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남자 기준 - neunglyeog-issneun namja gijun

긴급설문으로 알아본 ‘달라진 결혼의 조건’… 남자는 ‘능력있는 여자’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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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김성희

내게 어떤 남자 좋아하냐고 물어봐. 그럼 난 눈치 안 보고 이렇게 말할 거니까. “저 실은 남자 인물 보거든요.”

오해하지는 마. 인물이라는 게 이목구비가 또렷한 조각 같은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야. ‘스타일’이지.

스타일이 뭐냐고? 단지 머리모양이나 옷차림의 문제만은 아니야. 스타일은 지성이나 인간성, 개성, 문화적 기호와 예술적 취향까지 다 담고 있거든. 헤어스타일, 옷차림, 액세서리를 포함해 먹고 마시는 것, 취미, 화법, 대화의 내용, 표정, 제스처….

내가 왜 남자의 스타일을 밝히냐구 스타일 있는 남자들은 달라. 문화적 감성지수가 높고 관습적인 기준에 얽매이지 않지. 여자에겐 젠틀하고 자기를 표현할 줄 알아. 한마디로 삶을 즐길 줄 알거든. 그리고 난 차라리 남자의 스타일을 따지는 게 학벌이나 경제력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덜 속물적으로 느껴져. 세계관이니 가치관이니 이런 거 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솔직하지. 물론 그렇다고 내가 속물이 아니라는 건 아니야.

패션지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나 역시 스타일이나 외모가 점점 중요해졌어. 업무상 예술가들이나 엔터테이너들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작품 세계가 아무리 진지해도 옷차림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이 안 느껴지면 일단 매력이 확 떨어져. 저렇게 미의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다루는 예술가로서 프로라고 할 수 있을까 미심쩍어지거든. 직업상 스타일을 중시하다 보니 어느새 이성을 볼 때도 마찬가지가 되더라.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경제력이나 학벌, 직업이 ‘밥그릇’ 문제라면 스타일은 ‘문화적’ 영역이거든. 여자가 남자의 경제력이나 학벌, 직업으로 배우자를 고른다면 그건 남자 잘 만나 팔자 고쳐보겠다는 식의 한탕주의와 다른 게 없잖아?


이제 먹고살 만하니 배부른 소리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스타일이라는 건 단지 돈이 많다고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야. 유행이나 명품과도 다르지. 내 주변엔 자타공인 패션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 남자가 있어. 하지만 그가 실제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건 결코 아니야. 연예인처럼 쫙 빼입는다고 스타일이 사는 게 아니지. 자기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취향을 외모에 자기답게 반영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스타일리스트!

한 유명패션지 편집장이 이렇게 말했다지. “천박한 스타일이라고 해도 스타일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도 역시 내 편이더라. “스타일이나 모드는 결코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나도 가끔 헷갈려. 날이면 날마다 스타일 운운하면서도 정작 남자를 고를 때는 의사나 변호사, 혹은 서울대나 스탠포드대 출신을 은근히 따지는 사람들이 있어. 재미있는 건 표현법만 살짝 달라졌다는 거야. “어 그 남자 정말 쿨해요. 스탠포드 출신인데 런던에서 오래 살았고 집안도 좋아.” 이런 말 들으면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쿨’하다는 근거가 뭘까 스타일이란 결국 학벌과 재산, 직업 등 모든 속물적인 가치 기준을 다 뭉뚱그려 담고 있는 또 하나의 계급이 아닐까?

-패션지 〈바자〉 김경숙(32) 기자.

남자는 능력, 여자는 미모라는 ‘결혼의 불문율’에 ‘이상기류’가 발생했다. “인물이야 예식장 들어가는 3분용이고 어차피 불끄면 다 마찬가지”라는 어른들의 말씀도 무색해졌다. 아름다운 외모가 남녀 ‘모두’에게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남녀 ‘모두’라는 게 중요하다. 어차피 미모는 여자들의 필수 혼수품 아니었던가. 이제는 여자들도 남자들에게서 세련된 외모를 기대한다.

