞았다.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며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 속을 걸으면서, 공터의 마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머리가 맑아진 세서는 자기 손가락보다 더 친숙한 베이비 석스의 감촉을 떠올렸다.

세서는 무려 십팔 년 동안 저승에서 온 손길로 가득찬 집에서 살았다. 목덜리믈 누르던 엄지손가락도 그 손길과 같았다. 어쩌면 혼령이 그곳으로 가벼렸는지도 모른다. 풀 디에게 내몰려 124번지에서 쫓겨난 후, 공터에 자리를 잡았는지도, 충분히 그럴듯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째서 덴버와 빌러비드를 데려갈 생각을 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 듯했다. 그때는 막연히 옆에 누가 있으면 든든하겠다는 충동적인 생각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빌러비드는 너무 걱정한 나머지 두 살배기 아기처럼 행동했다.

불길이 꺼지거나 바람을 쐬려고 창문을 여는 순간 홀연히 사라지는 희미한 탄내처럼, 그 아이의 손길이 꼭 아기 유령 같았다는 의혹은 어느덧 사라졌다. 어쨌든 그건 아주 사소한 고민에 불과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서 펑펑 솟구치는 열망을 방해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폴 디를 원햇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알든,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그를 원했다. 핼리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열망을 알기 위해서 공터까지 온 것이었고, 이제 알앗다. 신뢰와 재기억. 그래, 폴 디가 화덕 앞에서 안고 어루만질 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방법. 그의 몸의 무게와 윤곽,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수염, 굽은 등, 숙련된 손. 뭔가를 기다리는 두 눈과 경이로운 힘.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그의 마음. 그녀의 이야기가 곧 그의 이야기이기에, 이야기하고 다듬고 다시 이야기해도 견딜 만했다. 서로에 대해 아직 모르는 일들, 아직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일들은, 글쎄, 언젠가 때가 올 것이다. 폴 디가 끌려가 쇠를 빨아야 했던 그곳에 대해서도, 세서의 아기 벌써 기나?’의 완벽한 죽음에 대해서도.

세서는 덴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외롭게 지내다보니 자기 마음조차 속이는 비밀 많은 아이가 된 것이다. 또 귀신과 몇 해를 함께 살면서 어떤 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둔감해지고 어떤 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민해졌다. 그 결과 수줍음 많으면서도 고집 센 딸이 된 것이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

두 아이가 감정을 소모하고 집착하는 방식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한 명이 줘야만 하는 것을 다른 한 명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두 아이는 공터를 빙 둘러싼 나무들 사이에 서 있다가, 세서가 숨이 막히게 되자 비명과 입맞춤을 가지고 달려나오지 않았던가.

다정한 한 남자와 더 새롭고 강인한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녀가 처음 124번지에 도착했던 날처럼, 그녀에게는 모두를 먹일 만큼 젖이 충분했다.

세서가 자기를 빼고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것을 생각할 때 치밀던 분노보다 훨씬 더 강한 분노가 치밀었다.

한편 아기 유령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부터 엄마에 대한 끔찍하고 통제할 수 없는 꿈들도 출구를 찾았다. 넬슨 로드와의 일이 있기 전에는 귀신의 이상한 짓거리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유령의 존재를 묵묵히 참고 견뎠기에 덴버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유령의 장난에 지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덴버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서 레이디 존스의 사설 학교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이제 아기 유령은 그녀에게 모든 증오와 사랑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는 그 감정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마침내 넬슨 로드의 질문에 대해 물어볼 용기가 간신히 났을 때에도 덴버의 귀에는 엄마의 대답이나 베이비 석스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그후로는 아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 년 동안 덴버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침묵에 싸여 걸어다녔다. 덕분에 스스로도 믿기 힘든 놀라운 시력을 얻었다. 이를 테면 머리 위로 20미터 가까운 높이의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의 까만 콧구멍을 본다든가 하는. 이 년 동안 덴버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무언가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계단을 기어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베이비 석스는 히어보이가 평소 안 다니던 데서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했다.

기절초풍할 일이 둘이나 생겼으니 어느 것에 먼저 놀랄지가 문제였다. 덴버가 소리를 들은 것? 아니면 벌써 기나?’가 여전히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심해졌다는 것?

차마 들을 수 없는 대답 때문에 닫혔다가 죽은 언니가 계단을 기어 오르려는 소리에 다시 열린 덴버의 귀는 124전지 사람들의 운명에 또 다른 변화를 예고했다. 그때부터 유령은 원한에 가득차, 한숨과 사고 대신 의도적이고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뷰글러와 하워드는 집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내는 데 점점 짜증을 냈고, 타운에서 마구간에 물과 먹이를 나르는 허드렛일을 구하지 못한 때면 끊임없이 퉁명스럽게 불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귀신의 공격이 너무나 직접적으로 겨누어져 결국 두 사람을 내쫓을 때까지. 베이비 석스는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버렿고 그 커다랗고 오랜된 심장이 멈출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 색깔을 갖다달라고 할 때 말고는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의 마지막날 오후,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 앞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더니, 노예로 육십 년 자유인으로 십 년을 살며 배운 교훈을 세서와 덴버에게 남겻다. 이 세상에 불운은 없다. 백인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그놈들은 그만둘 때를 모른다.” 베이비 석스는 이렇게 덧붙이고 침대로 돌아가더니 누비이불을 끌어당겨 덮고는 영원히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할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떠났다.

곧바로 세서와 덴버는 아기 유령을 불러내 설득해보았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결국 유령을 야단치고 두들겨패서 내쫓고 그 자리에 들어앉은 사람은 남자인 폴 디였다. 서커스에 가든 안 가든, 덴버는 아무리 생각해도 폴 디보다는 원한에 찬 아기 유령이 더 좋았다. 폴디가 이 집으로 들어온 처음 며칠 동안 덴버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신의 에메랄드빋 비밀 방에 처박혀 태산처럼 거대하고 고독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짝이 있는데 자기는 유령 친구마저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검은색 드레스와 치맛단 아래로 끈이 풀린 신발을 보았을 때, 그녀는 남몰래 감사하며 몸을 떨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든, 빌러비드는 자기의 것이엇다. 덴버는 빌러비드가 엄마를 해치려 한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지만 도저히 막을 힘이 없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그녀의 욕구는 걷잡을 수 없었다. 덴버가 공터에서 목격한 광경은 그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엄마와 빌러비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일말의 갈등도 없었기 때문이다.

초록색 덤불 방을 나와 뒤쪽의 시냇물을 향해 가면서 덴버는 빌러비드가 정말 엄마를 목 졸라 죽이려 했다면 자신이 어떻게 했을까 고민햇다. 내버려두었을까? 살인, 이라고 넬슨 로드는 말했다. “너희 엄마는 살인을 해서 감옥에 가지 않았니? 그때 너도 같이 가지 않았어?”

두 번째 질문 때문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엄마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질문을 들었을 때 불쑥 떠오른 것은 바로 그곳에서 줄곧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이었다. 어둠, 돌바닥, 혼자서 움직이는 무언가. 대답을 듣느니 차라리 귀가 머는 게 나았다. 햇빛을 찾아 활짝 피었다가 해가 지면 꼭 오므라드는 작은 분꽃처럼, 그뒤로 덴버는 아기 유령만 바라보고 다른 모든 일에서 멀어졌다. 폴 디가 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가 입힌 상처는 빌러비드가 기적적으로 부활하면서 말끔히 나았다.

덴버는 새삼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마디 말, 용서의 몸짓을 간구하면서.

암컷은 오직 수컷의 얼굴에 닿기 위해 껍데기 바깥의 모든 위험을 무릅썼다. 그들이 입은 육중한 갑옷이 충돌하며 허공에서 서로 어루만지는 두 개의 머리를 조롱하고 방해했다.

빌러버드가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았다. 치마가 둥글게 퍼졌다. 치맛단이 물속에서 짙어졌다.

