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이 서양에서 발생한 이유 - gwahaghyeogmyeong-i seoyang-eseo balsaenghan iyu

17세기까지 중국 문물이 유럽 앞서
영국 산업혁명이 ‘대분기’ 역전 계기
“자연을 지배할 의지와 능력” 주목
‘유럽중심주의’ 비판 회피할 논리 갖춰

과학혁명이 서양에서 발생한 이유 - gwahaghyeogmyeong-i seoyang-eseo balsaenghan iyu

성장의 문화-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
조엘 모키르 지음, 김민주·이엽 옮김/에코리브르·3만6500원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중세를 근대로 전환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꼽았다. 여기에 종이를 더하여 인류 문명의 4대 발명품이라고 꼽는 이들이 많다. 네 가지 모두 중국에서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서양과 마주한 중국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1842년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에서 상하이를 점령당하고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은 서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였던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중국의 과학기술사를 연구해, 고대와 중세 중국에서 일어난 발명과 발견이 유럽을 능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중국의 과학 기술은 오래 전에 이미 높은 수준에 올랐는데, 왜 유럽에 뒤처지고 말았는가?’ 이른바 ‘니덤의 질문’이다.

중국 경제학자 린이푸는 1995년 ‘왜 산업혁명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논문에서, 중국이 ‘경험에 기초한 기술 발명’으로부터 ‘과학과 결부된 실험에 기초한 기술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험에 기초한 기술 발명에서는 인구 규모가 발명의 속도를 좌우하는 까닭에 과거에는 중국이 앞설 수 있었지만, 유럽에서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중국이 뒤처지게 됐다는 것이다. 린의 주장은 그렇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미국의 중국사학자 케네스 포메란츠가 2000년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이라는 부제가 달린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니덤의 질문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대분기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생활 수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포메란츠는 대분기의 시점을 1750년대 중반쯤으로 본다. 그는 대분기의 이유로 ‘석탄’과 ‘신대륙 자원’ 확보라는 행운을 꼽는다. 영국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탄(노천탄광) 덕분에 증기기관의 발명 및 이용, 공업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신대륙의 원면, 설탕, 담배, 목재, 은을 확보함으로써 인구 증가에 따른 자원 압박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경제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포메란츠는 서구 학계의 유럽 중심론에 대해 강력한 이의제기를 해온 ‘캘리포니아 학파’의 대표주자다.

제임스 에크포드 로더가 그린 <제임스 와트와 증기기관: 19세기의 여명>(1855년)은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기술인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 와트가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 소장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조엘 모키르가 2016년에 쓴 <성장의 문화-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은 니덤의 질문에 대해 새롭게 야심찬 답변을 시도한 것이다. 이미 다른 책에서 유럽의 ‘계몽주의’를 19세기 경제성장의 가장 큰 추동력이라고 주장했던 모키르는 이 책에서 ‘위대한 풍요’의 원인으로 ‘문화의 차이’를 내건다. 그가 말하는 문화는 “유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전달되며,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 가치, 선호의 집합체”다. 그는 “우리가 ‘위대한 풍요’라고 부르는 근대적 경제성장은 내가 생각하는 ‘문화’의 구성 요소인 신념, 가치, 그리고 선호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서 초래되었다”고 강조한다. 모키르는 “1830년 이후에 과학은 산업혁명의 지배적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서양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폭발적 기술 진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 탐구를 권장하는 문화적 신념’이다. 그는 포메란츠가 대분기가 일어났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한참 시간을 앞당겨 ‘근대 성장의 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1500~1700년’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신뢰 같은 문화적 요인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모키르의 연구는 “자연에 대한 태도와 인간의 물질적 필요에 맞춰 자연을 지배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그것이 세계사의 흐름까지 바꿨다고 본다. 동서양이 분기하는 데 문화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캘리포니아 학파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이다. “경제발전의 역사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용한 지식의 힘과 그 사회적 명성, 유용한 지식은 고결하다는 믿음이 등장해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을 하나의 사회로 생각해선 안된다. 한 영역에서는 경쟁하고 다른 영역에서는 협력하는 이질적인 사회로 구성된 집합체이고, 근대 초기 유럽에서 계몽주의에 대한 기득권 반동세력의 저항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모키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중국이 뒤처진 것이 아니라 유럽이 앞서나갔다’는 점이다. 중국이 못한 게 아니라, 유럽에서만 계몽주의로 이어진 지적 변화라는 일련의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유럽의 선진 과학은 예수회를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지만, (중국은) 달력을 수정하고 일식을 예측하는 것 말고 그들의 영향은 매우 선택적이고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완곡하게 “중국에는 잡다하고 자잘한 과학은 있었으나 진정한 과학은 없었다”는 중국학자 나탄 시빈의 말로 니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 자신의 주장이 유럽중심주의, 서양우월론이라는 혐의를 피하려는 것인데, 모키르의 주장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 들어올 때조차 강하게 거부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 중국(또는 조선)의 사상적, 제도적, 문화적 흠을 따져묻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할 것같다.

