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이 갖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파일을 온라인에 공개하라고 지시했다고 가디언 등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공개 대상 파일은 최근 문을 연 교황 비오 12세 기록보관소에 있는 유대인 관련 파일 170권이다.

교황청에 따르면 여기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에 박해 받던 유대인 등이 교황에 도움을 구하는 서신 2700개가 포함돼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2차 세계대전 시기가 포함된 1939년 3월부터 1958년 10월 서거 때까지 재위했다.

유대인들은 서신을 통해 나치에 추방되지 않도록 해 달라거나 강제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가족을 찾아달라는 부탁도 했다.

보도자료에 포함된 편지 한 통은 1942년 스페인의 강제수용소에서 자유를 찾은 23세 독일 대학생의 것으로 “외부 도움 없이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들은 지난 2020년 기록보관소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교황청은 설명했다.

교황청은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유대인 단체들은 교황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에 침묵했다고 비판해왔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커처는 최근 기록보관소를 인용한 한 책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아돌프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유대인들을 위해 개입하거나 나치의 잔혹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꺼렸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교황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조용한 외교를 했다고 옹호해왔다.

[서울=뉴시스]

  • 좋아요 이미지좋아요
  • 슬퍼요 이미지슬퍼요
  • 화나요 이미지화나요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c) 2차 대전의 발발과 유럽의 카톨릭화

1930년대의 경제 공황과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 블록화는 식민지가 부족한 독일을 곤경에 빠뜨렸다. 1937년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3국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소련에 대항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함으로써 중부 유럽의 세를 넓혔으며, 히틀러는 산업을 발전시켜 전 후 보상금 등으로 피폐한 경제를 일으켰고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와의 영토 협상이 결렬되자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은 발발한다. 히틀러, 괴벨스, 히믈러 등은 카톨릭 신자였고,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항상 교황청과 협의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교황청이 힘을 모아 유럽을 정복하려 했던 전쟁이였기에 교황청은 2차 대전을 전후해서 독일의 무력을 이용해 비 카톨릭 교도를 제거하고,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상이 된 예수회 회원 티소(Tiso) 경은 "카톨릭 정신과나치주의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세계를 개조하는데 힘을 모았다."고 선언한다. 1940년 6월 바티칸은 라디오로 티소의 선언문이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고 발표했고, 티소 정권은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개신교도에 대해 탄압을 가했고, 정교회 신자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다.

프랑스에서는 F.N.C.(카톨릭 국민 연합회)가 조직되어 3백만명의 지지자가 참여하였다. 교황 피오 11세는 "카톨릭 행동대는 신념에 찬 사도들이다."라고 하며 F.N.C.를 지지한다. 또한 프랑스 파리의 카톨릭회 회장은 "히틀러의 전쟁은 유럽 문화를 수호하고자 착수한 숭고한 사업이다." 라고 언급했다.

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d) 히틀러 측근과 예수회

히틀러는 교황청과 반 카톨릭주의자들을 섬멸하기로 조약을 체결하고, 자유주의자와 유대인을 가둘 수용소를 건립했다. 그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학살당했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예수회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도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조직을 대대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유도해 갈 기관을 설립할 것이며, 그 기관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선동하며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SS(독일 친위대)는 예수회의 영성훈련과 규칙을 본받아 카톨릭 교회의 성직제와 거의 유사하며, 베벨스보르크(Webelsbourg)라는 SS의 본부는 'SS 수도원'이라고 불리웠다. 

e) 죽음의 강제수용소와 바티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설치한 강제수용소를 KZ(Konzentrationslager)라고 한다. KZ는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이 구금·강제노동·살육을 위하여 국내외에 설치한 감옥으로 1933년 2월 제정된 ‘국민과 국가의 방위령(防衛令)’에 의하여 그 해 수십개 지역에 설치되었다. 공산당원·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 등 모든 반(反) 파쇼주의자와 나치스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을 말살하였다. 또한 전국민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반대파나 교도소에서 만기석방된 반 파시스트의 대부분이 아무런 재판절차 없이 SA(나치스돌격대), SS(나치스친위대)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무기한으로 구금되었다.

1934년부터 히틀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SS가 수용소의 관리를 맡아, 정치적 반대자에 이어 인종적·종교적 이유에서 유대인과 불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을 구금하고, 나중에는 일반범죄자·변절자 등도 수용했다. 개전(開戰) 후, 파시스트와 그 배후의 융커들은 폴란드와 소련의 일부를 독일인의 이주지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지역의 원주민을 절멸(絶滅)수용소에 구금하였다. KZ는 타국민 특히 슬라브인·유대인의 조직적 근절시설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그 실례로 폴란드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마이다네크의 가스실(室), 시체소각장 등을 들 수 있다. KZ는 처음 수용인원 1,000명 안팎의 소규모 시설로서 수십 개소에 산재해 있었으나, 그 뒤 세계여론이 두려워 작센하우젠을 비롯한 5~6개소의 대수용소로 통합하였다. 1938년 H.W.괴링이 유대인의 절멸을 제의한 이래, 1100만명의 유럽거주 유대인 중 약 600만 명이 학살되었고 그 중 180만명이 어린이였다.

아우슈비츠(Auschwitz)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의 도시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건립된 곳이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히믈러의 명령 아래 나치 친위대(SS)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고, 1945년 1월까지 나치스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수용소를 40개의 캠프로 나누었는데, 피수용자는 강제노동과 영양실조·전염병으로 죽거나 또는 ‘욕실·청결·건강’이라는 등 거짓 푯말이 붙은 독가스실로 연행되어 학살되었으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살은 히믈러가 지휘하는 SS와 게슈타포에 의해 자행되었다.

2차 대전 바티칸 - 2cha daejeon batikan

1942년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조치가 내려지자 프랑스의 카톨릭과 개신 교회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카톨릭 당국자에 의해 거부되었다. 히틀러는 카톨릭 람바흐 학교를 다녔고, 수도원 성가대원이었으며, 나치의 기장인 철 십자가는 수도원 원장 하겐(Hagen) 신부의 전령관의 표지에서 따 온 것이다.

독일에서 활동한 교황의 밀사 폰 파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3제국은 교황의 숭고한 정신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으로 옮긴 첫 번째 세계적 권력이다."

여기서 '실천으로 옮긴다'란 말의 의미는 반 카톨릭교인을 척결한 것을 의미하며 UN의 공식 집계로 무려 2천 5백만명이 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 폰 파펜은 나치와 교황청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으며, 교황이 제시한 안을 나치 수뇌부가 받아드리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나치 정권의 열렬한 선전장관이었던 조셉 괴벨스는 예수회 대학에서 신학을 교육을 받았고, 로욜라가 주장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