폴 디는 학교 선생이 그를 팔아넘긴 새 주인 브랜디와인을 죽이려 했다가 그곳으로 보내졌다. 브랜디와인은 다른 노예 열명과 그를 한 줄로 묶어 켄터키를 지나 버지니아로 끌고 갔다. 왜 그런 짓을 하려 했는지는 폴 디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핼리나 식소, 폴 에이, 폴 에프, 그리고 미스터 이외의 다른 이유는. 하지만 그가 떨림을 깨달았을 때쯤에는 이미 고질병으로 자리잡은 뒤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떨림이 몸속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뭔가 팔락거리는 것 같더니, 곧 쇄골로 옮겨갔다. 마치 잔물결처럼, 처음에는 부드럽게 찰랑거리다가 나중에는 사납게 요동쳤다. 남쪽으로 끌려가면 갈수록, 스무 해 동안 얼음 연못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그의 피가 서서히 녹아서 조각조각 부서졌다. 일단 녹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 없이 일렁이며 소용돌이쳤다. 때로는 다리에서 떨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꼬리뼈 쪽으로 옮겨갔다. 백인들이 그를 짐마차에서 끌어내렸을 때 그의 눈에는 온통 지글지글 끓는 풀밭뿐인 세상에 개들과 허물어진 오두막 두 채만이 보였고,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는 피 때문에 몸이 앞뒤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햇다. 그날 저녁 수갑 앞에 내민 그의 손목은 침착했고, 족쇄를 사슬에 연결하는 동안 버티고 선 다리 역시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무 궤짝 안에 그를 처넣고 문을 닫자, 그의 두 손은 통제력을 잃고 멋대로 방황했다. 무슨수로도 떨림을 멈출 수 없었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녀석들은 음경을 잡아 오줌을 누는 일도, 숟가락으로 라이머콩을 떠서 입에 넣는 일도 마다했다. 마침내 녀석들이 다시 말을 듣게 되는 기적은 새벽녘 망치와 함께 찾아왔다.

마흔여섯 명 전원이 총소리에 깨어났다. 마흔여섯 명 전원이, 백인 셋이 구덩이 사이로 걸어다니며 차례차례 자물쇠를 땄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사슬이 끝까지 전달되고 모든 죄수가 옆 사람 자리에 서고 나면, 한 줄로 선 죄수들은 뒤돌아서서 자기들이 나온 궤짝을 마주보았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입으로는. 할말이 있으면 오직 눈으로만 주고받아야 했다. “오늘 아침엔 나 좀 도와줘. 몸이 안 좋아.” “해냈어.” “신참이야.”“진정해, 진정하라고.”

사슬 차는 일이 끝나면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때쯤이면 대개 이슬이 안개가 되어 있었다. 종종 안개가 짙어 개들이 짖지 않고 숨만 쉬고 있으면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무릎을 꿇은 죄수들 중에는 간혹 간수의 포피를 물어뜯어 예수님께 가져가는 대가로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쪽을 선택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폴디는 그런 일은 몰랐다. 그는 간수의 냄새를 맡으며, 비둘기 울음소리같이 꾸르륵 거리는 간수의 낮은 신음을 들으며, 자신의 떨리는 두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수는 그의 오른편 안개 속에서 무릎을 꿇은 죄수 앞에 서 있었다.

제일 앞에서 사슬을 끄는 죄수는 온 힘을 다해 이말을 외쳤다. “하이이잉!” 폴디는 그가 그 고마운 말을 외칠 때를 어떻게 아는지 영영 확인하지 못했다. 죄수들은 그를 하이맨이라고 불렀는데, 처음 얼마 동안 폴 디는 간수가 그에게 신호 보낼 때를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새벽녘의 하이이이!”와 해질녘의 호우우우!”가 아이맨이 혼자 책임지고 한 일이었다고 믿고 있었다. 오직 하이맨만이 어느 정도가 적당하고 어느 선 이상이 자나친지, 그 일이 언제 끝나고 때가 언제 오느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손에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하이맨의 인도에 따라 일을 해나갔다.

다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그들은 사람들이 이라고 부르는 화냥년을 죽였다. 그들을 계속 살아가게 했으니까.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또다른 시간의 일격이 마침내 이것을 끝낼 거라고 믿게 했으니까. 그년의 숨통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안전해질 것이다. 성공을 거둔 죄수들-삶을 병신으로 만들고 사지를 절단하고 심지어 땅에 묻어버릴만큼 오랫동안 그곳에서 지낸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거시기를 간질이는 그년의 품에 빠져 앞날을 기대하며 걱정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기억하는 다른 죄수들을 계속 주시했다. 눈으로 나 좀 도와줘, 안 좋아라든가 조심해라고 말하는 죄수들을. 그것은 오늘 난 대들거나 내똥을 먹거나 달아날지도 몰라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계획이야말로 하지 못하게 지켜봐야 했다. 만약 누구 하나가 무모하게 달아나기라도 하면 모든 죄수들, 즉 마흔여섯 명 전원이 함께 묶인 사슬에 끌려갈 테고, 누가 몇이나 죽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 목숨이야 걸 수 있지만 형제들의 목숨까지 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으로 말했다. “진정해.”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팔십육 일이 지나고서야 끝이 났다. 삶이 죽어버렸다. 폴 디는 날마다 온종일 그년의 엉덩짝을 두들겨패서 칭얼거리는 소리조차 못 내게 만들었다. 팔십육 일이 지나자 그의 손도 얌전해졌다. 삶이 굴러떨어져 죽었다. 적어도 폴 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을 묶은 사슬은 모두 살리거나 모두 죽일 것이고, 하이맨을 구원자였다. 그들은 샘 모스(모스부호를 고안한 미국의 발명가)처럼 사슬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고, 위대하신 신이시여, 전원이 물위로 올라왔다.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처럼, 탈출한 좀비들처럼 보이는 그들은, 손에 사슬을 쥔 그들은 비와 어둠을 믿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이맨과 서로를 믿었다.

깊은 우울에 빠진 개들이 누워 있는 헛간을 지나, 경비 초소 두 곳을 지나, 말들이 자는 마구간을 지나, 부리를 깃털 속에 파묻은 암탉들을 지나, 그들은 앞을 헤치고 나아갔다. 달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예 없었으니까. 들판은 늪이었고 길은 낙수받이였다. 조지아 주 전체가 미끄러지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낮이 오면 그들은 박태기나무 덤불 속에 모여 웅크리고 있었다. 밤이 오면 더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며 그들의 모습을 가려주고 사람들을 집에 붙잡아놓는 비가 계속 내려주기를 기도했다. 막상 그들이 발견한 것은 병든 체로키 인디언들의 야영지였다. 장미 이름의 기원이 된 부족.

그들은 대량 학살을 당하고도 고집을 꺾지 않고 오클라호마(1838-1839년에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곳) 대신 도망자의 삶을 선택한 인디언 부족 중 하나였다.

끝났다고 생각한 그들은 조약에 서명한 체로키들과 갈라선 뒤 이숲으로 들어와 세상의 종말을 기다렸다. 지금 앓는 병은 그들이 기억하는 약탈에 비하면 그저 불편한 일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들은 최대한 서로를 보호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수킬로미터 밖으로 보내고, 병자들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남았다. 살아남거나, 죽은 사람들에게 가기 위해.

이윽고 하이맨이 손을 들어올렸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사슬을 보고 가버렸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두 손 가득 작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아이 두 명이 빗물에 점점 묽어지고 식어가는 옥수수죽 단지를 들고 따라왔다.

버펄로 사람들, 인디언들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옥수수죽을 떠먹거나 사슬을 끊어내는 죄수들에게 천천히 말을 붙였다. 인디언들은 경고했지만 조지아 주 앨프리드 수용소의 궤짝에서 도망쳐나온 죄수들 중 그 병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흔여섯 명 전원이 그곳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계획을 짰다. 폴 디는 뭘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정보도 없는 듯했다. 그는 강, , 마을, 구역에 대해 잘 아는 듯 이야기하는 동료 죄수들의 말을 들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설명해주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말도 들었다. 그들이 아는 다른 버팔로 사람들 이야기도 들었다.

탈출할 때 비가 내려 개들이 쫓아올 수 없었을 거라는 하이맨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병든 체로키 인디언들 사이에서 버펄로 털이 난 유일한 사람으로 남은 폴 디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북쪽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자유로운 북쪽, 마법의 북쪽, 흑인을 환대하는 자비로운 북쪽으로. 체로키 인디언은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한 달 전 홍수처럼 쏟아지던 비가 온 세상을 물안개와 꽃으로 바꿔놓았다.

꽃나무를 따라가시오. 꽃이 피는 나무만 따라가시오. 꽃이 지면 떠나시오. 꽃이 모두 지면, 원하는 곳에 이르게 될 거요.”

마침내 그는 꽃송이가 있던 자리에 이제 막 조그만 열매가 맺힌 사과나무밭에 이르렀다. 봄이 북쪽으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가는 동안, 폴 디는 이 동반자를 따라가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2월부터 7월까지 그는 꽃의 파수꾼 노릇을 했다. 어쩌다 꽃을 놓쳐 길을 인도해줄 꽃잎 한 장 찾을 수 없을때면 발길을 멈추고 언덕 위 나무에 올라 주위를 둘러싼 녹음의 세계에서 얼핏얼핏 보이는 분홍빛이나 흰빛을 찾으려 지평선을 살펴보았다. 꽃을 만지거나 잠시 서서 향기를 맡아보는 법도 없었다. 그저 뒤따라갈 뿐이었다. 꽃이 만개한 자두나무의 안내를 받는 누더기 차림의 검둥이.

