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호칭 이황 - cheongbaegli hoching ihwang

청백리 호칭 이황 - cheongbaegli hoching ihwang
청련 이후백 초상화. photo 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

윤핵관의 ‘관’이 관계할 관(關)이 아니라, 관료 관(官)이었다면? 최근 대통령실을 흔든 사적 채용, 인사 청탁 등 사적 관계로 인해 불거진 문제들은 공적인 사람, 이른바 ‘관인(官人)’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자행하지 않고, 철저한 세평 검증을 통해 공정하게 인사를 하며, 정치적 적폐 청산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도 협치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진정한 관인의 모습을 우리 선조들한테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정한 관인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몇몇 관료에게 조정에서 직접 청백리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청백리는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관리’의 줄임말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으며, 올곧고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다. 이 호칭을 받는 것은 대단한 영예로 여겨진다.

지난 8월 20일 청백리 유학자 중 한 명인 청련(靑蓮) 이후백(1520~1578) 선생에 대한 학술회가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렸다. 지난 2020년 이후백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미뤄져 올해 열리게 됐다. 35세에 급제해 사망할 때까지 23년을 공직에서 일한 이후백 선생은 퇴계 이황, 황희 정승, 맹사성과 더불어 대표적인 청백리로 평가받는다. 명종 치세기에 승문원 박사, 홍문관 핵심 문한관 등으로 12년을 일하다가 선조가 즉위하고서는 고위직 관료가 돼 조정 일에 깊이 관여했다. 선조 7년 형조판서에 임명된 데 이어 호조판서까지 지냈다. 고위 관료로서 막강한 조정 권력에 가깝게 일했던 그는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오는 청탁을 엄격하게 배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상적인 관인(官人)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 

이후백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지만, 그의 청렴결백한 관료 정신은 당대에도 크게 이름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유지했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했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돼 있었다. 이후백은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오.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라고 말했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 6월 1일) 

이후백 학술회에 참석한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축사를 통해 “이후백 선생은 불편부당하고 청백한 처신과 공정한 인사를 통해 후배 사림들부터 존경을 받았다”며 “16세기를 이끌어가신 분이지만, 지금 활동하더라도 공도를 실천하는 정세가와 청렴한 고위공직자로 존경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훈 고려대 교수는 학술회 발표를 통해 “이후백 선생은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관인(官人)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후백 선생은 명종과 선조 치세기를 겪으며 동시대에서 활동했던 이순신 장군과도 교류했는데, 이순신 장군의 공직자관에도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지역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함경감사가 이후백 선생이었다. 이때 이후백 선생은 담당지역 여러 진을 순행하면서 활쏘기 등 성적이 좋지 않은 장수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는 등 군대를 엄정하게 관리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이후백 선생에게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하여,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르고 있다”고 건의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백 선생이 당시 초임 하급장교였던 이순신 장군의 건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저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이후백이 이순신의 공직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국론 통합에도 앞장선 정치가 

이후백 선생은 호남 출신 유학자로서 영남과 호남, 서인과 남인 간 대립을 완화하고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애쓴 정치가로도 기록돼 있다. 이후백 선생이 전남 강진에서 중앙정치로 진출한 1555년은 10년 전 일어났던 을사사화의 여파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기였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날 학술발표에서 “청련이 중앙에 진출한 당시는 ‘사화 정국’에서 ‘사림 정치’로 이동하는 과도기였는데, 이때 그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며 “국왕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하며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고 양편의 도덕적 주체를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모든 당쟁이 ‘인사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해야 함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앞서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후백 선생의 일화에도 그가 인사 문제에 특히 민감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봤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고 했다.” 

이후백 선생이 1578년 사망한 후 조정의 당파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정쟁에 눈이 멀어 다가오는 외세의 침략은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당대 사림들 사이에서는 “청련이 살아계시면 당쟁이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해내려온다. 

이후백 선생 사후 자손들은 청련의 본거지였던 강진을 중심으로 호남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임형택 교수는 “호남에서 도학이 성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데다 학문적 구심점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후백 선생은 호남 유학자로서 자기 위상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청백리록은 관리(官吏)들 중에 청렴 결백한 자를 의정부, 육조 경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직들이 추천하여 임금의 재가을 얻어 선정한 청렴한 벼슬아치들로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마련되었던 관기숙정(官紀肅正)의 제도이다.

이에 녹선되어 청백리록에 오르면 자손들은 父祖의 음덕으로 출사의 특전이 부여 되었으며 숙종조 이후에는 청백리의 후손들이 많아서 3상(의정부의 3정승)의 추천을 받아 5명 정도의 청백리 자손이 특채되었다.

