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000년대 초반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남재준 대장의 지시로 추가된 재료다. 일단 당시 여론은 친환경 소재라며 꽤나 추켜세웠지만..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비가 좀 쏟아지면 금이 가거나 허무하게 바스라지고 무너져 총체적 난국 수준이다.[4] 혹서기 훈련은 혹한기 훈련과는 다르게 폭염으로 인하여 상당히 위험한 훈련이라 국방부에서 어지간하면 잘 하지 않는다. 혹한기는 정말 잘 해봐야 감기나 동상 정도로 끝나나, 혹서기는 기본이 탈진이며 일사병이나 열사병으로 이어진다. 특히 열사병은 신속히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5] 주둔지 자체가 작전계획지인 경우도 있어서 이 경우에는 당연히 잠도 주둔지에서 잔다.[6] 혹은 능선을 따라[7] 주둔지 복귀하고 난 뒤 내리는 비에 연장이 젖는것을 방지[8] 이 경우에는 사전에 진지가 들어갈 곳을 경시끈으로 표시 해놓는 경우도 있다.[9] 환경 오염 등의 이유로 요즘은 사용을 자제하는 추세다. 심지어 이미 사용된 타이어를 모조리 친환경 재료로 교체하는 끔찍한 경우도 있다.[10] 참고로 공수라는 말은 공중 수송(Air freight)에만 해당되는 용어이고 실은 그냥 인력 또는 차량으로 옮긴다. 진지 공사에 헬리콥터가 동원되는 일은 험지 꼭대기에 있는 레이다 기지나 방공포 기지 같은 곳을 제외하면 없다.[11] 전역하고 등산을 취미로 삼으시는 분들이 많다. 이게 매우 용이한게 대도시 한복판이 아닌 많은 예비군 읍면동대는 작전계획 구역 내에 산이 있다... 이게 의미하는건 예비군 지휘관이 등산을 좋아한다면 평일 근무시간에도 마음대로 산을 타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상부에서도 터치가 사실상 불가한게 작전계획 지역을 순시하는 것이니깐. [12] 인원이 굉장히 많은 대규모 부대라면 현역 장교들&현역 부사관들&예비군 지휘관들 이렇게 더치페이 식으로 계산한다. 그 많은 현역들을 혼자서 다 먹인다는 건 자기가 정말 금수저가 아닌 이상 불가능이니까.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Show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가'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문열 박완서 박경리 김홍신 이외수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가'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외수 공지영 박경리 이문열 신경숙 6위 7위 8위 9위 10위 박완서 김홍신 조정래 최인호 박범신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가'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외수 박경리 공지영 이문열 조정래 6위 7위 8위 9위 10위 박완서 김홍신 김영하 박범신 황석영 11위 12위 13위 신경숙 한강 김유정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예능인 이문열 본명 이열 (李烈) 출생 1948년 5월 18일 (74세) 미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청운동 국적 대한민국 직업 소설가 수훈 은관문화훈장 (2015년 수훈) [ 펼치기 · 접기 ] 학력 안동중앙국민학교[1] (전학) 본관 재령 이씨 배우자 박필순 (1973년 결혼) # 부모님 아버지 이원철, 어머니 조남현 데뷔작 나자레를 아십니까 (1977) 1. 개요2. 생애3. 특징4. 정치적 성향 4.1.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4.2. 2010년대4.3. 2020년대 이후 5. 주요 작품5.1. 장편소설5.2. 단편소설5.3. 평역서5.4. 기타 6. 수상 이력7. 여담1. 개요[편집]대한민국의 소설가. 1948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이후 능란하고 교양적인 문체와 다양한 작품세계를 지닌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1960년대에 김승옥, 1970년대에 황석영이 있었다면 1980년대의 대표 작가는 명실상부 이문열이었다. 이와 함께 우파 논객으로서의 행보 역시 여러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2. 생애[편집]1948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재령 이씨 이원철(李元喆)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남현(曺南鉉)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 이원철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브나로드 운동에 계몽대원으로 참여하는 등 당시에 의식 있는 인텔리였다.[2]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당시 신사상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8.15 광복 직후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그 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책임자를 맡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제5공화국 때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있다. 그러나 1990년 무렵 한때 장기표, 이우재 등의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민중당이 망하고 이재오, 김문수 등과 같은 거물들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이문열이 민중당에 참여했던 것이 그가 딱히 좌파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재오와 같은 재령 이씨, 심지어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3. 특징[편집]이문열은 소설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모색하려 했다.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 속에서 영웅은 일그러진 존재다. 완전무결해 보이지만 실상 컴플렉스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일그러진 존재들이다. 그 몰락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참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문열은 묻고 있다.