알고 보니 사과밭은 델라웨어였고, 델라웨어에는 베 짜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폴 디에게 소시지를 주었고 다 먹어치우자마자 그를 단숨에 낚아챘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여자는 그에게 조카의 이름을 붙여주어 간단하게 그를 시러큐스에서 온 조카로 둔갑시켰다. 열여덟 달이 흘렀고, 그는 다시 꽃을 쫓았다. 다만 이번에는 짐마차에 탄 채였다.

폴 디가 조지아 주 앨프리드 수용소와 식소, 학교 선생, 핼리, 형제들, 세서, 미스터, 쇠 재갈의 맛, 버터가 만들어지는 모습, 히커리 나무 냄새, 공책을 하나하나 가슴속의 담배 깡통 속에 집어넣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그가 124번지에 당도했을 무렵에는 이 세상 그 무엇도 깡통의 뚜껑을 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가 아기 유령을 내쫓았을 때처럼 창문이 부서지고 잼 단지들이 나뒹굴고 온 집안에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를 움직이게 했다. 폴 디는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폴 디는 124번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폴 디는 강에서 하는 일에 시달려 뼛속까지 지친 몸으로 화덕 옆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러 하얀 께단을 내려오는 세서의 발소리에 잠이 깼다.

폴 디는 등을 펴려면 애 좀 먹겠구나 생각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그렇지 않앗다. 뻣뻣하거나 삐걱거리는 뼈마디는 한 군데도 없었다. 오히려 몸이 가뿐했다. 이렇게 잠이 잘 오는 장소가 있긴 하지.

그리고 이제 여기서는 흔들의자로군. 좀 의아한 일이긴 했다. 그의 경험상 가구야말로 숙면을 취하기에 가장 안 좋은 곳이었으니까.

다음날 저녁에도 그는 거기서 잤고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세서와 섹스를 하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 잇었고, 빛을 발하는 빌러비드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아침에 세서를 다시 위층으로 데려가거나 저녁식사 후에 그녀와 함께 눕는 걸 일과로 삼았다. 하지만 꼭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방법을 찾아 밤시간 대부분을 흔들의자에서 보내곤 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흘러갔고, 어쩌면 계속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폴 디는 식사를 마치고 세서와 볼일까지 끝낸 후 아래층으로 내려와 흔들의자에 앉았지만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얼른 쉬고 싶어 짜증이 난 폴디는 베이비 석스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노인이 세상을 떠나 침대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잠자리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니 해결된 듯햇다. 그 방은 그의 방이 되었고, 세서도 반대하지 않앗다. 애당초 세서의 이인용 침대는 폴 디가 오기 전까지 십팔 년 동안 그녀 혼자 차지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방식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아침식사 전이나 저녁식사 후의 욕망은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폴 디가 세서의 불평을 들을 일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흘러갔고, 어쩌면 계속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폴 디는 식사를 마치고 세서와 볼일까지 끝낸 후 아래층으로 내려와 베이비 석스의 침대에 누웠지만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폴 디는 집 변덕이 도졌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집이 남자를 구속하기 시작할 때 남자들이 때때로 느끼는 텅 빈 분노 말이다.

더구나 이번의 집 변덕에는 분노도, 숨막히는 답답함도, 다른 데로 가고 싶다는 갈망도 없었다. 그저 위층이나 흔들의자, 그리고 이제는 베이비 석스의 침대에서조차 잠을 잘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폴 디는 식료품 저장실로 갔다.

문득 자의로 이렇게 옮겨다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폴 디가 불안해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방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아침에는 세서를 찾아가고 밤에는 냉장창고에서 잠을 자며 기다렸다.

그녀가 왔고, 그는 그녀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오하이오의 계절은 연극적이었다. 계절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사는 건 자신의 공연 때문이라고 확신하며 프리마돈나처럼 당당하게 입장했다. 폴 디가 아예 124번지에서 밀려나 뒤쪽 창고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에는 여름이 야유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오고 가을이 피와 황금이 들어 있는 병들을 가지고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평온한 막간이어야 할 밤에도 휴식은 전혀 없었다. 죽어가는 풍경이 끈질기고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폴 디는 얇은 담요에 조금이라도 더 온기를 보태려고 신문지를 깔고 덮었다. 하지만 차가운 밤공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등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폴디는 돌아보지 않고 버텼다.

여긴 뭐하러 왔지? 원하는 게 뭐야?” 그는 틀림없이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내 몸속을 만져주고 내 이름을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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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저 달빛에 은색으로 빛나는 돼지기름 깡통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 널 받아주고 잘 대해주면, 너도 좋게 갚아야지. 이러면 안 돼세서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친딸만큼이나 사랑하는 거, 너도 알잖니.”

세서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하지 않아. 난 세서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데.”

은빛 돼지기름 깡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한 그는 안전햇다. 하지만 그가 롯의 아내처럼 덜며 등뒤에 선 죄의 실체를 보고 싶다는 여자 같은 욕망을 느낀다면, 저 저주하는 저주받은 존재에 동정심을 느낀다면, 혹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존중해 그녀를 품에 안아주려 한다면, 그도 역시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가 아는 건 그가 몸속으로 손을 뻗으면서 붉은 심장. 붉은 심장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는 사실뿐이었다.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그러다가 나중에는 덴버를 깨우고 결국에는 폴 디 자신을 깨울 만큼 큰 소리로. “붉은 심장. 붉은 심장, 붉은 심장.”

빌러비드는 탈출해 다리나 어떤 곳에 이르렀고 머릿속에서 다른 기억들은 모두 지워버렸을 거라고. 엘라가 당한 일 과 비슷한데, 다만 엘라는 두 사람-아버지와 아들-에게 당했고 모든 일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점이 달랐다. 두 남자는 자기들을 위해 일 년이 넘도록 엘라를 방에가둬놓았다.

덴버는 빌러비드가 곁방에서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하얀 드레스이며, 그녀의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해온 아기 유형의 헌신이라고 확신했다.

잡다한 집안일로는 빌러비드 안에서 쉴새없이 널름거리는 불길을 끄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제 덴버는 책략가다. 세서가 출근하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빌러비드를 옆에 꼭 붙들어놓을 책략을 세워야 한다.

빌러비드는 혼자만의 몽상에 빠지거나 말문을 닫은 채 시무룩해져 덴버가 눈길을 받을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다. 저녁에는 덴버가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어디든 엄마가 가까이 있으면, 빌러비드의 눈길은 오직 엄마에게로만 향한다. 밤에 잠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빌러비드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 수도 있고, 자리에서 일어나 폴 디가 자는 냉장창고로 갈 수도 있다. 아니면 소리 없이 울기도 한다. 때로는 벽돌처럼 죽은 듯이 자기도 하는데, 그녀의 숨결은 당밀이나 샌드쿠키 부스러기처럼 달콤하다. 그럴 때면 덴버는 빌러비드 쪽으로 돌아누울 것이다. 빌러비드도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다면, 덴버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숨을 깊이 들어마실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원래의 허기보다는 나으니까.

정오라서 바깥은 환하지만 창고 안은 그렇지 않다. 햇빛의 편린이 군데군데 천장과 벽을 뚫고 들어오지만, 막상 창고 안에서는 너무 약해서 이곳저곳을 비추지 못한다. 더 강한 어둠이 피라미떼 같은 햇빛을 삼켜버리고 만다.

빛의 피라미떼가 여전히 위에서 헤엄치고 있지만 덴버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지는 못한다.

차가운 햇살이 어둠을 밀어낸다.

가너 씨는 그들이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햇고 그들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엿다. 노예의 의견에 따른다고 해서 그의 권위나 힘이 실추되지는 않았다. 학교 선생은 그와 다른 현실을 가르쳤다. 호밀밭의 허수아비처럼 손을 흔들고 있는 진실을. 그들은 오직 스위트홈에서만 스위트홈의 남자들이엇다. 그 땅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그들은 인류 가운데 존재하는 침입자들이었다. 이빨 없는 개, 뿔 없는 황소, 거세한 말인 그들의 힝힝거리는 울음소리는 책임 있는 인간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었다.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어, 세서. 내 아이를 낳아주겠어?”

그녀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있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애의 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바업, 그 하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시간을 약간 벌었다. 아니, 사실은 시간을 산 셈이었고, 부디 그 대가를 치르다 파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 오후를 얻기 위해 남은 삶이라는 동전을 치른 듯이.