근대적 경제 성장은 장수와 풍요, 여가를 즐기게 해준다는 점에서 축복이지만, 혼란과 환경 오염, 가공할 파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저주이기도 하다. ‘축복과 저주가 함께 축적되고 있다’는 관점을 갖고 모키르를 읽기를 권한다.

정남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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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역작 《사피엔스》에서 인류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세 개의 혁명을 제시했다. 첫째는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둘째는 약 1만2000년 전의 농업혁명, 그리고 셋째는 약 500년 전의 과학혁명이다.


시간 척도를 조금 줄여 서양의 근대를 출현시킨 요인으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꼽는 이들도 있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든 과학혁명이 인류의 역사에서 지대한 변곡점을 만들었음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학혁명이란 서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태동하여 형성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시기로는 대체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한 1543년부터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한 1687년까지에 해당한다. 무슨 놈의 혁명이 무려 144년에 걸쳐 일어나느냐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혁명’하면 우리가 쉽게 머릿속에 떠올리는 정치적인 격변이나 급격한 사회변화의 이미지에 빗대 보면 144년은 분명 긴 시간임은 맞다. 그러나 하라리가 제시했던 7만 년이라는 타임 스케일을 생각해 보면 144년은 대단히 짧은 시기이다. 비슷한 용례인 산업혁명의 경우를 보더라도 1차 산업혁명의 시기는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대략 50~60년 정도를 잡는다. 따라서 산업혁명이나 과학혁명은 정치혁명에 비해 그 시기가 좀 길더라도 ‘혁명’이라는 말을 허용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싶다. 


이런 인류사적 빅 이벤트가 있으면 사람들은 보통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따지기 좋아한다. 사회적 배경이니, 내외적 요인이니 하면서 말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시험문제로 출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먼저, 과학혁명이 일어난 첫째 사회적 배경으로는 종교개혁이 꼽힌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있었다. 종교개혁 자체가 유럽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어쨌든 그 결과로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등 기독교의 사회적인 위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중세 천 년을 지배해 온 종교인만큼 기독교의 위상이 변한다는 건 사실 예삿일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16세기에 접어들면 르네상스도 막바지로 치달을 때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년 뒤인 1527년에는 신성로마제국군이 로마에 침략해 이른바 ‘로마약탈’을 일삼기도 했었다.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스위스 근위대가 마지막 1명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구회전에 관하여》가 나온 것이 이로부터 16년 뒤이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을 소개할 때에도 말했듯이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교황에게 다소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기도 했었고 갈릴레오는 그 직격탄을 맞았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의 망원경 관측 결과들을 토대로 성경의 말씀이 실제 자연현상과 완전히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으니, 성경 구절에 완전히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가 지식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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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인쇄소 풍경을 그린 19세기 그림. 구텐베르크는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전 유럽에 인쇄술을 퍼뜨렸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과학혁명을 잉태한 둘째 배경으로는 인쇄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450년 무렵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고려시대에 직지심체요절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이 1377년으로 구텐베르크보다 70년 이상 앞선다.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가 세상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려의 활자가 대량인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량인쇄에 적합하지 않은 데에는 종이, 활자의 내구성, 문자 자체의 한계 등이 작용했다. 가령 알파벳은 문장부호를 다 포함하더라도 활자의 종류가 수십 개에 불과하다. 이에 비하면 한자는 확실히 불리하다. (반면 한글은 월등히 유리하다.) 정조 때의 활자인 정유자의 경우 무려 15만 개의 활자가 한 세트를 구성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든 계기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대량으로 찍어서 배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난 뒤에는 성경이라고 하는 훨씬 더 큰 사업아이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남발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을 대량으로 찍어내 살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의 면죄부는 최소 두 번 금속활자와 인연을 맺었다. 한 번은 면죄부를 대량으로 팔아먹기 위해서, 다른 한 번은 그 면죄부 장사가 잘못되었음을 반박하기 위해서. 종교개혁 이후 10년 동안 루터의 저술은 600만 부가 팔렸다지만.


