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산업구조 - 1990nyeondae san-eobgujo

1990년대 산업구조 - 1990nyeondae san-eobgujo

과학기술진흥(HDTV)
기록물 철 제목대한뉴스 제1812호 (CEN0001782)
기록물 건 제목과학기술진흥(HDTV) (1990)

1953년 국민소득 중에서 농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7%였고, 제조업은 9%였다. 농업종사자 수가 60%를 상회하는 점까지 고려하면 1950년대 초의
한국사회는 농업사회에 가까웠다. 이런 추세는 1950년대를 거치며 서서히 변모하였다. 1960년의 농림어업의 비중은 37%로, 10% 포인트만큼 줄어든 반면 제조업은 14%로 증가하였다. 산업구조는 고도성장기(제1차 - 제4차)를 거치면서 급격히 변화하였다. 1970년의 농어업의 비중은 27%인 반면에 제조업의
비중은 21%로 두 산업 간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고, 급기야 1974년에 제조업이 농어업의 비중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그 이후에 더욱 가속화되어
1988년에는 제조업 33%, 농림어업 11%로 두 산업의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짧은 기간 동안에 산업구조 고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한국 경제의 급속한 공업화 과정의 성공을 의미한다.

1950년대의 공업화는 원조자금을 이용하여 도입하는 물자의 형태에 따라 달라졌다. 한국 경제의 안정을 원조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국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생활필수품 생산에 필요한 원료나 중간재를 주로 도입하였다. 원면과 밀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물자인데, 총 수입액에서 15%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6.25전쟁을 통해 생산시설의 2/3가량이 파괴되었던 면공업은 정부자금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설비를 복구했고 원조를 통해
도입된 원면을 이용하여 생산을 빠르게 재개하여 1950년대의 공업 성장을 주도하였다. 제분 공업은 전쟁 이후 새롭게 발흥한 산업인데, 정부자금의 지원과
원조로 도입한 밀을 원료로 하여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 결과 제조업 생산액에서 소비재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3년 84%, 1960년 79%였다. 1950년대에는 식료품공업, 섬유공업 등을 포함한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도성장기(제1차 - 제4차)의 공업화는 정부의 산업정책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산업정책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라 할 수 있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할 필요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고도성장기의 수출이 빠르게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만성적인 적자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도 적자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것은 중화학공업의 발전수준이 낮아 중화학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를 해외 수입을 통해 공급했던 것에 기인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필요하였다. 다른 하나는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 수출산업의 육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주요 수출품은 경공업 제품이었지만, 1970년대 초 해외 경쟁이 격화되고 지속적인 수출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수출품의 개발이 요구되어 중화학공업 육성이 필요하였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우선 육성하고자 하는 산업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상 이들 산업은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국제수지 개선 효과, 생산유발 효과, 고용증대 효과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며, 이렇게 선정된 산업은 경제개발계획의 투자계획을 통해 공표된다. 다음에 중요한 것은 정부의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67년 이후 6개의 공업진흥법, 즉 기계공업진흥법(1967), 조선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70),
철강공업육성법(1970), 비철금속제철공업사업법(1971)이 제정되었는데, 이것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전기였다. 이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의 지원정책이 제도화되지 않았는데, 7개 공업진흥법 제정으로 정부가 육성하고자 하는 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금융상의 지원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고도성장기(제1차 - 제4차)에 많은 중화학공업이 건설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종합제철공장은 제1차 계획 기부터 건설하려고 했으나 외국에서 자본을 도입할 수 없어 좌절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제2차 계획의 중점 사업으로 다시 선정하여 건설을 추진했지만, 자금 도입이 여의치 않아 공장 건설이 상당기간 지연되었다가 계획했던 시점보다 3년이 지난 1970년에 착공할 수 있었고 1973년에 제1기 공장이 완공되었다. 조선소 건설 과정도 종합제철공장 건설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려고 했던 시기는 1969년이었는데, 외국자본 도입이 여의치 않아 계속 지연되다 1972년에 착공하여 1974년에 완공하였다. 이 시기에 건설된 대규모 중화학공업 공장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건설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강력한
건설 의지와 지원정책, 그리고 민간 기업가의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들이 상호작용하여 착수한 이후에는 짧은 기간에 공장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고, 곧바로 수출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회발전기(제5차 - 신경제)에 정부의 역할은 변경되었다. 우선 정부의 산업정책이 이전의 선별적 육성정책에서 기능적 지원 체계로 바뀌면서 산업 발전을 위해 간접 지원하게 되었다. 즉, 정부는 정부출연연구소를 통해 연구 활동을 장려하고 지정 연구 과제에 대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방법을 통해 과학기술 및 산업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다음에 이 시기에 시행된 정부의 산업정책 중에서 중요한 것은 불황산업의 구조조정이었다. 1987년 발표된 ‘해운산업합리화대책’이나 1989년에 발표된 ‘조선산업 합리화계획’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회발전기의 산업 발전은 민간 기업의 선택이 중요하였다.