바람 끝에 실려오는 메마른 추위에 행인들은 외투 안에서 몸이 빳빳하게 얼어붙은 채 걸음을 계속 재촉했다.

마차 바퀴가 상처라도 입은 듯 비명을 질러댔다.

세서와 폴 디는 다시 서로의 손을 잡아채고 붙잡으면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두드리기도 했다. 다 큰 어른인 동시에 철부지란 사실이 민망하면서도 기분좋았다.

폴 디는 세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꼭 안았다. 세서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이 두 사람 모두에게 참으로 소중했기에,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잇었다. 숨도 쉬지 않고, 행인이 지나갈까 신경도 쓰지 않고, 겨울의 햇빛은 희미했다. 사르르,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처럼.

자그마한 자비.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확실한 표시를 해두고 나중에 그 감정을 떠올리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도록 하늘이 베풀어준 자비.

보슬보슬한 눈송이가, 동전처럼 돌에 부딪힐 듯 굵고 묵직한 눈동이가 쏟아져내렸다. 눈은 어쩌면 저렇게 조용한지, 폴 디는 항상 놀라워했다. 비처럼 내리지 않고 비밀처럼 다가왔다.

폴 디는 빌러비드가 오기 전까지 세서가 있었던 자리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두 여자 뒤로 1미터쯤 뒤처져 집으로 가는 내내 폴 디는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분을 애써 삭여야 했다.

창틀도 몰아치는 겨울바람에 달달 떨렸다.

깊은 우물 같은 그의 품에 꼭 안겨서 세서는 길거리에서 폴 디가 아이를 낳아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표정을 떠올렸다. 비록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손을 잡기는 했지만 사실 그녀는 겁이 났다. 그가 원하는게 그런 거라면 잠자리가 얼마나 즐겁겠나 싶은 생각이 잠깐 스치긴 했지만, 또다시 아기를 가진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그때처럼 아이를 돌볼 수 있을 만큼 착해지고, 기민해지고, 강해져야만 한다. 또다시. 그만큼 더 오랫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 ,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그녀는 생각했다. 걱정 없는 성격이라면 모를까, 모성애란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뭣 때문에 그는 그녀가 임신하길 원할까? 그녀를 떠나지 않으려고? 자기가 이 길을 지났다는 표시로? 그는 아마 사방에 애가 있을 것이다. 십팔 년 동안이나 떠돌아다녔으니, 틀림없이 몇 명은 싸질러놓았겠지. 아니야. 그는 그녀가 낳은 자식들이 미운 것이다. 그래서다. 자식들이 아니라 자식이지. 세서는 정정했다. 자식 하나와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빌러비드. 폴 디는 그게 못마땅한 거다. 그녀를 딸아이들과 나눠 갖는 일이. 자기만 빼놓고 셋이서 무슨 일인가로 깔깔거리는 소리를 듣는 일이.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세 사람만의 암호가. 어쩌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애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느라 쓰는 시간조차 못마땅한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들은 한가족이고, 그는 가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지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공기라고는 단 한 숨도 마셔보지 못한 핼 리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 세상에 자유처럼 좋은게 없다는 사실을. 베이비 석스는 그게 두려웠다.

산 채로 잡아와야 돈을 받을 수 있는 놈을 죽여버려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뱀이나 곰과는 달리 죽은 검둥이는 가죽을 벗겨 팔 수도 없고 고기로 무게를 달아봐야 한푼 가치도 없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넘겨주신 짐승들을 지나치게 매질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얼마나 골치 아프고 손실이 큰지 보란 말이다. 결국 몽땅 잃었다.

짐승을 학대하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훈을.

형이 그녀를 찍어누르는 동안 그녀의 젖을 빨았던 또다른 조카는 자기가 덜덜 떨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녀가 그의 눈 속에서 발견한,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사랑 때문이었는지도. 망아지나 전도사나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것처럼 순하고 꾸밈없는 눈빛. 그녀가 사랑을 바을 자격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는 사랑이 담긴 그 눈빛 때문에, 세서는 용기를 내서 이 세상에서 그녀가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던 단 한 사람, 베이비 석스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저 신문에 난 기사 내용 정도만 이야기하고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으리라. 세서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는 일흔다섯 개(기사에 나온 단어의 절반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단어들이 가진 힘도,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힘보다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한번 설명해보기로 마음먹은 건 그 미소와 숨김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해냈어. 모두 빠져나왔어. 핼리도 없이. 그때까지 내 힘으로 혼자해낸 유일한 일이었어. 결심했지. 그러고 나니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잘 풀렸어. 우리는 이곳에 왔어. 내 아기들과 나까지 전부.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어.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일종의 이기심 같은 거였어. 그게 기분이 좋았어. 좋고 옳앗어. 폴디, 난 아주 크고 깊고 넓었어. 두 팔을 쪽 벌리면 우리 아이들이 모두 품에 들어올 정도였지. 그렇게 넓었던 거야. 이곳에 도착한 후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진 것 같았어. 어쩌면 켄터키에서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곳에 도달하는 것, 그래, 그게 바로 자유였다.

돌고, 또 돌면서 이제 그녀는 본론을 꺼내는 대신 또다른 기억을 갉작거렸다.

나는 베이비 석스가 가진 천을 얻어서 작은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 글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건 정말 평생 처음 누려보는 이기적인 즐거움이었다는 거야. 그 모든 걸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었어. 그 딸아이든 다른 아이든 하교 선생 밑에서 살게 둘수는 없었어. 그건 끝이었어.

그녀는 무작정 달려갔다. 자신이 만든 생명들, 귀중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자신의 일부들을 빠짐없이 끌어모아서, 이 세상의 장막 너머로 멀리, 아무도 그들을 해칠수 없는 저편으로 들고, 밀고, 끌고 갔던 것이다. 저 너머로. 이곳 바깥,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벌새의 날개는 계속 파닥거렸다.

p277

2

124번지는 시끄러웠다. 스탬프 페이드는 길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행복한 이십팔 일 뒤 외롭고 배척당하는 십팔 년의 삶이 이어졌다. 그리고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진 몇 달이 이어졌다. 길 위에 드리운, 손에 손을 잡은 그림자가 그녀에게 약속했던 삶이엇다. 폴 디와 함께 있으면 다른 흑인들도 머뭇머뭇 인사를 했다. 잠자리 생활도 있었다. 덴버의 친구를 제외하고, 모든 게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반복되는 걸까? 그녀는 궁금했다. 십팔 년이나 이십 년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삶을 보내면 짧은 영광의 순간이 끼어드는 것이?

그래, 그런 거라면, 그런 거지.

그들은 각각 다른 두 사람이 똑바로 서 있도록 잡아주려는 듯했지만 누구 하나가 넘어질 때마다 즐거움은 배가되었다. 그들이 서로의 손에 의지해 중력과 싸우는 동안, 둑 위의 떡갈나무와 솨솨 바람 소리를 내는 소나무는 그들을 감싸주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빨아들였다. 그들의 치맛자락은 날개처럼 휘날리고 그들의 살갗은 추위와 사그라지는 햇살 속에 백랍으로 변했다.

아무도 그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햇다.

마침내 녹초가 된 그들은 벌렁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그들 위로 펼쳐진 하늘은 다른 나라였다. 핥을 수 있을 듯 가깝게 보이는 겨울 별들이 해가 지기도 전에 떠올라 있었다. 잠깐 동안 세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이 주는 완벽한 평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침이 날 만큼 웃어댔다. 여전히 웃느라 가슴이 들썩거리고 눈물까지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두 손과 두 무릎을 땅에 대호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빌러비드와 덴버는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세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화덕불이 으르렁거렸다.

그 마법은, 그것이 언제나 거기서 나를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설교단 위에서 보인 권위, 공터에서 추던 춤, 그녀의 강력한 부름(그녀는 설교나 전됴를 하지 않앗다. 그러기에는 자기가 너무 무식하다면서. 그녀는 단지 불렀고 회중들은 들었다).

세서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즈음 베이비 석스는 파란색에 지쳐 노란색으로 관심을 옮기는 중이었다.

베이비 석스는 뼛속까지 지쳤던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색깔을 찾는데 팔 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골수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이 약해졌다는 증거엿다.