비슷한 시기였던 조선에서는 책을 많이 찍어야 수백 권 정도였다. 출판물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으면 그만큼 지식의 전파가 빠르고 폭넓게 진행된다. 이를 통해 넓은 지역의 동시대 사람들이 하나의 컨센서스를 만들 수도 있고 본격적인 언론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 인식의 급격한 발전에 인쇄술이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학혁명의 기준이 되는 1543년이나 1687년이 각각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의 저작이 출판된 해라는 점 자체가 인쇄술의 발달이 과학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한다. 갈릴레오가 쓴 ≪두 체계의 대화≫는 초판으로 무려 천 부나 찍었다. 요즘도 과학책을 내면 보통 초판으로 2천 부 정도를 찍는데, 한국의 독서시장에서는 초판을 다 소화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과학혁명의 셋째 배경으로 기술 장인을 우대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엔지니어 우대 정도 될까? 기술자가 천대받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중세 암흑기 동안 천대받던 기술 장인들을 재평가하게 되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된다. 기술 장인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들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인 그는 말 그대로 빈치 마을의 어느 공방 출신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수많은 공방출신 천재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한 작품으로 수놓으면서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자신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인식도 바뀐다. 그 결과 도구의 개발과 개량, 이를 이용한 관측과 실험이 과학혁명의 토대를 쌓게 된다. 케플러의 법칙이 도출된 것은 앞선 세대였던 브라헤의 훌륭한 천문관측 기구를 활용한 방대하고도 꼼꼼한 관측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손재주가 좋아 직접 고배율 망원경을 만들었고 각종 실험기구를 직접 제작해 정량적이고 수학적인 자연의 법칙을 추구하자고 했다. 도구의 개발과 실험은 근대적인 화학이 탄생하는 데에도 (물론 연금술을 거치기는 했으나)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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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분야의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모습이다. 동아사이언스DB

기술 장인의 연원은 저 멀리 헬레니즘 시절의 아르키메데스까지 올라간다. 부력의 원리와 ‘유레카’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는 최초의 수리물리학자이면서 기계공학자로 꼽힌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수리적 지식을 활용해 기중기와 펌프, 군함 등 실생활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설계하고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기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발견을 통해 다시 조명된 인물 중에는 아르키메데스도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사례는 르네상스 시대 기술 장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도 인쇄술은 큰 힘을 발휘했다. 자기들만의 전문지식을 실용서로 펴내기도 하고 이를 교재로 장인들에 대한 전문교육도 가능해졌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된 장인들은 자기들만의 교육체계(기술 또는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어 인재를 길러내기도 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일본의 과학사가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르네상스와 과학혁명기 중간의 16세기에 주목해 따로 ‘16세기 문화혁명’이라는 시기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기술 장인들이 현장에서 축적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들과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상호접근하면서 지식 세계의 새로운 지형을 이루었다고는 것이다. 요컨대 17세기 과학혁명은 16세기 문화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논리이다. 


