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사례 - dasuleul wihan sosuui huisaeng salye

유네스코 2월 호 잡지의 주제를 생각하다 떠오른 것은 '인권'이었고, 인권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보니 한 권의 책이 보였습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이 책을 주제로 삼아 영선중 유네스코부 학생들이 각자의 생각을 글로 쓰고 엮어서 2019년의 첫번째 잡지가 탄생했습니다.

나는 이 독후감을 쓰기 훨씬 전부터 이 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쓴 저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대강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유네스코 출판부에서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책을 찾다가 이 책을 고르게 되었고 그 중 내가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1강에서 표창원 선생님이 다룬 주제는 ‘폭력’이다. 나도 그렇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를 떠올리면 당연히 폭력이라는 전제 아래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경제적, 심리적 피해 또한 폭력이다. 요즘 인권이 지켜지지 않아 폭력으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전보다 더 많아졌다. 이런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했지만, 표창원 선생님은 사람들이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다며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상 깊게 본 구절은 '부작위에 의한 폭력' 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힘을 사용하지 않은 폭력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인정되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를 남발할 경우 모두가 범죄자가 되므로 법률적인 관점보단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과 딱 들어맞는 사례가 나오는데,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소수가 된다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도 내가 소수가 된다면 달라질 것 같다. 이렇게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면 폭력이 줄어들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다음 2강은 오인영 선생님의 ‘민주주의’ 에 대한 강의이다. 구조주의 문학 이론가로 유명한 츠베탕 토도로프가 쓴 책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 그 중 하나가 ‘주권재민’ 이라고 하셨다. 즉, 권력이 인민에게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우리 헌법 제1조 2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권재민은 민주주의 제1의 원리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몇 백 년 전에는 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지금은 그 시대의 원칙이 이렇게 민주주의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신기했다. 여기서 새로운 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 제일 기억에 남았던 용어는 ‘역효과 명제’ 이었다. 이것은 ‘ 해봐야 소용없다, 그럴수록 더 나빠진다.’ 라는 명제이다. 좋게 바꾸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나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뜻이다. 다른 용어들은 약간씩 아리송한 감이 있었는데 역효과 명제는 한 번에 이해가 가서 신기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비슷한 논리가 있지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가 그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먹고사는 데 방해만 된다는 논리입니다. 서민들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진 뿐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역사는 어떻습니까? 이런 논리가 허구임을 입증했지요.] 라는 부분이다. 현재는 민주주의가 더 실행되었을수록 선진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3강, 4강, 5강에서는 각각 철학, 세계사, 평화를 각각 강의 주제로 두고 있다. 철학에 대해 쓰신 선우현 선생님은 철학을 삶의 원동력으로 여기시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철학을 사랑하시는 분 같았다. 나처럼 철학을 어려워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뼈가 있는 문장을 쓰기도 하셨다. 3강을 읽고 나니까 철학이 우리 삶과 많이 관련이 있는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전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4강에서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있는 IS 테러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해가며 IS에 대한 배경과 과정, 여러 사건들을 소개해주고 있고 그에 따른 미국의 대응,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4강에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받아들이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섞여 들면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라는 부분이다. 4강을 읽고 나니 왠지 내가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많은 걸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주제로 한 5강에서는 ‘평화 교육’ 대신 ‘평화 이야기’ 라는 워딩을 사용해서 교육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이 들어간 ‘이야기’로 표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에서 나는 “삶의 핵심 동력인 자유나 평화, 행복감 등과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이 굉장히 와 닿았고 삶의 결과가 행복이기보다는 삶의 과정이 행복인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맨 처음 봤을 때 제목에 대한 내 의견을 생각을 해봤고, 나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맞다’ 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것보단 더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책 안의 5강을 전부 읽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반대가 옳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어느 한 명이 뒤처지거나 희생당하지 않도록 모두의 인권을 존중해주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고요하고 따분한 겨울방학. 