4. 정치적 성향[편집]4.1.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편집]이문열이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한 까닭으로 언급한 것은 '몫과 균형의 문제'였다. 80년대 당시 진보진영의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그것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유행처럼 번져 하나의 시각만이 사회 전체에서 너무 큰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반발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의 의견을 내세우는 이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4.2. 2010년대[편집]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前 국무총리, 정호용 前 국방장관, 박재완 前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現 대구 수성구 갑 국회의원, 강재섭 前 한나라당 대표, 심대평 前 충남지사, 윤상현 現 인천 동구·미추홀구 을 국회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가수 이미자, 국내 최고령 유튜버인 김동길 등이다.
4.3. 2020년대 이후[편집]과거에 이문열을 매섭게 비판했던 강준만, 진중권, 홍세화 등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의 위선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자 상당히 흡족해 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
5. 주요 작품[편집]자세한 내용은 이문열/작품 목록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1. 장편소설[편집]
5.2. 단편소설[편집]
5.3. 평역서[편집]
5.4. 기타[편집]
6. 수상 이력[편집]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 전상국 → 이문열, 오정희 → 김원일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 최일남 → 이문열 → 임철우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한수산 → 이문열 → 박완서 7. 여담[편집]
[1] 현 안동초등학교[2] 1932년 7월 19일 동아일보 기사[3]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4] 1978년 3월 1일 안동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1996년 3월 안동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어도 당시에 남아있었던 연좌제 때문에 교사가 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6] 대중적인 성공을 한 것도 아니었고 평자들의 반응도 심드렁한 편이지만 작가인 이문열은 만족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기도 하는 소설이다.[7] 이 책이 출간된 2001년 이후에는 중단편을 아직 1편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8] 시기상으로 <변경>의 다음 부분에 해당하며, 여러 차례 이 시기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9] 그러나 가족이 월북을 했다고 모두 우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월북을 했어도 여전히 진보계에 몸을 담고 진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10] '나자레를 아십니까', '새하곡', '들소'[11] 김영, '황석영 이문열 소설의 이념 분석과 수치적 해석' - 황석영 이문열 소설의 이데올로기 비교 연구 -, 동북아 문화연구 제26집(2011)[12] 이 일은 이문구의 <산 너머 남촌>에 실린 송기숙의 발문, 시골 밭둑의 싱싱한 수풀에도 실려 있어 교차검증 된다.[13] 참고로 이문열은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 "'가장'이란 말을 덧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여럿 있다. 하지만 거명하기는 조심스럽다. 살아있는 사람을 거론하면 줄 세우는 꼴이 될 수도 있고, 원로가 빠지면 섭섭해 할 수도 있고.(웃음).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황석영 선배가 다양성이나 기교의 화려함이나 독특한 안목, 모든 면에서 우뚝하다. 진지하게 파고 드는 걸로는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 선생은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살피고 이모저모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웃음) 최인훈 선생도 거대담론적 사고로 가공해 내는 것을 보면 언제나 감탄스럽다. 이병주 선생의 글도 그 풍려(豐麗)와 우미(優美)를 좋아한다. 특히 '지리산'은 압권이다. 자발없는 표절 시비로 상처를 입긴 했지만, 한길사에서 나온 걸 최근에 다시 봤는데 정말 잘 쓴 글이었다. 그 밖에도 우리 문단은 풍성한 자산이 있다."[14] 마광수는 이에 앞서 이문열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근본적 원인이 독자들의 교양주의 선호 현상에 있다고 이문열을 비판한 바 있다. 이문열은 물론 대한민국 작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고 할 만한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성공비결이 대학의 논술전형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는 평가였으며 이로 인해 마광수와 이문열은 서로에게 아주 적대적이었다.[15] 이 밖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 그레샴의 법칙을 잘못 인용하여 악화(惡化)가 양화(良化)를 쫓아낸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16]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부분을 인용했다. 