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소로 - sokeulateseu igseupeuleseu solo

인생에서 길을 잃는 수많은 순간마다 이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소로 - sokeulateseu igseupeuleseu solo

저자 에릭 와이너(Eric Weiner)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이며 철학적 여행가다. NPR의 해외통신원으로 일했으며 <워싱턴포스트>지와 여행잡지 <어파> 등에 기고했다. 아내와 딸과 함께 워싱턴 D.C.에 살고 있다. 역자 김하현은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 뒤 지금은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을 만나러 떠나는 여행기이자, 그들의 삶과 작품 속의 지혜가 우리 인생을 개선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목차는 ‘들어가는 말(출발)’, ‘1부 새벽,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3. 루소처럼 걷는 법, 4. 소로처럼 보는 법,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부 정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9.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10.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3부 황혼,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나오는 말(도착)’으로 되어 있다.

1. 루소처럼 걷는 법(How to Walk Like Rousseau)

장 자크 루소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에세이 작가, 식물학자였고, 독학자, 도망자, 청치이론가, 마조히스트였다. 무엇보다 루소는 산책자였다. 그는 자주 걸었고, 혼자서 걸었다. 물론 걷기 모임에서처럼 가까운 친구와 걷는 데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걷기는 루소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루소는 수줍음이 많았다. 근시가 심했고, 마르쿠스처럼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평생 비뇨기 질환 때문에(결국 전립선 비대증 진단을 받았다) 수시로 화장실에 가야 했던 루소는 사회적 만남을 최대한 피했다. 루소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 니체, 홉스, 소로, 칸트 등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즐겼다. 하지만 루소만 한 사람은 없다. 루소는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걷곤 했다. 한번은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480킬로미터를 걸은 적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에는 2주가 걸렸다.

루소에게 걷기는 숨쉬기와 같았다. “나는 멈춰 있을 때에는 생각에 잠기지 못한다.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만 머리가 잘 돌아간다.” 루소는 걸을 때 늘 지니고 다니던 게임용 카드에 크고 작은 생각을 적었다. 루소가 걸어 다닌 첫 번째 철학자는 아니지만, 걷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두루 철학적으로 사고한 철학자는 루소 이전에 없었다.(83~93쪽)

2. 소로처럼 보는 법(How to See Like Thoreau)

보는 행위는 의도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보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행위다. 소로는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별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각도다. 소로처럼 온갖 각도를 다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소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치에서 월든 호수를 관찰한다. 언덕 위에서, 호숫가에서, 호수에 떠 있는 보트 위에서, 물속에서, 태양빛과 달빛 아래에서, 겨울과 여름에 같은 광경올 보고 또 본다.

소로는 정면에서 보는 일이 드물었다. 옆 눈으로 봤다. 여기에는 생리학적 근거가 있다. 희미한 곳에서는 무언가를 옆에서 볼 때 가장 잘 감지할 수 있다. 소로는 이 정보를 알았을 수도, 몰랐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소로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매일 틀에 박힌 것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소로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었다. 가끔은 작디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늘 가던 길이나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머리카락 한 올만큼만” 벗어나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가끔은 보다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소로는 허리를 굽혀서 두 다리 사이로 뒤집어진 세상을 보며 감탄했다. (소로는 뒤집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데이비드 헨리에서 헨리 데이비드로 뒤집었다.) 세상을 거꾸로 뒤집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133~134쪽)

3.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How to Pay Attention Like Simone Weil)

베유는 1909년 파리에서 지독하게 세속적이고 매우 지적인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책에서 위안과 영감을 찾았다. 열네 살에는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대부분을 암기했다. 산스크리트어와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언어로 쓰인 책도 읽었다. (베유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쉬운 언어라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한 번에 며칠씩 보낼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받았지만 베유가 지식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교 공부의 유일하게 진지한 목적은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베유는 말했다. 관심이라는 짧은 단어가 베유를 사로잡았다. 관심은 제멋대로 퍼져 나간 베유의 철학과 삶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었다.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은 꼿꼿이 걷는 능력이나 피클병을 여는 능력과 더불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능력 중 하나다. 모든 눈부신 과학적 발견과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 모든 친절한 태도의 근원에는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심의 순간이 있다.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월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많은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221~222쪽)

4.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How to Glow Old Like Beauvoir)

저자는 보부아르의 <노년>을 읽고 ‘잘 늙어갈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받아들일 것

노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과거가 더 많다. 눈 돌리는 곳마다 과거와 부딪치고 과거에 걸려 넘어진다. 과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나는 치유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의 측면이다. 과거는 현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보부아르는 풍성한 과거가 없는 현재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지나온 세계가 황폐하다면 음침한 사막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2) 친구를 사귈 것

젊은이들에게 친구는 중요하다. 나이 들면 친구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고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울 수 있는 등의 일반적인 장점 외에도, 친구는 현재의 우리 자신과 과거의 우리 자신을 연결해준다. 그렇기에 나이 들었을 때 친구를 잃는 것은 특히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 함께 과거의 일부까지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의 일부까지도.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마찬가지였다. 보부아르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의 특이한 성격을 더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겸손해지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유치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코페르니쿠스적 순간을 경험했다. 이런 변화는 엄청난 위안이 된다.