유네스코 과제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 표지에는 ‘인권이 해답이다’라고 써져 있어 법과 관련된 책이라고 생각하여 지루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읽기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철학, 폭력, 민주주의, 세계, 평화와 같은 어려운 개념과 문제들을 옛날이야기가 아닌 우리들도 아는 요즘 이야기와 사건들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써 내려간 책인 것을 금세 알 수 있었고, 책 중간중간에 Q&A가 있어 읽다 이해하지 못한 궁금증 또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등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알만한 요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를 들면 ‘인분 교수’사건, ‘IS(아이에스, Islamic State)’, 그리고 ‘암살’과 같은 최신 영화를 이용해서 설명하여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솔직히 저는 ‘IS가 문제다’라는 것밖에 알지 못하고, 정작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도 몰랐었는데, 이 책을 통해 견문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 1강 폭력 파트에서 이용된 ‘인분교수’ 사건을 예를 들어 제 생각을 말해볼까 합니다. 이 사건은 교수가 학생한테 인분, 즉 사람의 똥을 먹인 사건입니다. 교수는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해소하는 한편,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이고, 학생은 교수의 말과 평가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듣고서 강자의 폭력에 익숙한 나머지 피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저는 안타까웠고, 분노했습니다. 또 이 폭력 파트에서 가장 공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으면 폭력입니다.’ 라는 구절인데요? 제 친구가 겪었던 이야기를 말해볼까 합니다. 그 친구를 쉽게 'A' 라고 하겠습니다. A에게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A는 남자이고 A의 친한 친구는 여자였죠. A는 그 친구와 함께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고 있었고, 손가락을 잡고 갔습니다. A가 손가락을 잡힌 상태였고요. 뒷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남자와 여자가 손(손가락)을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꼭 사귄다거나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고 있었는데 한 선생님이 그 상황을 보자마자 물어보거나 어떤 상황인지 알려고 하시지도 않고 무작정 A의 안쪽 팔을 꼬집었습니다. 심지어 A가 손가락을 잡은 것도 아니고 잡힌 건데 말이죠. 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A에게 ‘너도 네 친구처럼 전학가고 싶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공평한 상황에서도 A는 자신의 학교생활이 걱정되어 계속하여 죄송하다고만 했습니다. 이런 것이 ‘인분교수’ 사건과 비슷한 뉘앙스의 폭력 아닐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위를 이용한 ‘강자’의 폭력에 대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고, 이것이 불공평하고 엄연히 잘못된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소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도 앞으로는 그냥 굴복하고 넘어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세계’ 파트에서는 세계사뿐만 아니라 인문학도 매우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잊어가는 세계사도 복습하고 교과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들도 알 수 있어 유익한 파트였습니다. 저에게 철학은 다른 주제들보다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때 까지 읽고, 전문가 선생님의 Q&A를 보니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철학에 흥미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고 생각을 찬찬히 해보게 된 책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평화와 인권에 관한 일에 관심이 있거나, 관심은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공부해본 적이 없는 분들, 이제 막 평화와 인권을 알아가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이 책은 표창원, 오인영, 서우현, 이희수, 고병헌 선생님 다섯 분이 각각 폭력, 민주주의, 철학, 세계, 평화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은 표창원 선생님의 ‘1강, 나는 너를 왜 괴롭히는가?’ 이다. 책에서는 우리가 폭력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약간 의아했지만 우리가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도 폭력 장면을 흔히 보기에 우리가 폭력에 익숙하다는 말이 납득이 되었다. '폭력'이란 정확하게 무엇일까? 책에서는 폭력이란 ‘고의적인 힘의 사용으로 상대에게 물리적 신체적인 결과는 물론 경제적, 심리적 피해를 주는 것’ 이라고 정의 했다. 학계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를 대표적으로 욕구, 감정, 이익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과연 이 세상에 정의로운 폭력은 존재할까?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 해왔지만 결국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연구하고 논의를 통해 합의한 철학적, 윤리적, 법률적으로는 폭력과 정당한 힘의 사용은 구분된다고 한다. 여기서 ‘정당함’이란 첫째는 목적의 정당성이고 두 번째는 평화적인 수단이 우선이 된다. 1강에서 인상 깊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부분이었다. 