이문열은 이 부분에서 근거는 없지만 홍위병이 연상되니 앞으로의 행보를 조심해 보아야 한다는, 신중론을 가장한 일종의 음모론을 제시하고 있다.[17] "이문열 씨는 지금은 존경받는 소설가이지만 앞으로는 모 정당의 대변인이 되거나 그 당의 공천을 받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나도는 야합설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재까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이문열 씨가 정치권 일각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의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행각을 보면 자꾸 나치 친위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진중권이 인용한 이문열의 표현을 단어만 바꾸어 역공한 것이다. 만약 이문열이 최초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논리 구조가 동일한 진중권의 공격에도 긍정해야 한다.[18] 이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도 산다'는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실제로 동명의 동명의 책이 존재했기에 나온 말이다. 2022년 기준으로는 유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유교를 지나치게 폄훼하고 있는 책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무척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극심하던 국수주의를 비판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부터 유교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꾸준히 재생산되는 데에는 이 책의 영향이 상당하였다.[19] 여기에는 이문열의 반대측에 선 시민들이 이문열의 작품들을 분서하는 것으로 과격하게 대응한 탓에 이문열 자신은 동정표를 받아간 것도 있다.[20] 그러나 2006년 12월 11일자 경향신문의 기사에서는 이문열이 자신의 소설책 반환운동을 벌인 모 사진작가한테 "당신이나 당신 부모, 혹은 책 반환운동을 하는 자들이 전라도일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21] 아울러 저 첫번째에 링크한 기사는 이문열 본인의 해명일 뿐이며, 2006년 7월 2일자 대학원신문에도 이문열의 전라도 발언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22] 다만 이런 '이문열 화형' 퍼포먼스가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반발을 산 나머지, 2022년 현재를 기준으로 이문열이 이 당시 드러낸 견해들에는 옹호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논쟁들을 촉발시킨 것은 이문열의 음모론적 언사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23] 사실 좌파=민주화 운동권=빨갱이 식의 등치를 숭상하고 극단적인 혐오와 멸시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문열은 충분히 극우라고 볼 수 있다. 당장 후술되는 인터뷰도 이명박이 민주화 운동 출신이라고 자랑하는게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니 논박의 여지도 없다.[24] 다만 저 기사는 5.18을 부정적으로 보고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내용이라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문열은 전두환을 세조에 비유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심지어 전두환의 팔순 잔치에도 참가할 만큼 전두환에 너그럽다.#[25] 문화계 블랙리스트보다 더 강력한 대안이 필요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26] 전광훈은 축사하러 온 것이다. 축사 때도 대한민국 망한다 같은 소리를 해대서 좋은 소리를 못듣고 있는 편이다.[27] 2004년 드라마 영웅시대와는 관련 없다. 같은 mbc에서 1980년대에 김종학 연출로 드라마화된 적이 있다. 이문열 아버지를 다룬 소설.[28] 중년교수와 미혼 여기자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의외로 평가가 좋은 작품.[29] 이상주의적인 인텔리 주인공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 위선이 있고 한쪽이 다 옳은 건 아니라는 자각에 이른다는 작품. 이때부터 이문열이 현실에 실망하고 보수로 완전히 전향하는 모습을 보인다.[30] 고종이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고 1919년에 자결하고, 일본이 냉전 시기 동서로 분열되는 등 일제강점기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내용을 뒤집어서 표현하고 있다. 서일본은 북한과, 동일본은 대한민국과 거의 99% 같은 역사를 밟는다. 하지만 그다지 잘 팔리지 못했으며 헌책방에서나 가끔 보인다. 인터넷에서 평가도 거의 없는 수준. 대체역사소설이란 말이 있으나 역사의 중요 장면을 비틀어 봤을 뿐이지 대체역사소설이라고 보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풍자소설이다.[31]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사기》를 읽고 구상한 작품. 평역인 《삼국지》와 다르게 이문열의 오리지널 작품이니, <삼국지>에서처럼 내러티브를 해설로 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후 출간되었다. 보통 초한지가 항우의 자결이나 한신의 최후에서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열 초한지는 여후가 죽고 주발과 진평이 여씨 일족을 토벌하고 한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것까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