“꾀죄죄한 남자는 창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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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결혼정보회사의 이벤트 미팅 장면. 자연스럽게 낯선 이성과 어울리는 이런 자리에서는 ‘스타일’ 좋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인기를 모은다.

디자이너 정아무개(26·여)씨는 아예 “남자의 스타일과 매너는 결혼조건으로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한다. “함께 다닐 때 남들한테 꾀죄죄한 용모로 보인다면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력, 직업이야 나도 벌 건데 뭐 그리 목숨 걸 것 있나. 비싸지 않은 옷이라도 개성 있게 차려입는 스타일, 여자들 가방 들어주고 승용차 탈 때 벌떡 일어서서 문 열어주는 게 아니라 내 친구들과 만났을 때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매너가 중요하다”고 꼭 집어 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가? 5월26~28일 <인터넷 한겨레>의 20~30대 남녀 독자들에게 ‘결혼의 조건’에 대한 긴급설문지를 보냈다. 160명이 응답했는데 남자 응답자 90명중 66명(73%)이 배우자의 외모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자 응답자도 70명중 절반이 넘는 36명(51%)이 외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전히 여자보다 남자들이 배우자의 외모를 더 많이 따지긴 하지만 과거의 고정관념에 비해서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격차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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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남자의 외모는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남자들 자신이 외모에 대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자 응답자의 67%(60명), 여자의 57%(40명)이 ‘남자의 외모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맘에 드는 이성이 외모를 중시한다면’이라는 물음에도 남자는 내 외모를 바꾼다(34.8%) 상관하지 않는다(34.8%), 여자는 외모를 바꾼다(28.2%) 상관 않는다(42.3%)로 오히려 상대 여자의 취향에 맞춰 변신하겠다는 남성이 더 많았다.

남녀의 차이는 ‘외모에서 중요한 순서대로 꼽으라’는 질문으로 들어가면 확연히 드러났다. 남자들은 여자의 얼굴, 표정/말투, 몸매, 패션의 순인데 비해, 여자들은 표정/말투, 패션, 얼굴, 키의 순서였다. 결국 여자들은 단지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이 풍기는 종합적인 분위기를 더 중요시했다.

일단 결혼한 뒤에도 배우자의 외모가 중요할까? 설문 결과는 ‘그렇다’고 말한다. 기혼자 71%, 미혼자 60.7%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외모가 중요한 이유로 ‘이성적 매력’은 결혼 뒤엔 줄어든 반면(기혼자 55%, 미혼자 73%), ‘경쟁력’은 높아졌다(기혼자 40%, 미혼자 20%). 외모에 대해 여전히 남녀의 고정관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시작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자들이 사랑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독립의 가능성이 0%여서 평생 먹여살려줄 돈과 직업만 있으면 또는 좋은 집안이라는 ‘조건’만 보고 여성들이 “내 취향은 없다”고 꼭꼭 억누르던 때는 지났다. 이제는 “나도 취향이 있어”, “나도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살고 싶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남성 외모를 보는 눈에 투영돼 있다.

35살의 전문직 여성 이아무개씨는 “스타일이 좋은 남자의 장점은 성적인 매력이 느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드 잡기도 좋고, 보고픈 마음도 더 많이 들고 아무거나 잘 어울리니까 선물을 줄 때도 좋다. 솔직히 여전히 남자들은 여자 외모 따지고 여자들은 남자 직업을 따지지만, 무조건 여자 예쁜 것만 보고 돈 많은 남자만 찾던 비정상적인 현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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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혼자 버는 ‘가장’이 두려워