표창원 선생님은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사건’ 을 한 예로 들었다. 화물선이 좌초한 상태에서 선체에는 18명의 사람이 표류해있고, 며칠이 지나도 구조선은 오지 않고 식량은 떨어져간다. 선장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선원들이 반발하다가 굶주림이라는 원초적 고통이 찾아와 제비뽑기를 통해 희생자를 결정하게 된다. 이들이 후에 구출되고 난 후 밝혀진 사실은 사실 희생자는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희생을 정당화 시켰던 제비뽑기는 사실 조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자주 접한다. 다수결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은 저항을 이기주의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을 공정한 논리로 정당화 시킨다. 우리는 소수의 희생을 발판삼아 다수가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나 또한 지금까지 소수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의견들을 한편으로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맹수들은 약한 새끼는 키우지 않지만 인간은 ‘돌봄’이라는 생존본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 행복은 타인의 불행이 전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돼도 행복하지만 타인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행복해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다 함께 행복해지려면 약자를 배려하고 보살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문제들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나만의 생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는 재미가 있었고 책을 읽으며 나도 어디선가 심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다녔을까? 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의 비해서 같은 내용이더라도 더욱 쉽게 풀어놓아서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오늘 폭력이란 주제를 읽고 글을 썼지만 이 책에서 알려주는 민주주의, 철학, 세계, 평화 또한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인 것 같다.

길지민: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사건은 1835년 11월,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라는 화물선이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표류하게 되는 이야기로,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해 결국 어린 선원이 희생해 나머지 선원들이 배를 채우는 방법으로 살아남고, 나머지 선원들은 지나가던 배에 의해 구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제비뽑기는 조작된 것이었고 어린 선원만 희생하게 되지요.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1914년,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던 인듀어런스 호는 극지방에 표류되자 634일간 극한과 배고픔을 견디고 27명의 선원 전원이 생존하여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인듀어런스 호 사건은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사건보다 표류된 기간이 더 길었지만 전원 생존했습니다. 앞 사례에서 선원들이 조금만 더 의논해보고 생각을 해보았다면 전원이 귀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이 문제는 좀 더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고, 무작정 소수가 희생하는 방식으로 제비뽑기를 조작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소수의 희생을 결정한 다수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소수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다수와 소수를 가르지 말고 모두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보고 만약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면 소수가 떠안아야 할 부담을 다수가 조금씩 나누어서라도 서로 화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소수만 모든 부담감과 책임감을 다 지고 희생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희생을 할 수는 있지만, 앞서 나왔던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사건처럼 다수가 이익을 챙기려고 소수에게 의도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조금 더 잘 할 수만 있다면 소수의 희생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김표정: 현재 일어난 상황으론 소수의 희생은 남을 위한 뜻 깊은 희생이 아닌 말 그대로 희생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희생한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정당한 제비뽑기였다면 소수의 희생이 정당한 희생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두 소수의 희생에 대해 동의를 하였고, 비동의 한 사람이 없었기에 화물선이 표류가 되었던 13일 동안 버티다 최악의 상황까지 왔기 때문에 정당한 방법으로 인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 나온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희생자 3명을 이용한 나머지 사람들의 진심어린 반성의 마음이 가장 먼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 말고도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인 ‘다수결’도 소수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는 말로 소수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주며 다수의 의견도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두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방법으론 '다수의 의견, 소수의 의견 모두 의심을 해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 입니다. 