청백리는 총 44씨족에서 218명이 배출되었는데, 여러 기록들에서 본관별로 6명 이상을 배출한 집안은 전주이씨, 파평윤씨, 안동김씨, 연안이씨, 남양홍씨, 전의이씨 등 6씨족이며 그 다음 순위로 5명을 배출한 씨족은 광주이씨, 한산이씨, 양천허씨 등이있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록선(錄選)

조선조에 청백리로 록선 된 수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몇몇 사료들에 의하면 210여명의 전후로 선발된 것으로 보인다. 청백리에 녹선 된 사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대동장고(大東掌攷)』

13책. 필사본. 순조연간에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동국통감〉·〈사기〉·〈문헌비고〉·〈동국여지승람〉 등을 참조하여 편찬했다. 기재양식은 자호(字號), 본관, 시호, 특기사항, 선조 중 유명인, 출신과 과거경력, 생몰, 주요관직 등이다.

1책은 역대고(歷代攷)로 단군조선에서 정조까지의 왕·왕비·인물·사건·치적을 정리했다.

2책은 초액고(椒掖攷:后妃) 이하 종영(宗英:왕자)·국구(國舅)·의빈(儀賓:부마)·보상(輔相)·검교

정승(檢校政丞)·총재고(冢宰攷)로 되어 있으며,

3책은 사마고(司馬攷)·문형고(文衡攷)·별천(別薦)문형고·문형권점록(文衡圈點錄),

4책은 문임(文任)·호당(湖堂)·옥서(玉署)·강관(講官)·국자고(國子攷),

5책은 중서(中書)·검상(檢詳)·전랑고(銓郞攷),

6책은 내한고(內翰攷),

7책은 융원(戎垣:訓將·禁將)·보유(補遺)·기사(耆社)·휴퇴고(休退攷),

8책은 사훈고(司勛攷:공신),

9~11책은 방백고(方伯攷)·사성고(使星攷),

12책은 별편에 유림·문원(文苑)·시인·필원(筆苑)·화가·청리(淸吏)·명장고(名將攷), 외편에 태묘종사

고·문묘종사고·계성사(啓聖司)·장릉배식고(莊陵配食攷),

13책은 내한천권록(內翰薦圈錄)·내각고(內閣攷)로 되어 있다. 대개 조선 중심이나 수록연대는 항

목마다 일정하지 않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청선고(淸選考)』

청선고라는 이름의 관원록(官員錄)은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은 장서각본으로 조선왕조전시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16책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에 있는 것은 순조 초(1800경)부터 고종 중엽(1880경)까지의 사실들만 뽑아 작성한 것으로 9책으로 되어 있다. 편자와 간행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모두 필사본이다.

관원을 국조 상신(國朝相臣), 문관, 무관, 음직(蔭職), 문과급제자들의 산계(散階), 환관 등으로 구분하여 수록했다. 각 관직의 관원을 분류하여 성명·자(字)·생년·급제년·나이·과종(科種)·도임년(到任年)·전관(前官)·본관·보학관계(譜學關係)·도사(到仕)여부·향년(享年)·호 등을 기재했다.

국조 상신에는 배극렴(裵克廉)에서 민규호(閔奎鎬)까지 361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500년에 걸친 약4만여 명의 중요관직 및 직계별(職階別) 선생안(先生案)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방대한 인명사서(人名辭書)이다. 조선의 관직운영 실태와 인명록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장서각·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3.『전고대방(典故大方)』

1924년에 서울 한양서원에서 발간했다. 4권 1책. 활자본. 각 분야별로 인물들을 나열하여 관계된 사건이나 내용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단군에서부터 역대의 만성시조(萬姓始祖)·상신(相臣)·문형(文衡)·호당(湖堂)·청백리·공신·명장·문장가·서화가·종묘배향·문묘배향·서원향사(書院享祀)·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북관칠의사(北關七義士)·십이사화(十二士禍)·임진란순절제인(壬辰亂殉節諸人)·기의승병장(起義僧兵將)·의기(義妓)·의병장·순절신(殉節臣)·척화신(斥和臣)·강도순절부녀(江都殉節婦女)·배종팔장사(陪從八壯士)·임오우해인(壬午遇害人)·갑신피화육대신(甲申被禍六大臣)·통신사(通信使)·외국인내공(外國人內貢)·외국인내사(外國人內仕) 등을 수록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자료를 근거해 작성한 일종의 인명사전으로서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역대 인물이나 인물과 관련된 사건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이 책에 수록된 조선시대 왕대별 총 청백리 녹선 인명은 모두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

4.『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우리나라 상고(上古) 때부터 대한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하고 정리한 책. 대한 제국기, 1908(융희 2)년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박용대(朴容大), 조승구(趙昇九) 등 30여 명이 증보하여 간행한 것이다. 250권 50책이다.

이 문헌비고에 청백리 명단 142명이 수록되어 있다.

