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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영어: Operation Chromite)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다. 2주 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하게 된다.[1]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영어: Operation Chromite)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인천은 낙동강과 부산 교두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조선인민군이 거의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유엔군은 손쉽게 인천을 점령하여 서울까지 탈환했다. 이로써 조선인민군은 보급로를 차단 당하게 되었다. 전투의 배경[편집]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UN군[편집]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다.[2] 조선인민군의 8월 공세[편집]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전의 전술을 다시 사용하고자 했다. 상하좌우를 포위할 4개의 공격축을 설정하고 전투를 치렀다. 바로
부산 교두보 전투였다. 마산[6],
전투산,[7]
낙동강
일대,[8][9]
대구,[10][11] 칠곡
등에서 격전이 치러졌다.[12] 조선인민군의 9월 공세[편집]8월 말이 되었다.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오래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대다수의 부대가 커다란 병력 손실을 입어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5][16] 조선인민군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보급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식량, 무기,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병력을 대신하여 투입된 병력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3][17]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한다. 이를 가능케 할 만큼의 보급을 받고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다.[4] 결과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였다.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효과적인 방어로 막아낸 것이다.[27] 조선인민군은 두 번에 걸친 공세의 실패로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게 되었고,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도 버겁게 되었다.[28] 상황을 타계할 상륙 작전 계획[편집]상륙 지역 선정[편집]미국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로 정하고 주요 상륙지로는 총 3개 지역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인천(100-B), 군산(100-C), 주문진(100-D)이 그것이다. 일본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보부에서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하여 관련부대에 하달했다.[29] 미 합동참모부의 인천 반대[편집]미 합동참보부가 상륙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인천의 조수, 수로, 해안 조건을 반대 이유로 들었다.
맥아더가 겪은 태평양 전쟁[편집]필리핀 레이터섬(Leyte)을 상륙작전으로 탈환하는 맥아더 1942년 3월 17일 맥아더는 작은 어뢰정을 타고 필리핀을 탈출하여 호주로 갔다. 이후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압도했다. 미군과 필리핀군 14만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2개의 전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에게 배정된 전쟁 물자는 유럽전선에 있던 패튼에게 배정된 물량의 5%에 불과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일명 '개구리 뛰기 전술'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전선을 연결하여 안전하게 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가 뛰듯이 주요 거점만 점령하는 모험적인 전술이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다시 필리핀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총 87차례의 상륙작전을 전개하였기에 누구보다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가 전개한 상륙작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이렇듯 맥아더는 상륙작전에는 도가 터있었고 이를 6.25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를 설득하여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하고자 하였다. 미 합동참모본부의 최종 결정[편집]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됴쿄 미국 극동군사령부까지 와서 1950년 8월 23일 맥아더와 회의를 개최하였다. 맥아더가 상륙 지역을 인천으로 주장하면서 한 브리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국 8월 28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하고,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로 정했다.[32] 사전 작전[편집]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 폭격당하고 있는 월미도. 미 해군 구축함 USS 라이만 스웬슨(USS Lyman K. Swenson)에서 본 모습.
상륙 작전[편집]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USS Mount McKinley)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방어가 약했던 인천을 포격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 미해병대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중위가 인천 레드비치(Red Beach : 현재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일대)에 상륙한 후, 방조제를 기어오르는 모습. 핀이 빠진 수류탄을 부상으로 던지지 못하자 다른 소대원들이 피폭 당하지 않도록 수류탄을 끌어안아 폭사하였다. 사후에 미국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서울 탈환[편집]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졌다.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을 투입,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해 있었고 23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鞍山)을 점령했다. 다음 날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를 통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관련 작품[편집]영화[편집]
참조[편집]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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