다수라고 다수의 의견이 무조건 알맞은 것도 아니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소수의 이야기만 듣는 것도 알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의 의견을 한 번 더 의심하고 생각해 더욱 현명한 의견을 새롭게 만들거나 의견을 조금씩 합쳐보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하고, 소수만 희생하는 것 보단 모두가 조금씩의 불편함이 있게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만약 다수의 의견만을 따랐을 때, 소수의 희생은 모두가 나누어 가지는 불편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의 큰 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윤정: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마냥 정당하지만은 않습니다. 소수에게도 권리가 있고, 소수의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사람들인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수가 조금 불편하고 힘들지만 소수가 모든 걸 부담하지 않고 다수와 소수가 함께 나누는 것이, 다수가 편하고 쉽게 가지만 그 편함이 소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보다는 낫기에, 희생 없이 가는 방법을 찾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프랜시스 스페이트 호 사건처럼 조작되어 이익을 위한 의도적 희생은 더더욱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임다송: 의견이 충돌하였을 때 단지 한 쪽의 의견이 더 많다고 소수의 의견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적 권리는 자주 국가에 의해 제한되거나 말 뿐인 상징적인 의미로 축소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살기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켰는데 그것도 부족해 희생이 정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만 대신 남을 희생하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여 뽑기를 조작하였고, 조작된 뽑기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은 부당한 희생을 하였습니다. 배가 표류된 상황에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고 하였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조금 더 힘을 합쳤다면 13일 정도는 선원들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에 갈등이 생기게 돼서 소수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매번 한 쪽의 의견이 더 많다고 소수들의 입장을 매번 무시해버린다면 그게 모이고 모여 소수들이 많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이런 경우 다수의 입장을 들어주는 대신 소수도 피해를 받지 않게 혜택을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서로 조금씩 배려하여 의견을 조정한다면 모두가 만족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 피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작은 행동들부터 내가 이렇게 행동했을 때 피해를 받는 사람은 없을 지 생각해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었으며, 헌법 제10조처럼 말뿐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가인: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전 영화 ‘메이즈 러너’가 떠올랐습니다. 세균에 감염된 지구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백신을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소수의 아이들을 희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인권은 보장 되지 않으며, 단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의견은 묵살되고 동의 없이 실험을 진행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희생이 다수를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면, 그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적은 수이지만 그들도 엄연한 인권을 가지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수가 만들어낸 편견과 정당성으로 인해 소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소수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것과 같습니다. 꼭 희생이 있어야만 할까요? 소수가 다수를 위해 떠안아야할 부담을 다수가 조금씩 나누어서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정당성의 근거라 믿고 있는 ‘다수의 이익’을 한번쯤 의심 해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윤지: 저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이 있는 이유도 좀 더 많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 그 상황에 더 적합한 판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소수의 의견이 묻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욱 적합한 선택이였을 가능성이 높기에 세상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써 많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이 사회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논리로, 다수결의 원칙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던 당시, LST 문산호에 탑승 중이던 소수의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뿐더러 우리의 영토까지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뤄낸 민주주의도 권력을 가진 소수가 독점하던 것을 힘이 없던 다수가 투쟁을 하여 이뤄낸 성취물입니다. 그리고, 다수의 선택을 더욱 존중하는 방식인 다수결의 법칙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위와 같은 이유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사회자: 지금부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라는 책의 내용을 주제로 1학년 학생들이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토론 주제는 이 책의 1나는 왜 너를 괴롭히는가?’ 에 나왔던 토픽인 사랑의 매는 정당한가?’입니다. 이 주제에 찬성하는 찬성측은 영선중 신지이 학생이고, 반대 측은 영선중 송금주 학생입니다. 찬성 측부터 주장을 발표하도록 할까요?