한국 공업화의 역사는 공업구조 고도화의 과정이었다. 1950년대 중화학공업 비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60년 제조업 생산액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1%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공업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그 비율은 빠르게 상승하였다. 1970년의 중화학공업 비율은 44%였고, 1980년에는 58%, 1990년에는 68%, 2000년에는 79%였다.

농업국가에 머물던 경제는 1945년 광복과 6.25전쟁을 극복하면서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수출지원정책을 추진하여 단기간에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경제기적을 이루었다.

전후 복구와 원조에 의존했던 1950년대의 경제상황에서 정부는 관련법을 제정하면서 수출관련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수출장려금을 지원하고 신시장을 개척한 기업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수출을 촉진시키고 고령토, 납석, 형석, 마른 멸치, 건어 등 5개 품목은 수출 결손액을 정부가 보상해주는 등 수출을 장려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수출품목은 쌀, 생사, 김, 한천, 돈모(豚毛), 면직물 등의 1차 생산품이 70~80%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수출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정부는 1962년 12월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출정책을 주도하여 합판, 가발, 신발 등 1차 경공업 제품의 수출비중이 20%선에서 80%선으로 향상되었고, 섬유제품은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여 주요 수출품목이 되었다. 이밖에도 화장품과 제과류, 맥주, 그릇, 담배, 설탕, 홍삼, 미싱, 농기구 등의 수출이 시작되었고, 1950년대 주요 수출품목이었던 농수산물과 광물 등의 수출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수출이 활발해지자 1964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였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의 호황기를 타고 10년 동안 연평균 41%의 놀라운 수출신장을 기록하며 저개발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경공업 위주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게 되면서 기계, 선박, 철강 등의 중화학 제품들이 수출의 40~50%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공업 제품의 수출은 많은 양을 차지했고 품목도 더욱 다양해졌다. 섬유제품은 1973년 단일품목으로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고, 라디오 등의 전자제품, 라면, 신발, 악기, 고급비누, 보온병, 인형 등이 수출되었다. 또한 자동차와 객차의 수출이 시작되었고, 시멘트의 수출량도 늘어났다. 1970년대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도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1980년대에는 전기, 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류의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의 50~60%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전기, 전자 분야의 수출이 급증하며 전체 수출의 30%를 점유하였다. 컬러TV, CDP, 휴대폰, 보일러 등 전자제품의 수출은 1980년대 초반 20억 달러에서 1989년 180억 달러를 달성하였으며, 반도체, 컴퓨터, 가전제품 등이 수출 주력 상품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자동차의 수출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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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철강제품 수출(1979)

1990년대에는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어선 지 31년 만에 1천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자동차, 선박, 화학제품, 전기․전자, 기계류 등의 중화학공업 생산품이 수출 주력상품이었다. 이 중 반도체가 수출품목 1위를 차지하고 1994년에는 단일품목으로는 최초로 수출 1백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선박은 세계 1위의 수주율을 올렸고, CDMA 휴대폰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여 수출시장에서 급부상했다. 수출품목 3위에 이르던 철강제품은 외환위기로 인해 큰 고난을 겪었으나,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급 등산화와 손톱깎이, 낚시대 등은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의 품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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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반도체 256메가 D램 최초 개발(1994)

2000년대 들어서 고기술 품목들이 새로운 수출품목으로 등장하였다. 세계 최초로 건조된 극지용 드릴십, 인공위성, 새로 개발된 신약 등이 수출되었고, 프리미엄급 전기밥솥과 디스플레이, TV용 LCD, 휴대폰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류가 유행하면서 한국의 가요 등 대중문화가 수출되고 있으며, 연관된 상품의 수출도 늘고 있다.

한편 ‘수출의 날’은 1990년 ‘무역의 날’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2011년 12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12월 5일로 날짜가 변경되었으며, 수출에 큰 성과를 올린 기업을 표창하는 등 수출의 중요성과 의지를 다짐하는 행사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집필자 :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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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근, 『한국 역대정권의 주요 경제정책』, 한국경제연구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