출판사에서 일하는 백아무개(25)씨는 “여성들이 남자를 챙기고 옷 골라주던 일방적인 역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여성들이 센스 있는 남성을 원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중성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내게도 보는 즐거움을 달라’는 거고, 남성들은 ‘내게도 한 세상 빌붙어 살 여지를 달라’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이경미 커플매니저는 “처음 와서 ‘외모를 많이 본다’, ‘외모 취향에 맞춰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 회원들이 많다. 키가 175㎝ 이하이거나 얼굴이나 패션이 별로인 남성을 미팅시키려면 여성을 많이 설득해야 한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남성들도 여성들의 변화를 잘 알고 있다. 남성 화장품 시장이 불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는 것이 그 증거다. 남성들은 업계가 재빨리 내놓은 남성전용 아이크림이나 에센스, 팩 등 기능성 화장품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그런다고 남자들이 고분고분 거울만 쳐다보게 된 것은 아니다. 남자들도 영악스러운 건 마찬가지. “얼굴이 곧 돈은 아니잖수? 요즘처럼 팍팍한 시대에 직업 없는 아내는 곤란하죠.”(회사원 김아무개씨·32)

남자들에게 이젠 여자들의 직업이 중요하다. 3~4년 전까지는 직업란에 ‘신부수업 중’이라고 쓴 아름다운 여성도 인기였지만, 이제는 천만의 말씀. 프리랜서나 (애 낳으면 일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무직도 안정성이 적다며 기피할 정도고 여교사, 공무원, 전문직을 애타게 찾는다. 커플매니저들은 “물론 예쁜 것도 좋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안 되겠다”고 말하는 남성 회원들이 많다고 전한다. 결혼정보회사를 찾아온 미혼남성 중에 재산이나 직업이 좋은 연상이나 이혼녀를 소개해달라고 일부러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이제 남자들은 혼자 벌어서 험한 세상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위치가 두렵다.

커플매니저들은 배우자를 고르는 여성의 주체성도 매우 강해졌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찍으면 넘어간다는 식의 전통적인 남성들의 구애방식은 사라지고 있다. 미팅을 한 뒤 남성이“여자분은 뭐라고 하세요?”라고 물으며 여성의 반응에 더 초조해한다는 것이다. 결혼정보회사들의 각종 이벤트 미팅에서 신청자가 먼저 마감되는 쪽은 여성쪽이다.

여성해방과 동시에 남성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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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성들의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마사지를 받는 남자들도 늘었다.(한겨레21)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는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에서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치하면서 남녀에 따른 노동의 질적 차이가 사라진 것으로 ‘꽃미남’의 인기를 설명한다. 여성이 일자리를 갖게 되면서 혼자 힘으로 영토를 확보한 뒤 당당히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면서 선택권을 갖게 됐다. 남자들끼리 힘겨루기를 통해 넓은 영토(돈과 지위)를 차지한 남성이 미인을 차지하는 시대는 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진화심리학자들은 컴퓨터로 합성된 얼굴을 제시하는 실험을 통해 여성들이 점차 강인한 얼굴보다 온화한 얼굴을 선호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문화비평가 남승희씨는 논란을 일으켰던 <나는 미소년이 좋다>에서 “여성이 힘을 가질 때에만 자기가 갖지 못한 힘(남자)을 고르는 대신,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남자의 색(외모)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고, 남성 또한 색을 추구하며 더 넓은 자유와 인생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여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남자를 해방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맞불전략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의 주체성, 남녀 고정관념의 붕괴를 긍정하면서도 ‘외모주의’는 결국 남녀 모두에게 굴레가 될 뿐이라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다이어트의 성정치>를 쓴 여성학자 한서설아씨는 “남성들이 독점하던 재력이나 직업, 학벌과 같은 자원들을 여자들도 갖게 되면서 엄격하던 젠더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남자들이 ‘여성 취향’으로 외모를 꾸미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한 가지 기준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남자들의 외모주의를 비판해 왔던 여자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라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김찬호 연세대학교 강사도 “남녀의 절대적인 권력 차이가 줄면서 여자도 남자에 극단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자 박력있는 남자는 기피대상이 됐고, 여성들이 연하의 남자를 재미 삼아 만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외모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이미지의 폭증 시대에 살고 있고,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오래 찬찬히 사람을 사귀며 알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고갈시킨다”고 말한다.

자, 당신은 당신의 연인을 왜 사랑하는가?

박민희 기자 ,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