신지이: , 안녕하세요. 저는 찬성 측 토론자 신지이입니다. 우리나라의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체벌은 이제 폭력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토론을 준비할 때 주제가 사랑의 매인 만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사랑의 매는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미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매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여러분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릴 때 저는 문방구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용돈을 지속적으로 주셨지만 많은 문방구의 물건들이 저를 유혹했고 친구들에게도 먹을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금통에 들어 있는 동전들을 몰래 가져가다 어머니께서 알게되셨고 저를 혼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쳐지지 않았고 결국엔 만 원까지 손대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굉장히 화가 나셔서 저를 앉혀놓고 타이르시다가 결국 발바닥을 때리셨습니다. 엄마가 말로 하실 때는 사실 저러다 마시겠지하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는데 맞고 나니 너무 아팠고 다시는 맞을 짓을 안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돈을 몰래 가져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매일매일 성장하는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선 사랑이 존재하는 사랑의 매가 필요합니다. 부모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분노와 증오의 매는 폭행일 뿐입니다. 맞는 아이보다 때리는 부모가 더 고통을 느끼는 매가 진정한 매 입니다.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그날 어머니가 마음이 아파하는 걸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널 사랑해서 때린 것이다. 내가 만약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돈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뒀을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매는 단지 무분별한 폭력이 아니라 자식의 훈육을 위해 사용되고 매를 통해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도와줍니다.

송금주: 잠깐만요. 반론하겠습니다. 방금 주장의 뒷받침으로 성경의 한 구절인 매를 아끼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는 잠언 1324절을 인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토론문에서 성경이라는 종교적 근거는 주제에 대해 정확한 판별성이 띄지 않는 근거이며,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 매우 주관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구절의 뜻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짐을 매를 통해서라도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이로써 성경 구절을 인용하신 것은 토론 주제에 벗어나는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지이: 불교의 경전이나 공자의 논어처럼 성경은 수천 년간 내려온 인류의 지혜가 담긴 책입니다. 교과서 중 하나인 도덕책에는 공자의 논어가 인용되었는데, 그럼 도덕책은 유교에 대한 종교책인가요? 전 기독교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인용했던 그 구절은 수 천년간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지침이 되는 구절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저는 아이의 잘못을 방임하는 것보단 아이의 잘못을 바로잡는게 더 낫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저의 토론문에서 인용을 한 것 뿐입니다. 4대성인에서 공자는 인용해도 되고 예수에 대한 것은 인용하면 안된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편협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로 이어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체벌이라는 이름하에 무작정 폭력이 실행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체벌 전에 숙지해야할 조건을 생각하였습니다. 우선 부모들이 체벌의 장단점과 그에 대한 영향을 사전에 미리 알아야하고, 체벌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들과 체벌 후에 자녀와의 교감 방법을 사전에 숙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체벌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잡혀있어야 합니다. ‘종아리를 5회 이상 때리지 않는다.’ 와 같은 가이드라인이 미리 정해져 있어야 체벌 이후에도 부모 자식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체벌이란 이름하에 폭력이 실행될 일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체벌은 항상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대화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다 안될 때에 그 때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합니다. 여기까지 찬성측의 주장이었습니다.

사회자: 네 찬성 측 주장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어서 반대 측 주장을 들어볼까요?