5.『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

성씨대관(姓氏大觀)은 1960년도 총인구조사에 나타난 현존하는 한국의 성씨 258성을 대상으로 한 책이며, 내용은 각 성씨(姓氏)의 시조연원(始祖淵源), 주요계보(主要系譜), 주요본관(主要本貫), 역대 주요인물(歷代 主要人物) 등을 담고 있다. 이 자료에서는 명단이 성씨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씨별로 조사해본 결과 179명의 청백리가 발견되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왕대별 청백리의 숫자는 표와 같다.

조선시대 청백리 녹선수(錄選數) - 총218명

조선시대 청백리에 오른 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태조조의 청백리록(5)

안성:광주 - 참찬 / 우현보:단양 - 찬성사 / 류순:진주 - 제학 / 길재:선산 - * / 서견:연일 - 장령

■ 태종조의 청백리록(8)

경의:청주 - 절도사 / 김약항:광산 - 대사성 / 최유경:전주 - 참찬 / 박서생:비안 - 대사헌 / 이지직:광주 - 참의 / 이백지:용인 - 관찰사 / 이원:고성 - 좌의정 / 최사의:경주 - 판돈령

■ 세종조의 청백리록(15)

정척:진주 - 판윤 / 황희:장수 - 영의정 / 맹사성:신창 - 좌의정 / 이석근:전주 - 익평군 / 홍계방:남양 - 참의 / 이정보:경주 - 관찰사 / 황효원:상주 - 좌찬성 / 김장:광산 - 장령 / 최만리:해주 - 부제학 / 류관:문화 - 영의정 / 류겸:진주 - 좌참찬 / 민불탐:여흥 - 주부 / 박팽년:순천 - 승지 / 이지:경주 - 판관 / 류염:진주 - 이판

■ 세조조의 청백리록(7)

박강:반남 - 판중추 / 기건:행주 - 판서 / 노숙동:풍천 - 대사헌 / 김종순:경주 - 판윤 / 정문형:봉화 - 우의정 / 이언:흥양 - 부윤 / 곽안방:현풍 - 군수

■ 성종조의 청백리록(20)

정성근:진양 - 직제학 / 성형:창녕 - 참찬 / 허심:양천 - 우의정 / 윤석보:칠원 - 직제학 / 이훈:한산 - 참찬 / 김겸관:광산 - 판서 / 양관:남원 - 동지돈 / 조지서:임천 - 보덕 / 이신효:전의 - 관찰사 / 이약동:벽진 - 지중추 / 임정:이안 - 예판 / 허종:양천 - 우의정 / 박열:밀양 - 찬성 / 구치관:능성 - 영의정 / 이현보:영천 - 판중추 / 안팽명:광주 - 사성 / 박처륜:고령 - 부제학 / 민휘:여흥 - 대사헌 / 이순:우봉 - 참판 / 류훈:문화 - 판서

■ 중종조의 청백리록(8)

정매신:진주 - 판관 / 조사수:양주 - 이판 / 최명창:개성 - 형참 / 권빈:안동 - 전직 / 김무:안동 - 공판 / 조치우:창녕 -사웅전 / 오세한:나주 - 병사 / 송흠:신평 - 판중추

■ 성종조의 청백리록(26)

김전:연안 - 영의정 / 강숙둘:금천 - 사간 / 이선장:한산 - 군수 / 류헌:전주 - 대사간 / 이화:전의 - 병판 / 김종직:선산 - 형판 / 정갑손:동래 - 찬성 / 정창손:동래 - 영의정 / 류빈:진주 - 이판 / 이숭원:연안 - 이판 / 류희철:문화 - 집의 / 김은:연안 - 공참 / 손중돈:경주 - 참찬 / 표빈:신창 - 시정 / 조원기:한양 - 판중추 / 양지손:남원 - 예의 / 김연수:안동 - 첨정 / 박상:충주 - 이판 / 윤사익:무송 - 판중추 / 이철균:성주 - 대사성 / 이언적:여주 - 찬성 / 김정:경주 - 판서 / 유찬:기계 - 수사 / 한형윤:청주 - 형판 / 신공제:고령 - 이판 / 김양진:풍산 - 공판

■ 명종조의 청백리록(45)