과학혁명의 넷째 배경을 꼽자면 새로운 사유방식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서로 상반된 접근법을 들고 나온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대표 주자들이다. 갈릴레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신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비판하며 귀납법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참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아무런 편견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 다음, 이로부터 귀납적으로 일반화된 법칙을 이끌어낸다. 이로부터 새로운 결과를 예측하고 다시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근대과학이 성립되는 과정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대와 중세 2천 년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거부하며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베이컨의 가르침에 가장 잘 맞는 사례로는 케플러의 행성법칙이 있다.  다만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은 귀납의 방법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납법이 작동한 사례는 극히 드물 정도이다. 또한 베이컨은 경험주의자답게 수학의 가치도 낮게 평가했다.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다고 말했던 동시대의 갈릴레오가 무척 섭섭했을 것이다. 베이컨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네 가지 나쁜 습관을 네 가지 우상으로 표현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감각과 이성의 불완전함을, 동굴의 우상은 개인적 편견을,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오남용을, 극장의 우상은 특정 체계(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같은)에 대한 맹신을 뜻한다. 


베이컨의 또 다른 저작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에는 국가가 지원하는 학술기관인 ‘살로몬의 집’이 나온다. 상상 속의 섬인 아틀란티스는 베이컨 식의 이상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살로몬의 집은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연구기관으로 훗날 영국의 왕립학회 같은 과학단체의 원형이 되었다. 


베이컨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베이컨과는 정반대로 연역적이다. 그의 대표저작인

《방법서설》에 드러난 사유방식은 방법론적 회의론으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철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려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의심해 나가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한계에 도달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의심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이다. 이때 나라는 존재는 물질적인 육체라기보다 사유하는 정신으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위대한 명제가 성립한다. 


인간의 불확실한 감각경험은 데카르트의 회의를 빠져나갈 수 없다. 감각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 또는 이성의 활동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것은 기하학적 공리 같은 수학적인 지식이다. 즉,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시작해 수학에 토대를 둔 명징한 지식 체계를 쌓아 올리면 확고한 철학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베이컨과 정반대라 한 쪽의 장점이 다른 쪽의 단점이 되는 그런 상보적인 짝과도 같다. 과학 활동이란 참 복잡 미묘해서 베이컨 식의 귀납주의만으로도 데카르트 식의 연역주의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로도 영국은 대체로 경험주의나 귀납주의가 득세를 하고 대륙의 프랑스는 수학 중심의 연역주의가 발전한 것은 흥미롭다. 수학자로서의 데카르트는 좌표계를 도입해 해석기하학을 창시했다. '데카르트 좌표계'는 지금도 가장 흔히 쓰이는 좌표계이다. 그냥 기하학이라고 하면 한 마디로 말해 주로 그림만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꼭 이런 방식이다. 해석기하란 도형의 각 요소에 좌표를 부여해 대수적으로 수학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그의 후손들은 18~9세기 프랑스에서 뉴턴역학을 수학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시 정리하기에 이른다. 현실감각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려면 역시나 수학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스승이었던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그랬듯이, 수학의 언어로 우주를 보려고 했었다. 이후의 세상은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년왕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와중에 아리스토텔레스 체제를 대신할 패러다임으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대안은 바로 플라톤이었다. 아주 후대인 르네상스 시절에 다시 플라톤주의가 부흥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체제에 대한 반발이었고 수학적 질서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주요한 흐름이었다. 


지금 우리가 과학하면 떠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실험과 수학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이 두 심상에 대한 원조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기의 한가운데에 이 둘이 존재했었음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최채기, 금속활자는 제왕의 상징물, 고전산책474(2016.2.1.).
-야마모토 요시타카, ≪16세기 문화혁명≫(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야마모토 요시타카,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김찬현 박철은 옮김), 동아시아. 
-버트란드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