(4) 호기심을 잃지 말 것

소로는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만큼 늙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보부아르는 한 번도 열정을 잃지 않았다. 궁금해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문 평론가처럼 영화와 오페라 이야기를 했다. 꾸준히 신문을 읽었고 권위와 열의를 담아 전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논했다. 미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로널드 레이건을 경멸했다(정력적이고 격렬한 혐오만큼 노화를 잘 막아주는 것은 없다). 학자와 기자들을 만났고 호의를 베풀었으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빨간색 가운을 입고 친구들을 만났다.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보부아르는 노년에 수동성이 아닌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열정은 반드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소일거리가 아닌 프로젝트를 가져라. 프로젝트는 의미를 제공해준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이전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패러디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 즉 개인과 집단에, 대의명분과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에 헌신하는 것이다.”

(6) 습관의 시인이 될 것

우리는 습관을 필요로 한다. 습관이 없으면 우리 삶은 수백만 개의 무의미한 파편으로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 습관은 우리와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다. 습관이 왜 생겨났는지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그 가치를 의심하기만 한다면 습관은 유용할 수 있다.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관을 지배해야 한다.

60대가 된 보부아르는 습관이라는 시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늘 하던 것들을 계속했다. 글을 쓰고 읽었으며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듣지는 않았다. “하루의 리듬과 내가 하루를 채우는 방식,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하루는 언제나 비슷하다. 하지만 나에게 내 삶은 전혀 침체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습관을 지배했다.

(7) 아무것도 하지 말 것

활동을 위한 시간이 있다면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시간도 있다. 우리 문화는 후자가 아닌 전자만 중요시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였지만 가끔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기도 했다. 두 사람이 로마에서 보낸 여름들은 무(無)를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와 끝없는 분투를 잠시 옆에 치워두고 로마에 “몸을 담갔다.”

(8) 부조리를 받아들일 것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치에 맞질 않는다. 우리가 이룬 모든 성취는 시간의 가차 없는 발길질에 허물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부조리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텅 빈 관객석을 향해 성심성의껏 반복해서 공연하는 정성스러운 무대.

보부아르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열렬한 영웅주의”라 부른 것을 받아들이고 일 자체가 가진 마법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보부아르는 괴물로 가득한 방 안에 서서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괴물을 만들어냈다.

(9) 건설적으로 물러날 것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삶에 매달린다. 하지만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건설적인 물러남을 실천해야 한다. 건설적인 물러남은 만사 무관심하거나 세상에서 등을 돌리는 게 아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나는 것이다.

아흔일곱 살까지 살았던 버트런드 러셀은 관심사의 원을 확장시켜서 “더 넓고 덜 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아의 벽이 조금씩 약해지도록, 자신의 삶을 점점 보편적인 삶에 어우러지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10)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

우리 삶에는 결코 끝이 없다. 그저 포기할 뿐. 끝마치지 못한 일은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세상에 끝마치지 못한 일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사람은 삶을 온전히 살아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줄어들수록 다른 이의 미래는 더욱 커진다. 우리가 끝마치지 못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끝마쳐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노년을 덜 쓰라리게 해준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계획 안에서 내 계획을 발견하면 내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460~475쪽)

5. 몽테뉴처럼 죽는 법(How to Die Like Montaigne)

몽테뉴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에피쿠로스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고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몽테뉴는 철학자들이 이 주제를 “표면을 겨우 스치는 수준으로 얕게 건드렸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더 깊게 파고들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 미셀 드 몽테뉴만큼 솔직하고 용기 있게 글을 쓴 철학자는 없다.

보부아르가 나이 듦에 집착한 것처럼 몽테뉴는 죽음에, 더 정확히 말하면 죽어가는 과정에 집착했다. 몽테뉴는 “내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이 생각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심지어 “숙녀와 게임에 둘러싸여 있었던 내 인생 가장 방탕한 시절”에도 몽테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몽테뉴는 죽음을 동경하지 않았다.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이러한 삶에 대한 동경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우리는 삶과 죽음이 순차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먼저 살고, 그다음 죽는다. 하지만 몽테뉴는 사실 “죽음이 우리 삶 속에 평생 녹아들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죽음은 체스나 와인 제조처럼 통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기술이 아니다. 죽음은 하나의 지향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몽테뉴는 “자연에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쓸모없음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삶의 실패가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몽테뉴는 천천히 죽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죽음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재앙이 아니고 아름답고 불가피한 것”이다. 낙엽은 어떻게 떨어져야 할지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걱정하지 마라. 때가 되면 자연이 전부 다 제대로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을 것이다. 괜히 걱정하지 마라.”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해골을 날라 와서 손님들에게 자기 운명을 상기시켰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도 이 사실을 알았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몽테뉴는 1592년 9월 13일 자기 저택에서 쉰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늙은 나이가 아니었다. 사망 원인은 편도선이 감염되어 목에 고통스러운 농양이 생기는 편도선염이었다. 마지막 며칠간 몽테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화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활동”으로 여긴 사람에게는 특히나 가혹한 고통이었다.

죽기 몇 시간 전 몽테뉴는 하인들을 전부 불러 모아 돈을 나눠주었다. 몽테뉴의 한 친구는 그가 “죽음을 달콤하게 맛보았다”고 말한다. 그 이상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483~500쪽)

저자가 이 책에서 선택한 철학자들의 통찰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활력을 제시한다. 지혜를 사랑했고 그 사랑이 전염성을 품고 있었던 열네 철학자들의 말과 생각이 우리에게 천천히, 기차의 속도로 다가온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여운이 퍼지듯 책 속 철학자의 조언도 우리 인생의 지혜로 서서히 자리잡는다. 단순명쾌한 삶의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지혜를 오래된 철학자의 경험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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