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로 명품 인가요 - eteulo myeongpum ingayo

에트로의 상징인 페이즐리(Paisleyㆍ올챙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 문양의 원단으로 이뤄진 고풍스러운 소파, 새로운 컬렉션을 위해 준비한 수많은 페이즐리 문양의 옷과 액세서리, 지난 화보를 재활용해 만든 '종이 꽃'이 담겨 있는 화분. 그야말로 '페이즐리 세상'이다.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에트로이기에 소박하고 단출한 본사 건물 외관이 조금은 어색하다. 하지만 향을 싼 종이는 묵은 종이일수록 향내가 깊이 배는 법. 에트로 건물은 '향을 쌌던 묵은 종이'를 연상케 했다. 다소 실망스럽기까지 한 외관에 비해 건물 곳곳에는 오랜 기간 '페이즐리 문양'이라는 한 우물을 파고 계승한 에트로가의 향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에트로 명품 인가요 - eteulo myeongpum ing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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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로가(家)의 장남 야코포 에트로 사장과의 첫 만남도 본사 건물을 처음 마주하던 그 순간과 비슷했다. 언론에 최초로 공개하는 에트로가의 '보물' 에트로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을 때다. 에트로 도서관은 에트로 창업주이자 야코포의 아버지 짐모 에트로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고서와 고전 문양이 담겨 있는 원단들로 가득 차 있다.

200년도 넘은 고서에서 나는 묵직한 향을 맡으며 누렇고 바스락거리는 종이가 행여 부서질까 조심스레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을 때 장난기가 가득 담긴 표정을 한 전형적인 이탈리아 50대 남성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손에는 여성 핸드백보다도 작은 종이 쇼핑백을 하나 달랑 들고 있었다. 수행원도, 격식도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방문이었다. 19국에 119개 매장을 두고 있는 명품 브랜드 에트로의 오너라고 하기엔 조금 가벼워 보인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의 '내공'이 드러났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그였지만 깊숙한 곳에서 오너다운 진지함과 열정이 분출됐다.

◆ 가족 간 '촉촉한' 유대 관계가 가업 이끄는 힘

= 에트로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가족기업이다. 창업주 짐모 에트로가 그의 할머니가 운영하던 직물공장을 에트로라는 브랜드로 키워 냈고 장남 야코포를 비롯한 네 남매가 물려받아 회사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네 남매가 서로 자주 만나나요.

▶자주가 아니라 매일 만납니다. 우리 넷은 점심ㆍ저녁식사를 항상 같이해요. 회사 지하에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마련했어요. 공식적인 회의도 하지만 파스타 같은 음식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비형식적인 시간을 자주 가집니다.

주주총회라든가 간단한 외부 결정에 대해서도 식사 시간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품 전략에 관해서도 논의하고요. 항상 함께하다 보니 의사결정이 매우 빠릅니다. 서로 업무 분담이 돼 있기 때문에 넷은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주는 존재지요.

첫째인 저는 직물과 가방 분야, 둘째 킨은 남성복, 셋째 이폴리토는 재무관리, 막내 베로니카는 여성복을 맡습니다. 우리는 단단하면서도 촉촉한 관계입니다. 그게 바로 가족이지요.

-그래도 부딪히는 부분이 있을 텐데요.

▶물론 네 명이다 보니 가끔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에요. 내가 직물을 맡지만 천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베로니카와 제품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싸우기도 많이 싸우죠. 하지만 거의 대부분 베로니카가 이겨요. 하하.

논쟁이 자주 일어나더라도 결국은 이런 대화가 회사를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후계에 대한 부분에도 갈등은 없나요.

▶(단호히) 없습니다. 때가 되면 조카들에게 넘겨 줘야죠.(야코포는 미혼이다)

◆ 진정한 '명품' 정의-소비자에게 환상을 주지만 스스로가 가진 환상은 깨는 것

= 에트로의 '트레이드마크'인 페이즐리 무늬는 고대 인도 시대 직물에서 유래됐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에트로가 매우 오래된 기업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에트로 역사는 40년에 불과하다. 명품 브랜드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젊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에트로는 당당히 명품 반열에 올라서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명품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저는 '명품(lusso)'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요. 좋아하지도 않고요. 요새 말하는 명품은 마치 아랍 석유회사 사장이 과시해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 정도로 해석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진정한 명품이라는 건 패션을 넘어서는 거예요. 제품에 혼을 담아 소비자에게 물건이 아닌 꿈을 선물하는 거지요. 사람들 인생에서 채워지지 못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거예요.

-그래도 40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소비자에게 '꿈'을 심어주긴 어려울 텐데요.