육십 년의 세월동안 그녀의 인생을 잘근잘근 씹어 마치 생선 가시처럼 뱉어버린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자식들을 빼앗긴 뒤 오 년을 마지막 남은 자식이 안겨준 자유를 누리며 산 끝에 찾아온 피로였다. 그리고 그 끝에 자신의 미래를 팔아 어머니의 미래를 사준, 미래를 맞바꿔준, 그러니까 자기에게는 미래가 있든 없든 어머니에게는 미래를 준 아들도 잃었다. 그나마 며느리와 손주를 얻었다 했더니 그 며느리가 손주를 죽이는(혹은 죽이려 하는) 꼴을 보았고, 다른 자유로운 흑인들의 사회에 속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으며 조언하고 조언받고, 보호하고 보호받고, 대접하고 대접받으며 사는가 했는데,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거리를 두는 꼴까지 봐야 했으니, 그래, 그 정도면 제아무리 베이비 석스 성녀라도 나가떨어질 만했다.

p292

그녀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면 스탬프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땅히 슬픔이 깃들어야 할 자리에는 무관심만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침대에 들어가 눕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것에만 매달리고 싶어요.

파란색이죠. 파란색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요. 노란색도 마찬가지고.

하느님도 포기하셨다는 말이오? 제 몸의 피를 쏟아내는 일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은 지금 하느님을 벌주려는 거요.

하느님이 내게 내리신 벌을 비할까.

이제 두 번째로 124번지를 방문하려 하면서 스탬프는 그때 나눈 대화를 후회했다. 날카로웠던 자신의 어조. 자기가 태산처럼 여겼던 여인이 뺏속까지 지쳐 있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태도를. 이제야, 너무 뒤늦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펌프처럼 사랑을 퍼 올리던 심장, 말씀을 전하던 입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백인들은 그녀 집 마당까지 쳐들어왔고, 베이비 석스는 세서의 난폭한 선택을 비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햇더라면 그녀는 구원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쪽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그녀는 자리에 누워버렸다. 마침내 백인들이 그녀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리고 스탬프도, 1874년이지만 백인들은 여전히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는 살냄새를, 살냄새와 뜨거운 피냄새를 맡았다. 살냄새도 살냄새지만, 화형 린치의 불길 속에서 끓어오르는 인간의 피냄새는 완전히 달랐다.

잡아당겨 보니 아직도 머릿 가죽이 고스란히 붙어 있는 젖은 곱슬머리에 묶인 빨간 리본이 손안에 있었다.

p297

세상의 해롭지 않은 것들만 생각하고 싶다는 베이비 석스의 소망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부디 그녀가 파란색, 노란색, 어쩌면 초록색에도 애착을 가지기를, 하지만 붉은 색은 절대 고르지 않기를 바랐다.

얼마나 엄청난 아우성인지.

그러니까 내가 안다는 걸 알려주기 전에, 먼저 잘 생각해야 해.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전부 생각해봐야지. 베이비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는 거야. 생각해보고, 그런 다음 내려놓아라, 영원히. 잠시나마 폴 디는 저 바깥에 세상이 있고 내가 그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사실 알고 있었어.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알바 아니야. 세상은 이 방안에 있어. 바로 여기에 모든 게 있어. 필요한 모든 게.

바퀴들이 지나간 자국을 터벅터벅 따라가며, 세서는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로 마음이 들떠 몹시 기분이 좋았다.

난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 없어. 설명할 필요도 없어. 그 아이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베이비 석스의 억장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도 잊을 수 있어. 그건 이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소멸이었다고 우리가 동의햇던 것도.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실 때의 눈빛도 잊을 수 있어.

파이크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내가 알아들은 단 두 마디. ‘참으로 사랑하는그 두 마디 전부를. 너는 나에게 바로 그런 존재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겨우 한 마디밖에 새기지 못했다고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졌어. 도살장과 그곳 마당에서 일하던 토요일의 여자들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내가 저지른 짓이 베이비 석스 그분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것도 잊을 수 있어.

세서가 영원한 현재에 빠져 십육 년 만에 처음으로 지가을 하며 일터로 걸어갈 때, 스템프 페이드는 지독한 피로와 평생의 습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지금껏 그 오랜 세월을 맑은 정신으로 살아온 끝에, 결국 자기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잘못되었고 아직도 갚아야 할 또다른 빛이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페이드paid값을 지불했다는 뜻이다)

백인들 중에서 그래도 몇 사람은 다르다고 믿게 해주는 귀고리였다. 학교 선생이 한 명 있으면 에이미 같은 백인도 한 명 있을 거라고. 선생의 조카들 같은 백인이 한 명 있으면 가너 씨나 보드윈 씨나 아니면 점잖게 팔꿈치를 붙잡아주고 젖을 먹일 때 고개를 돌려준 보안관 같은 사람이라도 한 명 있을 거라는 믿음. 하지만 이후 그녀는 베이비 석스의 유언을 한 글자도 남김없이 다 믿게 되었고, 특별한 백인과 행운에 대한 기억들은 몽땅 묻어버렸다. 그런데 폴 디가 그 기억을 다시 파내고, 그녀에게 몸을 돌려주고, 그녀의 갈라진 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기억을 자극한 다음, 또다른 소식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영리한 답변이었지만 학교 선생은 어쨌든 그를 때렸고, 말뜻을 정의하는 일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 소관이지 정의를 듣는 사람 소관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 계절의 공기에는 달콤한 뭔가가 살고 있어서 산들바람이 적당히 불면 도저히 집안에 가만있을 수가 없지.

스탬프 페이드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해독하지는 못한 그 집을 에워싼 목소리들에는 124번지 여자들의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발화할 수 없고, 발화된 적도 없는 생각들이었다.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어도 그애는 죽었을 테고, 그애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절대 두고볼 수 없었다는 걸.

재 자식 말고는 이제 그 누구도 내 젖을 가져가지 못해. 나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젖을 준 적이 없어. 딱 한 번 그런건 강제로 빼앗긴 거야. 그들이 날 붙잡아 눕히고는 빼앗았지. 내 아기에게 줘야 할 젖을.

돌아오는 젖이 거의 없는 게 어떤 건지. 빌러비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거야. 그럼 그애는 이해할 거야. 내 딸이니까. 어떻게든 젖을 남겨두었다가, 심지어 그들이 젖을 빼앗은 후에도 그걸 먹인 아이니까. 그들이 마구간 뒤에서 나를 마치 암소처럼, 아니 염소처럼 다루고 난 후에도 말이야.

이제 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어. 헛간 사건 이후로 나는 세상을 보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아침에 화덕에 불을 피울 때면, 태양이 그날을 위해 뭘 하는지 보려고 창밖을 내다보곤 해. 수돗가의 펌프 손잡이를 먼저 비출까, 아니면 꼭지를 비출까? 풀밭이 회녹색인지 밤색인지 아니면 무슨 색인지 봐. 왜 베이비 석스가 말년에 색깔만 생각하고 살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겠어.

사실 그 붉은 색이랑 빌러비드의 묘비에 감돌던 분홍빛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색깔이야. 이제는 나도 색을 찾아볼 거야. 우리 앞에 어떤 봄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해봐.

너는 내 등에 업혀자고 있었단다. 덴버는 내 뱃속에서 자고 있었고. 마치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었어.

비석에 몇 자 새기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은밀한 부분을 내주려 할까?

그날 공터에서는 언니가 엄마를 죽이려는 줄 알았어요. 죽여서 복수하려는 줄로요. 하지만 그때 언니가 엄마 목에 입을 맞추었고, 나는 언니에게 경고를 해야 해요.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어쩌면 엄마 마음속에는 아직 자식을 죽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언니에게 말해줘야 해요. 언니를 보호해야 해요.

엄마는 밤마다 내 목을 잘라요. 뷰글러와 하워드 오빠는 엄마가 내 목을 자를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어요. 엄마의 예쁜 두 눈이 나를 마치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죠. 딱히 사악한 눈빛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발견했는데 그게 나여서 미안하다는 듯이. 자기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듯이. 이제 바로 어른들이 하는 일이라고. 손에서 가시를 뽑아주거나 눈에 재가 들어갔을 때 수건 귀퉁이로 눈을 닦아주는 것처럼.

그때부터 다림질해놓은 옷이 엉방으로 어질러지고 케이크에 손도장이 찍혔죠. 그런데 누구 짓인지 알아차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돌아왔을 때 나만 누구인지 알아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바로는 아니었지만, 언니가 자기 이름-성이 아니라 엄마가 석공에게 값을 치르고 새긴 글자-의 철자를 대는 순간, 깨달았어요.

베이비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 여덟 명이 제각각 다른 남자의 아이라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노예의 몸은 쾌락을 느끼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식을 많이 낳아 주인이 누구든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도 쾌락을 느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몸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저 시름에 잠겨 색깔과, 당신이 어떻게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만 생각하셨어요. 심장과 몸이 뭔가 할 수 있다고 믿은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이에요.

할머니에게 남은 건 심장이 전부였는데, 백인들이 그걸 부숴버린 거예요.