송금주: 안녕하십니까? 반대 측 토론자 송금주입니다. 이번 주제가 예방대책을 세우고자 하는 목적으로 토론되는 것이 아닌,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서로 고민해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번 주제에 대해 반대하는 2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랑의 매는 훈육과 징벌을 혼동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훈육이란, 바르지 못한 행동을 교정하여 인간적 성숙을 돕고자 하는 것이고, 징벌은 아이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며 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훈육과 징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가 받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훈육은 아이의 마음에 평온을 주고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후 아이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에 주도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징벌은 두려움과 공포감, 죄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아이가 징벌 후에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과 전문의 연세누리 소아정신과 병원장 이호분 의사의 책 차라리 자녀를 사랑하지마라에는 회초리를 드시는 부모님에게 폭력적인 훈육으로 아이가 변화되었나요?” 라고 여쭐 때 부모님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요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부모님들도 폭력적 훈육이 아이들에게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사랑의 매, 즉 징벌을 훈육으로 혼동하고 계시며, 자신들의 훈육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느낄 때 체벌의 강도가 세지고 자신의 감정까지 더해지기에 의사는 징벌을 가하지 않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저의 주장인 훈육과 징벌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사랑의 매는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심지어는 사랑의 매라는 자기 모순적거짓말로 아이에게 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징벌은 약자에 대한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징벌은 아이의 자존감만 떨어뜨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매는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행동이 고쳐질 경우에도 그저 단기적 변화일 뿐입니다. 아이는 혼나는 것이 두렵고, 매가 무서울 뿐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부모님께서 처음으로 회초리를 드셨던 날이 있었습니다. 어린 저는 그 매를 피하려 부모님 몰래 매를 숨겼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 되어 제가 한 행동을 되살펴보자면, 전 그 매가 무서웠고, 혹시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자존감의 형성은 사랑 받고 있음을 의식하며 높아집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매는 이름과는 다르게 아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정확한 이유도 알 수없이 감정에 따라 점점 세지고 약해짐을 반복하는 체벌의 강도, 잘못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닌 억압만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가 과연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점점 내향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훈육방법인 사랑의 매의 결과는 자존감 하락일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피동적인 성향이 강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아이의 자존감마저 떨어뜨릴 수 있는 사랑의 매, 정당한 것일까요? 여기까지 반대 측의 주장이었습니다.

신지이: 반대 측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하겠습니다. 반대 측은 사랑의 매는 훈육과 징벌을 혼동하기 십상이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체벌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지나칠 정도로 염려한 나머지 체벌의 교육적 효과를 등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체벌로 교육적 역효과에 못지않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송금주: 찬성 측에서는, 체벌을 통한 교육적 효과를 등한시 한다고 하셨는데, 체벌로 인한 교육적 효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찬성 측 토론자는 반론에서도 교육적 효과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적 효과에 대해 명확히 정의하여 주시지 않았더군요, 체벌로 인한 교육적 효과는 무서움과 압박감에 의한 산물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매를 맞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행동을 고쳐나가는 아이가 과연 많을까요? 저는 주장 글에서 첫째 근거의 예를 인용해서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지이: 한 가지 더 반론 하겠습니다. 학교전체와 가정 대부분에서 체벌과 학대가 금지되었음에도 왜 많은 학생들이 이전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이고 자존감 상실을 경험하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외형적인 체벌은 줄었지만, 정작 더 중요한 아이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도 줄었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은 체벌이 금지된 지금, 진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학생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부모는 공부에만 관심을 보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합니다. 자녀훈육은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하며 인격적으로 아이와 소통해야합니다. 또한 아이가 자기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에도 훈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방임이 아닐까요?

송금주: 체벌이 금지됨으로서 학생들이 더 우울하고 극단적인 선택의 빈도수가 높아졌다고 하셨는데요. 이에 대해서도 아무런 예시가 없어 이 반박 내용을 이해하지도, 타당성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벌이 없어짐과 동시에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내용에는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체벌이 아이들이 의지할 곳인가요? 체벌이 아닌 부모님 선생님과의 상담’, ‘친구들 간의 공감대 형성처럼 아이들은 체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의지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체벌만이 아이가 의지해야할 곳이라는 점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가 자기 생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기회의 상실이라는 의견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아이의 마음은 열리고 진솔한 대화로 이어집니다. 아이에 대한 방임이라는 의견은 아이와 부모는 체벌이 외에도 많은 교류의 방법이 있습니다. 대화, 편지 등 체벌이 아닌 다른 여러 방법을 통해서라도 아이와의 소통의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찬성 측의 신지이, 반대 측의 송금주 학생이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유네스코 1호 잡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의 내용이었습니다. ^^

기획/편집: 박다연,장유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