정연:동래 - 군수 / 윤부:파평 - 병참 / 이세장:전주 - 관찰사 / 정종영:초계 - 찬성 / 안현:순흥 - 좌의정 / 박수량:태인 - 참찬 / 김순:경주 - 정랑 / 임호신:풍천 - 지돈령 / 임보신:풍천 - 형의 / 이명:예안 - 좌의정 / 이영:영천 - 수사 / 홍섬:남양 - 영의정 / 이몽필:전주 - 이참 / 홍담:남양 - 판서 / 성세장:창녕 - 호판 / 윤춘년:파평 - 판서 / 윤현:파평 - 찬성 / 류흔:문화 - 부정 / 우세겸:단양 - 부정 / 박영준:고령 - 이판 / 박민헌:함양 - 참판 / 이증영:전의 - 공정 / 김몽좌:김해 - 직장 / 이준경:광주 - 영의정 / 주세봉:상주 - 찬성 / 김개:광산 - 판서 / 안잠:순흥 - 별좌 / 이황:진성 - 찬성 / 송찬:진천 - 판중추 / 허세린:양천 - 좌윤 / 김팽령:경주 - 사용 / 강윤권:진주 - 사재정 / 오상:해주 - 이판 / 신잠:고령 - 목사 / 김우:* - 부사 / 이중경:광주 - 이참 / 안종전:죽산 - 군수 / 김광:영안 - 부사 / 유언겸:창원 - 정랑 / 변훈남:초계 - 현령 / 김약묵:강진 - 집의 / 노진:풍천 - 판서 / 신사형:영월 - 목사 / 김취문:선산 - 대사간 / 송익견:봉화 - 우의정

■ 선조조의 청백리록(23)

심수경:풍산 - 우의정 / 허잔:양천 - 이판 / 이기:한산 - 이판 / 이우직:여주 - 예판 / 이원익:전주 - 영의정 / 류성룡:풍산 - 영의정 / 이항복:경주 - 영의정 / 이직언:전주 - 찬성 / 백인걸:수원 - 참찬 / 장필무:구례 - 병사 / 최흥원:삭녕 - 좌의정 / 이제신:전의 - 병사 / 안지유:순흥 - 이판 / 김쉬:안동 - 판중추 / 이광정:연안 - 참찬 / 성영:창녕 - 이판 / 심희수:풍산 - 우의정 / 이유중:덕수 - 대사헌 / 허욱:양천 - 좌의정 / 김장생:광산 - 참판 / 최여립:전주 - 승지 / 오억령:동복 - 판서 / 이기설:연안 - 장령

■ 인조조의 청백리록(13)

김상헌:안동 - 영의정 / 민여임:여흥 - 참판 / 김덕함:상주 - 대사헌 / 성하종:창녕 - 병사 / 이시백:연안 - 영의정 / 신경진:영월 - 대사헌 / 김신국:청풍 - 영중추 / 김시양:안동 - 판관 / 이안눌:덕수 - 이판 / 이명준:전의 - 참판 / 최진립:경주 - 공참 / 홍명하:남양 - 영의정 / 김신국:청풍 - 영중추

■ 숙종조의 청백리록(22)

이상진:전의 - 좌의정 / 조경:한양 - 판중추 / 강백년:진주 - 참찬 / 류경창:전주 - 이참 / 최관:전주 - 지중추 / 성이성:창녕 - 부사 / 조동:풍양 - 진선 / 홍우량:남양 - 수사 / 이태영:진주 - 부사 / 강세구:진주 - 대사간 / 강유후:진주 - 부사 / 윤지인:파평 - 병판 / 조석윤:배천 - 이참 / 박신규:밀양 - 참찬 / 이지은:공주 - 좌윤 / 이후정:연안 - 참지 / 홍무:남양 - 정랑 / 강열:진주 - 부사 / 이세화:부평 - 판서 / 윤추:파평 - 장령 / 최경창:해주 - 부사 / 이제:전주 - 우윤

■ 경종조의 청백리록(6)

류상운:문화 - 영의정 / 강석범:진주 - 도정 / 김두남:안동 - 헌납 / 송정규:여산 - 관찰사 / 이명준:연안 - 부사 / 이하원:광주 - 판서

■ 영조조의 청백리록(9)

허영:양래(천川) - 수사 / 윤용:파평 - 형판 / 정형복:동래 - 형판 / 윤득재:해평 - 병판 / 이겸진:덕수 - * / 이병태:한산 - 부제학 / 한덕필:청주 - 참판 / 최유현:삭녕 - 세마 / 이태중:한산 - 호판

■ 정조조의 청백리록(2)

이의필:전주 - 참찬 / 이단석:전주 - 참판

■ 순조조의 청백리록(4)

남이형:의령 - 부사 / 서기순:대구 - 판서 / 한익상:청주 - 관찰사 / 심의신:청송 - 관찰사

[참고] 청백리에 녹선된 수

조선 전시기를 통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경종·정조·순조대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00여명 내외 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실려 있는 왕대별 인원을 보면 태조대 5인을 시작으로 태종(8인)·세종(15인)·세조(7인)·성종(20인)·중종(35인)·명종(45인)·선조(27인)·인조(13인)·숙종(22인)·경종(6인)·영조(9인)·정조(2인)·순조대(4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218인이 녹선되었지만, 이외의 왕대에는 녹선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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