할머니는 내 애기도 들려주셨죠. 난 마법에 걸렸다고요. 태어날 때도 그랬고, 언제나 무사했다고 말이죠. 그러니 그 유령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엄마 젖을 먹을 때, 내가 그 유령의 피를 같이 맛보았기 때문에 날 해치지 않을 거라고요. 유령이 쫓아다니는 사람은 엄마와, 그 일을 막지 못하고 손놓고 있었던 할머니 당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절대 해치지 않을 거래요. 다만 무한한 사랑을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유령이니까 조심해야 한 대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난 그렇게 해줘요. 언니를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언니는 나랑 놀아주고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찾아와 내 곁에 있어주었어요. 언니는 내 거예요. 빌러비드, 그녀는 내 거예요.

그의 담뱃갑은 이미 활짝 열리고, 내용물이 쏟아져나와 자유롭게 떠다니며 그를 장난감이자 먹잇감으로 삼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식소와 함께 불속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럼 둘이서 한바탕 웃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든 항복의 순간은 결국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질질 끈단 말인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는 가너 씨에게 팔려온 세 명의 배다른 형제들(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중 막내였고, 농장 밖으로 나가는 걸 금지당한 채 이십 년을 지냈다.

모든 게 가너 씨가 살아 있어야 가능했다. 그가 살아 있지 않으면, 그들의 삶은 산산조각나는 것이었다. 그게 노예제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기운이 한창인, 웬만한 키 큰 남자들보다 더 키가 크고 누구보다도 힘이 셌던 폴 디를 그들은 꺾어버렸다. 처음에는 그의 소총을, 그다음에는 그의 생각을, 학교 선생은 흑인들의 충고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말대꾸라 부르면서, 그들을 재교육하기 위한 다양한 교정 방법(공책에 꼼꼼히 기록해두었다)을 개발했다. 학교 선생은 그들이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쉬고, 너무 말이 많다고 불평햇다. 그와 비교하면 그건 사실이었다. 학교 선생은 조금 먹었고, 거의 말이 없었으며, 절대 쉬는 법이 없었으니까. 학교 선생은 그들에게만큼 학생들에게도 엄격했다. 교정 방법이 달랐을 뿐.

담뱃갑 속 내용물에 시달리는 지금, 폴 디는 학교 선생이 오기 전과 오고 난 후에 실제로 달라진 게 있긴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천천히 떠오르는, 만약에 이랬다면 하는 생각들, 그래서 그는 손목을 잡았다. 그 여자의 삶을 지나치다 그 안으로 들어가고, 또 자기 안으로 그녀의 삶을 들이는 바람에 이런 나락으로 떨어졌다. 완전한 한 여자와 더불어 여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은 새로웠고, 그 기분을 잃어버리자 그는 울고 싶었고, 결론 없는 깊은 생각들 소게 잠기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니, 그 계획부터 시작해서 전부 잘못되었다.

기대함 한껏 부풀리고 채워주지는 않는 짓궂은 8월의 바다.

그녀는 그보다 몸값이 훨씬 비쌌던 것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증식하는 자산이었으니까.

대체 검둥이는 얼마나 참아야 합니까?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아야지.”

3

피부가 희기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하기 위해 흑인의 인격을 모두 빼앗을 수 있었다.

완전히 더럽혀서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생각해낼 수도 없게 했다. 그녀와 다른 이들은 그 일을 겪고도 살아남았지만, 자식만큼은 절대 그런 일을 겪게 할 수 없었다. 자식들은 그녀의 보배였다. 백인들이 그녀 자신은 더럽혀도 괜찮앗다. 하지만 그녀의 보배만큼은, 마법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보배만큼은, 그녀의 순결한 분신만큼은 그렇게 되게 할 수 없엇다.

그녀 자신은 도살장 마당에서 몸을 팔지언정, 딸에게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세상 어느 구구도, 딸의 특징을 공책의 동물적인 특징 목록에 적을 수는 없었다. 안될 말이지, , 안되고 말고. 베이비 석스라면 걱정하면서도 체념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서는 필사적으로 거부했었고, 지금도 거부했다.

엄마는 어떻게든 믿게 해야 한다고 느끼는 단 한 사람, 빌러버드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자기가 한 행동이 옳았다고,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세서를 때리는 뭔가가 124번지를 차지하고 들어앉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엘라는 화가 났고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비열한 놈들을 기준으로, 무엇이 악마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을지 가늠해보려 했다. 엘라는 과거의 잘못이 현재를 지배한다는 생각이 못마땅했다. 세서의 범죄는 기가 막힐 정도였고, 그녀의 교만은 심지어 그보다 훨씬 더했다. 그렇지만 죄악이 집안에 들아와 제멋대로 활개치고 다닌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도 충분히 힘들었다. 미래는 지는 해이며, 과거는 뒤에 남겨져야 할 무엇이었다.

노예의 삶이든 자유인의 삶이든, 하루하루가 시험이고 시련이었다. 자기 자신이 해결책인 동시에 문젯거리가 되는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 겪는 것으로 족하니라.” 아무도 그이상은 필요하지 않앗다.

소리의 파다가 밤송이들을 떨어뜨리고 깊은 강물의 바닥까지 닿을 만큼 드넓게 퍼졌다. 그 파도는 세서를 덮쳤고 밀려드는 소리 속에서 그녀는 세례받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새어들어오는 대낮의 햇살은 기억을 녹여 빛 속을 부유하는 미진으로 바꾸어버린다.

귀신이 떠난 124번지는 그저 수리가 필요한 여느 낡은 집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조용하다. 스탬프 페이드가 말했듯이.

한때는 아우성이 그 집을 온통 애워싸고 있었지. 이제는 조용해.”

폴디는 자기 것도 아닌 이 땅의 아름다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지의 품에 몸을 숨기고, 먹을 걸 찾아 손가락으로 흙을 파고, 강둑에 매달려 물을 핥아마시면서 절대 그 땅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하늘이 별들의 무게로 약해져 친근하게 다가오는 밤에도, 그것을 사랑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땅의 묘지들과 낮게 누운 강들도. 혹은 멀구슬나무 아래 외롭게 서 잇는 집 한 채. 어쩌면 매여있는 노새 한 마리와 그 가죽에 내리쬐는 햇살도. 어느 것이든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지만, 그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힘들게 버텼다.

세서,” 그가 말한다. “당신과 나, 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어, 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

당신이 당신의 보배야. 세서, 바로 당신이.”

흔들어서 달랠 수 있는 외로움이 있다. 팔짱을 끼고 무릎을 끌어당겨 세운 채 몸을 흔들고, 계속 흔든다. 이런 동작은 배의 흔들림과는 달리, 몸을 흔드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고 가라앉혀준다. 그것은 내면의 문제다. 피부처럼 팽팽하게 감싸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배회하는 외로움도 있다. 몸을 흔들어도 진정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살아 있어서.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메마르고 확산되는 그것은 자기 자신의 발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곧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발자국뿐 아니라 물과 그 물 아래 있는 것 전부가 잊힌다. 남는 건 날씨뿐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고 행방이 묘연한 이들의 숨결이 아니라 처마를 스치는 바람, 혹은 너무 빨리 녹는 봄의 얼음이다. 그저 날씨뿐. 물론 키스를 바라는 아우성도 없다.

해설

빌러비드, 차마 말할 수 없는 기억할 수 없는

출몰하는 기억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과거 앞에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지난 일이라며 망각 속에 깊이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망각 속에 묻힌 줄 알았던 과거가 한사코 되돌아온다면, 유령처럼 불쑥불쑥 출모하며 현재도 미래도 살 수 없게 우리를 붙든다면? 더구나 그 유령이 내 집만이 아니라, 방방곡곡 수많은 집에 서까래까지 꽉 들어차 있다면, 그때는 망각이 더 이상 손쉬운 해답일 수 없을 것이다. 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1987 는 미국 흑인의 역사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 바로 이러한 딜레마, 감히 기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코 잊을 수도 없는 뼈아픈 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보지 못햇던 놀라운 해답을 내놓는다.

물론 가슴 아픈 흑인 역사를 다룬 작가가 토니 모리슨 한 사람만이 아니며, <빌러비드> 이전에도 세상을 감동시킨 흑인 문학 작품은 많았다. 토니 모리슨 자신 또한 다서번째 장편소설 <빌러비드>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첫 번째 자품 <가장 푸른 눈>1970에서 <술라>1973, <솔로몬의 노래>1977, <타르 베이비>1981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흑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경험을 기록하고 문학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러므로 단순히 미국 흑인들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란 차원에서만 본다면, <빌러비드>는 아무리 그 문학적 성과가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흑인 문학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종종 흑인 여성 작가라는 표현이 토니 모리슨을 한정짓는 테두리처럼 적용되듯이 말이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이란 표현을 진부한 관용어처럼 사용하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그 어떤 형용사를 덧붙이고 아무리 많은 숫자를 나열해도 어렴풋이 그 윤곽만 드러낼 수 있을 뿐, 결코 그 핵심에는 다가갈 수 없는 비극적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곤 한다. 토니 모리슨이 작가의 말에서 직접 밝혔듯이, <빌러버드>를 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마가릿 가너 사건역시 그러한 비극 중 하나였다.