▶에트로만의 하이 퀄리티를 보여주면 소비자도 반응합니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직접 관리해요. 디자인, 생산에서 출고, 매장 관리까지 모두 관여합니다. 아웃소싱은 전혀 하지 않아요. 물론 시간과 노력, 돈이 많이 들어요. 기업이 커지면서 전 제품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것도 쉽지 않아졌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속성, 영속성을 제품에 부여하고 또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이 많이 갈 텐데도 타 명품 브랜드에 비해 가격은 비싸지 않은 편입니다.

▶나는 환상이 없어요. 명품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누군가는 살 거라는 건 환상입니다. 브랜드는 더 이상 가격을 유지시켜 주지 않아요. 생각해 봅시다. 여기 5000달러가 넘는 가방이 있어요. 다른 것과 차별화되고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제품이라면 분명히 누군가가 사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미 소비자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내고, 반면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버리거나 포기하지도 않아요. 적어도 합리적인 제품이라면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품의 질과 가격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지난해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에트로의 매출이 줄지 않은 비결이 이런 노력에 따른 결과겠지요.

◆ 새로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길을 걷다

= 최근 패션업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빠르게 유통시키는 의류인 패스트 패션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자라, H&M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금융위기를 겪으며 급부상했다. '명품은 저물고 패스트 패션이 뜬다'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그는 초연했다. '그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다는 당당함의 표현이었다. 패스트 패션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는 "예쁘지 않다"고 한마디로 선을 그었다.

-패스트 패션의 공격이 두렵지 않나요.

▶전혀요. 물론 그 제품들이 싸게 많이 팔리고 있지만 그들이 복사해서 만드는 제품들은 예쁘지 않아요. '퀄리티' 부분에서 특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들의 가격 정책은 그 질에 맞는 적절한 정책인 듯해요. 하지만 본질과 철학 자체가 다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화하는 부분에서는 무엇보다도 확실히 해야 하지요.

-하지만 대응은 해야 할 텐데요.

▶우리의 대응은 그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디자인을 베끼는 걸 최대한 막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가 우리 옷을 샀는데 자기랑 똑같은 옷을 입은 다른 사람을 보게 된다면 불쾌할 수 있지요.

-철저히 카피를 막겠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카피라는 건 항상 있어 왔고 남들이 우리 제품을 카피한다는 건 오히려 우리를 알리는 길일 수 있어요. 아예 감춰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죠. 다만 요새 우리는 패션쇼를 열 때 앞으로 내보일 제품 중 10%만 선보이고 있습니다. 어차피 100%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대신 90%의 제품에 대해선 철저히 보안을 유지합니다.

-소니아 리켈 등 타 명품 업체는 패스트 패션 업체와 연합해 제품을 내놓기도 하는데요.

▶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요. 철학이 다를 뿐이니까요. 하지만 제 철학으로는 맞지 않다고 봅니다. 진정한 명품은 협업을 하지 않아요. 일반 패션 브랜드는 옷을 디자인했다가 내일은 다른 걸 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명품은 세컨드 브랜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야코포 사장이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판타지'와 '퀄리티'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명품 철학이다. 너무 단순한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말은 단순할 수 있지만 제품을 샀을 때 차별화된 무언가를 소비자에게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주고 싶고 또 소중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에트로이며 이런 에트로가 되기 위해서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야코포 사장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국은 에트로가 1990년대 중반 진출한 이래 연간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을 보이며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시장 1위를 지키는 '효자'다.

10년 전부터 매년 두 번씩 한국을 방문하는 그는 '한국에서만 봤던' 삼성과 현대가 이제는 유럽에서도 널리 알려진 브랜드가 됐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쁘고 뿌듯하다고 전했다. 특히 삼성은 이미 유럽에서는 IT계의 '명품'이라고 극찬했다.

"사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고 나중에 또 사고 싶다는 마음을 준다면 그 제품은 이미 명품이지요. 10년 전 아무도 몰랐던 삼성은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누구나 사고 싶어 하는 제품을 파는 브랜드로 컸어요. 명품이 되려면 퀄리티와 디자인, 가격을 항상 동일 선상으로 올리는 체계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창조적 능력이 명품 패션업체들을 만들어 냈듯이 IT강국 한국에서도 많은 명품 IT기업들이 계속 나올 겁니다."

■ 야코포 에트로 사장은…

1962년 9월 22일생으로 에트로 창업주 짐모 에트로의 장남이다. 스위스의 명문 사립학교인 에이글론을 동생인 킨, 이폴리토와 함께 졸업했으며 런던대 사회과학대학에서 공부했다. 1982년 에트로에 입사해 현재 직물 파트를 총괄하며 가방을 포함한 여성, 남성 액세서리와 가죽 제품의 디자인, 생산, 홍보 등 경영 전반을 지휘한다. 아시아, 인도, 중국, 남미 등 세계를 여행하며 앤티크 직물을 수집하는 것과 사진, 조각을 포함한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