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일본 교류 - sinla ilbon gyolyu

(3) 신라와 일본의 교류

신라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웠으나 군사적 대립이 잦아 오히려 문화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조선술(배 만드는 기술)·축제술(저수지 쌓는 기술)을 일본에 전하였는데, 이 밖에도 도자기 만드는 기술과 의약·불상 등을 전파하여 일본의 문화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쿄류지(廣隆寺)

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은 진평왕이 스이코 천황에게 보내준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문화교류 가운데 축제술의 전파는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쳐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하였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쳐 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왜로 갔고 649년에는 일본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일본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그때 왜는 백제와의 친교가 두터웠음에도 당나라에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또한 신라 해군이 고대 일본 시기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또한 일본에 외래악으로써 가장 먼저 일본에서 연주된 음악은 신라의 음악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인교(允恭) 천황 420년, 즉 서기 453년에  신라왕이 천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놀라고 슬퍼하면서 조공으로 배 80척과 음악인 80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6세기 중엽 우륵이 가야금을 갖고 신라에 투항하기 이전의 신라 음악은 춤과 노래 정도로 연주된 지방의 향토음악 정도를 크게 넘지 못했기 때문에 5세기 중엽 신라악인 80명이 일본에 파견됐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는 인식도 존재한다.

신라는 관개나 저수지 축조 부분에서도 그 기술이 뛰어났다. 당시 일본 천왕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에게 명해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를 파게 했고, 나중에 그 저수지를 만든 것이 한인이라 하여 한인의 연못이라 이름 지어졌다.

“ 오진(應神) 7년 (396년)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무내숙이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이 연못을 한인지(韓人地)라 부른다. ”

특히 토다이지의 쇼소인(正倉院)에서 신라의 촌락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국가 통치체제의 수입과 신라, 일본간의 교류 현황을 잘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일본 지역에 진출하여, 그 곳의 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시기 중 특히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삼국의 문화였다. 삼국은 대륙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소화, 흡수하고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킨 후 다시 일본에 전파하였다.

코류지(廣隆寺) 전경

코류지(廣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전시안내

쇼소인(正倉院) 전경

쇼소인(正倉院) 내부 구조 설명도

3

삼국시대의 문화교류

백제의 우수한 문화는 한성시대 초부터 웅진·사비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본에 전파되었는데, 한학·불교·천문·지리·의학·음양·음악·공예와
여러 가지 산업기술이 고대 일본 문화에 씨를 뿌렸으며 점차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Copyright 2015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고대 신라는 일본의 왜 왕국과 외교를 할 때 어떤 물품들을 주고받았고, 어떤 의례를 펼쳤을까. 고대 백제나 신라 사신들은 어떤 얼개의 배를 타고 어느쪽 바닷길로 중국이나 일본에 갔을까.

최근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고대 대외 교류사의 세부를 복원하려는 연구가 조금씩 물꼬를 트고 있다. 대선으로 술렁거렸던 지난 1~2주 사이 학계에서는 고고 유물과 문헌 기록을 토대로 백제, 신라의 대외 관계를 조명하는 학술 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 신라와 왜는 정말 앙숙이었을까? 지난 15~16일 대구 경북대 박물관이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과 공동주최한 ‘신라와 왜의 교류’ 국제학술대회는 적대국 인식만 팽배했던 신라-왜의 외교교류사를 한·일 연구자들이 처음 집중 조명하는 자리였다. 총론 격인 ‘신라와 일본’을 발제한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200여년에 불과했던 백제와 가야의 교류기간에 비해 신라는 500여년간 왜와 교류했다”고 강조했다. “통일전쟁만으로 두 나라가 갈등 관계였다고 보는 건 객관적 해석이 아니”라는 단언이었다. 5세기 전반 일본 열도 고분에서 발견되는 금동제 장신구와 마구 등이 신라산인 반면, 황남대총 같은 신라 왕릉급 무덤에 부장된 경옥으로 만든 곡옥은 재료가 일본산이란 점에서 교역관계가 일찍부터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또 6세기 후반 일본의 대표적 귀족 무덤인 나라현 후지노키 고분의 마구, 장신구 부장품들도 상당수 신라산이며, 7세기에는 신라 인화문 토기가 일본의 옛 도읍 난파, 나라 등에서 집중 출토된다는 점 등도 또다른 근거로 제시됐다.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다카타 간타·니토 아쓰시 연구원은 신라와 고대 일본의 무덤에서 나온 장신구와 마구에 있는 용, 풀잎 등 문양의 유사성, <일본서기>의 교류 기록 등을 분석하면서, 양국 외교가 물품과 기술자의 증여·파견, 지역 실력자들의 사신 교류 등 다양한 경로로 이뤄졌음을 짚어냈다. 좌장인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임나일본부 등 기존 군사정복설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고대 일본과 신라의 중앙·지역 세력들 사이에서 각기 진행됐던 고대 교류사의 복합성을 부각시킨 게 성과”라고 평했다.

■ 우리가 몰랐던 백제인들의 흔적은? 지난 7일 대전 충남대 박물관에서 이 대학 백제연구소가 ‘백제의 사행로’를 주제로 마련한 한·중 학술회의는 중국에서 최근 드러난 고대 한반도인들의 옛 무덤, 외교 공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 소개와 논의로 채워졌다.

논란이 뜨거웠던 건 백제·신라인들이 중국에 갔던 바닷길의 실체였다. 쑨광치 중국 다렌해사대학 교수는 1~3세기 동한시대에 이미 한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산동반도로 건너가는 항로가 개발됐다고 주장했으나, 정진술 해군사관학교 편찬위원은 ‘타당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고대인에게 황해는 위험한 대양이었다”고 그는 전제한 뒤, “위치를 파악하는 항법술이 발전하지 못한 단계에서 10세기까지는 랴오둥 반도까지 올라가 산둥반도로 건너간 뒤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북방연해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발굴성과가 알려진 황해변 장쑤성 렌윈강의 한반도계 석실무덤은 무덤 주인이 백제인인지, 신라인인지와 이들이 어떤 경로로 정착했는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박 교수는 판석이 있는 석실 무덤은 백제계임이 뚜렷하며, 백제 멸망 뒤 끌려가던 백제인들 일부가 정착 뒤 남긴 유적이라고 보았으나,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백제 석실분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밖에 조윤재 인제대 교수는 중국 남조 도읍 난징에 있었던 백제 외교공관인 ‘집아관’에 대해 중국 사서 각처에 남겨진 여러 기록들과 최근의 관련 발굴성과들을 상세하게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 높은 투표율의 역설…박근혜의 승리 요인
■ 문재인 “개인 꿈 접지만 야권 역량강화 도울 것”
■ 미국서 장고 들어간 안철수 분명한 어조로 “정치 계속”
■ ‘유서대필’ 재심공판 강기훈씨, 20년만에 법정서 목메인 호소
■ 뚜껑 연 역사박물관 ‘치적만 가득’…민주화운동 전시물 빈약
■ 여수 금고 털이범 검거…단독범행 시인
■ [화보] 문재인 담쟁이캠프 ‘눈물의 해단식’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