18561, 켄터키 주의 노예엿던 마거릿 가너는 <빌러비드>의 주인공 세서처럼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쳣다. 그리고 그녀의 삼촌이자 노예출신인 조 카이트의 집에 몸을 숨겻다. 하지만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 꾼과 보안관들이 집을 포위해 끝내 붙잡힐 지경에 처하자,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햇다. 그리하여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에 마거릿 가너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통 노망노예에 대한 재판이 단 하루면 끝나는 데 반해 이 재판은 이례적으로 길어졌는데,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간적 이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 아니면 1850년에 발효된 도망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하는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지만 마거릿 가너의 변호사는 그녀를 살인죄로 재판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가너 역시 자신의 행동을 그저 이성이 없는 노예의 미친 짓으로 여기고 관대히 넘기는 것을 반대햇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거릿 가너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

1974년에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근무하던 토니 모리슨은 노예제도 초기부터 노예해방까지 삼백 년 동안의 흑인 역사를 담은 <블랙 북>을 편집하다가 이 사건 기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야기에 깊이 사로잡혔다. 그리고 오랜 구상 끝에 <빌러비드>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아무리 슬프고 억울한 역사라고 해도, 그 자체를 충실히 재현하거나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토니 모리슨은 마거릿 가너 사건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았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자신이 상상한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넣엇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조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토니 모리슨은 마거릿 가너 사건에서 단지 노예제와 인종문제라는, 어떻게 보면 역사적으로 이미 결론이 나버린 사회문제를 상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백인들의 야만적 행위를 고발하고 자유를 향한 흑인 노예의 처절한 몸짓을 그려냄으로써 연민을 자아내고 휴머니즘을 자극하는 것 역시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다. 토니 모리슨은 1987<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햇다.

이 소설은 노예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노예제는 매우 예측 가능합니다. 그런 제도가 있고 그것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들이 있고, 그다음에는 거기서 벗어나거나 벗어나지 않거나 할 뿐입니다. 노예제만으로는 런 소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어던 사람들의 냄녀적 삶에 대한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노예제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사람일 뿐입니다글로 쓰기엔 분노는 너무 시시하고 연민은 너무 질척거리는 감정입니다.

<빌러비드>는 단지 노예제와 인종문제 같은 이미 기록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말하고 감히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지. 그 불가능한 방법에 대한 진지한 모색인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유령이나 빌러비드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시킨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구분은 무너지고, 죽은 자는 육신을 입고 산 자들의 집을 찾아온다.

빌러비드, 과거의 방문

<빌러비드>는 노예제가 존재했던 남북전쟁 이전 시대부터 이후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지만, 현재 시점으로만 따진다면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873년 여름에서 18746월까지 일 년에 불과하다. 또한 온갖 사건과 사연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은 마을 사람들조차 왕해하지 않는 블루스톤 스트리트 124번지에 어느 날 갑자기 손님 두 명이 찾아온 것이 전부다. 떠돌이 흑인 남자 폴 디와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빌러비드, 이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아기 유령이 이따금 일으키는 소동 이외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파란만장한 사건과 들끓는 감정들은 전부 지나가버린, 그래서 지금은 완전히 덮어버린 과거일 뿐 이 두 모녀에게는 세상과의 교류도, 변화도, 미래도 없다.

고인 웅덩이와 같은 이 집에 이야기가 소용돌이치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은 그들이 문을 열고 낯선 손님을 맞아 들이는 그 순간부터인 것이다. 첫 번째 손님인 폴 디는 이십여년 전 스위트홈이란 노예 농장에서 고통스러운 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인물이다. 그는 세서의 남편인 핼리에 대한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124번지에 깃든 아기 유령을 쫓아내고 단단하게 굳은 세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모녀가 집밖의 세상으로 다시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세 사람이 처음으로 마을 축제에 참가하고 어쩌면 정체된 시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때, 두 번째 손님인 정체 모를 아가씨가 집 앞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세서는 이 아가씨의 이름이 빌러비드란 말을 듣고서, 공교롭게도 자신이 사내에게 몸을 팔아가면서까지 죽은 딸아이의 묘비에 새겨넣은 글자(Belover, 사랑받은 이)와 똑같다는 사실을 떠올리지만 설마 그녀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 갓난아이일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십팔 년 전, 세서는 시어머니 석스의 집으로 들이닥친 노예 사냥꾼에게 자식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어러니아기의 작은 목을 톱니로 그어야만 했던 것이다.

두 손님 모두 되돌아온 세서의 과거였지만, 그들은 세서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를 쓴다. 폴 디는 세서가 아픈 과거를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반면, 빌러비드는 세서에게 아직도 달래주고 어루만져야 할 고거의 상처가 남았음을 일깨우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침내 빌러비드와 죽은 딸아이의 연관성을 깨달은 세서는 모든 걸 잊은 채, 오직 빌러비드를 먹이고 돌봐주는 데 몰두한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끊임없이 변명과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라는 신비한 인물을 등장시켜 세서의 과거와 현재가 얼굴을 맞댄 채, 서로에게 영원히 들려줄 수 없을 것 같았던 원망과 위로와 사라의 말을 주고받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날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빌러비드는 세서를 완전히 차지하고 마지막 남은 그녀의 딸 덴버까지 삼켜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결국 세서는 어린 딸아이를 죽여야 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소름 끼치는 사건을 다시 겪은 후에야 비로소 빌러비드, 혹은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다시 겪은 과거에서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어린 딸아이의 목을 긋는 대신, 노예 사냥꾼이라고 착각한 집주인 보드윈을 향해 얼음송곳을 휘두른 것이다. 세서의 새로운 선택 때문이었을까, 빌러비드는 나쁜 꿈처럼 사라져버린다.

여러 비평가들이 <빌러비드>를 노예제에 희생된 육천만 명 혹은 그이상의 흑인들에 대한 애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제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기록이라기보다, 차라리 잘 잊어버리기 위한 기록인 셈이다. ‘차마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이렇게 재기억remermory과 망각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언어의 주술사이며 치료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토니 모리슨,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은 1931년에 가난하지만 근면하고 경건한 흑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리슨은 어릴 때부터 열렬한 독서광이었으며 가정에서 항상 남부 흑인들의 만담과 노래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이야기와 독서, 음악을 사랑했던 부모님의 모습은 나중에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여러 인물로 나타난다. 조부모와 외조부모 역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외할아버지인 존 솔로몬 월리스의 이야기는 그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솔로몬의 노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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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은 인종차별이 거의 없는 오하이오 북부에서 성장한 까닭에 십대가 되어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인종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흑인과 백인이 함께 다릴 수 있는 통합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모리슨은 그 반의 유일한 흑인 학생이자 글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틈틈이 글을 발표해오던 그녀는 바로 이 작품 <빌러버드>1988년 플리처상을 수상햇으며, 1992년에는 여섯 번 째 장편소설<재즈>를 발표하고서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199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전미 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하여 20새기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드높은 명예도 그녀가 팔십세가 넘은 지금까지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다 기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흑인이며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흑인 여성 작가라는 명칭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종문제와 여성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전혀 새로운 서술 방식을 구현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남성 작가에 비해 한계가 뚜렷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흑인여성 작가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토니 모리슨의 등장 이후에 흑인 여성 작가란 생물학적 특수성에 기반을 둔 제한된 경험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심오한 경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강렬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단지 흑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로만 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빌러비드> 역시 노예제란 비정한 제도 때문에 누구보다 사랑했던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던 흑인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고집 세게 우리의 곁으로 돌아와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달래줄 것을 요구하는 모든 죽은 자들의 이야기, 기억 저편으로 내쫓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현재로 불러들일 수박에 없는 과거, 그래서 번번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뼈아픈 인간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토니 모리슨의 애도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원한에 찬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빌러비드>에서는 과거의 방문이 미래의 희망으로 이어졌다. 자발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세상을 향해 걸어나가는 덴버의 모습에서 끔찍한 과거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124번지 집을 떠났던 순서와 반대로 다시 돌아온 폴 디는 세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세서, 당신과 나, 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어. 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445)

그렇지만 되돌아온 과거를 맞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두려움에 떨며 과연 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할지, 아니면 내쫓을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 손님이 가져온 것이 아픔일지 원한일지 화해일지 진정한 망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번이 되돌아오는 그들을 내쫓기만 하는 한, 우리는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결코 떠날 수 없으리라.

