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립외교 반대 - gwanghaegun junglib-oegyo bandae

민주주의 이야기

사드(THAAD)와 광해군-‘광해군의 중립외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사드(THAAD)와 광해군

‘광해군의 중립외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성주 골프장에 배치되기로 결정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관련해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 구도가 가시화됐습니다. 미국은 사드 배치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중국 정부는 여전히 반대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도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며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어, 동북아 정세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라는 중대한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의 외교 전략이 어떻게 수립되고 진행될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외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지요. 바로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재위한 조선 제15대 왕입니다. 세자 시절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우고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펼친 ‘중립 외교’ 정책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며 줄곧 폭군 혹은 혼군(昏君,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는데요, 최근에는 광해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4년 전에는 영화 ‘광해’가 개봉하면서 많은 이들이 광해의 정책에 새롭게 주목했습니다. 광해군의 성공한 업적으로 지목되는 중립외교 이야기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광해 中, 이미지출처-CJ E&M>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이후,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던 명나라의 국력은 점차 쇠퇴했습니다. 반면 여진족이 1616년 세운 후금은 힘을 키워갔습니다. 명나라가 늙은 호랑이였다면 후금은 기운 넘치는 젊은 사자였지요. 기개를 높인 후금은 명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명은 광해가 왕으로 있는 조선에게 군사를 요청합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와 물품 등을 지원해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도움을 준 바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는 ‘명분’ 중시의 사회였고 오랑캐의 나라인 후금은 적대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약해진 조선이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과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리와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무작정 후금만을 따르는 정책을 시행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강홍립 장군에게 1만 명의 병사를 주어 명나라에 파견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정세를 보아 후금에 투항하도록 했는데요, 명나라에게도 은혜를 갚으면서 후금에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광해의 능수능란한 수완 덕분에 조선은 두 나라 사이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뻔한 역사를 피할 수 있게 한 광해를 요즘 말로 ‘밀당의 고수’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명과 후금과의 사이에서 밀당에 성공한 셈이니까요.

그 후에도 광해는 현실 정치에 적합한 정책을 폈지만 당시 국민의 정서와 신하들의 의견에는 반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는 폐위되어 강화도와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 된다는 말이 있는데요, ‘폭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광해군은 이제 명분보다 실리를 따지는 실용주의자로서 21세기가 원하는 리더십의 모습이라고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명분과 실리,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또 어떤 실리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것입니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둘러싼 국가 간 외교가 ‘성공이냐, 실패이냐.’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난 후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텐데요. 눈앞의 관계와 이익만을 바라보기보다는 미래를 조망하며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위 내용은 필진의 개인적 의견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