토니 모리슨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햇다.

나는 이것이 출몰하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과거가 되길 바랐습니다. 과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과거 말이죠. 기억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해나가기 전까지는 .

최인자

작가의 말

1983, 나는 직장을 잃었다. 아니, 그만두었다. 직장을 잃었다고도 그만두었다고도 할 수 있었고, 양쪽 다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전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 출판사에 가서 업무의 일환으로 편지 쓰기, 전화 통화, 회의를 하고 집에서는 원고 편집을 하면서 시간제로 일을 해왔다.

두 가지 이유에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첫째로, 나는 이미 네 편의 소설을 쓴 터라 누가 봐도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글쓰기였다. 어떻게 편집과 글쓰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느냐며 우선순위를 물어보는 것이 사실 나는 진부하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마치 어떻게 가르치면서 동시에 창작을 할 수 있죠?” “어떻게 화가나 조각가나 배우가 자기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죠?”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편집과 글쓰기의 조합은 부적절해 보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보다 분명햇다. 내가 만든 책들이 큰 돈벌이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큰돈은 요즘 의미하는 그 정도의 돈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환상적인 출간 목록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저자들(토니 케이드 뱀버라, 준 조던, 게일 존스, 루실 크릴프턴, 헨리 듀머스, 리언 포러스트), 독창적인 가설을 세우고 실제 연구 조사하는 학자들(윌리엄 힌턴의 <身翻신번:몸신,날다번>, 이반 반 세르티마의 <콜럼버스 전에 그들이 왔다>, 캐런 드크로의 <성차별주의자 정의>, 친웨이주의 <서구와 그 밖의 우리>,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명사들(앤절라 데이비스, 무하마드 알리, 휴이 뉴턴)등등,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으면 글을 쓸 저자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나의 열정은 다른 이들에게 묵살당햇고, 그것은 신통치 않은 판매 부수로 나타났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70년대 후반에도 잘 팔리는 작가를 붙잡는 일이 원고를 편집하거나 신진 작가 혹은 나이든 작가의 활동을 지원해주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 아니, 그냥 이제는 어엿한 작가답게 살아야 할 때가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고만 해두자. 인세와 글쓰기만으로 살자고 말이다. 대체 뭘 보고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느니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생각을 붙잡았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며칠 후, 허드슨 강가에 튀어나온 부두 위 집앞에 앉아 있던 나는 기대했던 평온 대신 동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민 목록을 쭉 살펴보았지만, 딱히 새롭거나 시급한 문제는 없었다. 이토록 완벽한 날, 이토록 잔잔한 강을 바라보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이 동요가 뭔지 파악할 수 없었다. 회의할 안건도 없었고, 설사 전화가 울려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심장이 망아지처럼 쿵쿵 뛰는 소리는 들렸다. 나는 공황 상태와도 같은 이 불안감의 정체를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려움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뭔가가 나를 탁 내려쳤다. 나는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평생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황홀도, 충만함도, 홍수처럼 밀려드는 쾌감이나 성취감도 아니었다. 보다 순수한 기쁨, 확신과 더불어 들이닥친 막대한 기대감이었다. 나는 <빌러비드>에 착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유롭다는 것이 여성에게 과연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에 관심을 쏟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해방의 충격이었다. 80년대에는 동등한 임금, 동등한 대우, 취업 기회, 교육그리고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아이를 갖느냐 마느냐에 대한 오명 없는 선택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시끄러웠다. 필연적으로 나는 이 나라 흑인 여성들이 겪은 전혀 다른 역사를 떠올렸다. 결혼은 환영받지 못했고 아예 불가능하거나 불법이었던 역사, 자식은 낳아야 했지만 자식을 갖는, 책임지는 것, 다시 말해서 아이의 부모가 되는 일은 자유만큼이나 불가능했던 역사를. 노예제의 논리에 따르는 특수한 상황에서, 친권 행사는 범죄였다.

착상은 분명 매혹적이었지만, 막상 그림을 그리려니 쉽지 않았다. 노예제의 논리가 낳은 잔혹성과 지성을 구현할 수 있는 인물들을 불러내는 것은 내 상상력을 넘어서는 작업임이 드러났다. 그때 직장에 다닐 때 출간했던 책들 중 한 권이 생각났다. <블랙 북(미들턴 A. 해리스, 모리스 레빗 등이 쓴 논픽션.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흑인 관련 사건 기록과 사진 등이 실려 있다)>에 인용된 한 신문 기사는, 젊은 엄마 마거릿 가너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노예로 살다 도망친 그녀는 주인의 농장으로 자식들을 돌려보내느니 차라리 그중 하나를 죽여버린(그리고 나머지 자식들도 죽이려고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재판은 도망노예를 소유주에게 송환하도록 한 도망노예법에 맞서는 투쟁에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그녀의 온전한 정신과 뉘우침 없는 태도는 신문뿐만 아니라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의 생각은 매우 단호했다. 또한 그녀의 발언으로 판단하건대, 지성과 잔혹성, 그리고 자유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불사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의 마거릿 가너는 대단히 매혹적이었지만 소설가에게는 갑갑한 소재였다. 내 목적을 위한 상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역사를 자유와 책임감, 그리고 여성의 위치에 대한 우리 시대의 문제들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의 생각들을 상상해내고 그것들을 파헤쳐서, 본질적으로는 역사적 진실이지만 엄밀하게는 사실이 아닌 숨은 의미를 찾아내보려 했다. 여주인공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모든 수치와 공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영아살해를 선택한 결과를 고스란히 떠맡고,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것이다. 노예제라는 땅은 광활하고 길조차 없었다. 그 땅의 몸서리나는 풍경(감추긴 했지만 완전히 감추지 못했고, 억지로 묻어버렸지만 잊지는 못한) 속으로 독자들(그리고 나 자신)을 초대하는 일은 몹시 시끄러운 유령들이 출몰하는 묘지에 천막을 치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관에 앉아 그네를 타면서 이따금 철썩 날아오는 강물의 주먹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거대한 돌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더미 위에는 잔디밭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잇었는데, 군락을 이룬 나무의 깊은 그늘 속에 위치한, 단단한 목재로 된 정자로 가로막혀 잇었다.

그녀가 강물에서 걸어나와 바위를 기어오르더니, 정자에 몸을 기대었다. 근사한 모자.

그렇게 그녀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등장인물들)이 그걸 알고 있었다. 이 문장은 나중에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로 바뀐다. 이야기의 핵심 인물은 그녀여야만 했다. 살인자가 아니라 살해당한 자, 모든 걸 다 잃고도 그에 대해 아무 발언권도 갖지 못했던 사람. 그녀는 바깥을 떠돌고 있을 수 없었다.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오두막아닌 진짜 집에. 정식 주소가 잇는 집, 한때 노예였던 사람들이 사는 그들의 집에. 이 집으로 들어가는 로비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 혹으 이 소설로 들어가는 서문도 있을 수 없다. 나는 다짜고짜 독자를 납치하여 낯선 공간에 사정없이 내던짐으로써 이 책의 인물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는 첫걸음을 디디게 하고자 했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아무 준비나 대비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무데로나 끌려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스위트홈(즐거운 집)’이나 다른 여느 농장에 붙이는 이름과는 다른 식으로 이 집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은 중요했다. 아늑함나 화려함을 암시하거나, 한때 귀족적이었던 과거를 주장하는 어떤 형용사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오직 숫자만이 이 집을 명명하는 동시에 어느 거리나 도시와 구별해줄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흑인 이웃집들과 이 집의 차이를 보여, 자기 집 주소를 가진 해방노예들의 우월감이나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인성을 가진 집- 그 인성이 몹시 야단스러워서 우리가 귀신 들린 집이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노예 경험이 피부에 와 닿게 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통제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들의 느낌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기를 희망했다. 일상의 질서와 평온이 궁핍한 사자(死者)들의 대혼란으로 산산히 깨져버리기도 하고, 어떻게든 잊으려는 초인적인 노력이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기억에 의해 위협받기도 하는 삶이 어떤 것이지를. 노예 상태를 개인적으로 경험으로 표현하려면, 언어는 길을 벗어나야만 한다.

나는 부두 위에서의 그 순간을, 사람을 현혹하는 강과 가능성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 쿵쿵거리며 뛰던 심장, 그 고독과 위험을 소중하게 아껴 썼다. 그리고 근사한 모자를 쓴 소녀. 뒤이어 또렷이 맺힌 초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