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요한 복음 - gatollig yohan bog-eum

1. 개 요

저 자

오랜 전승에 의하면 네번째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중 하나였던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를 첫번째로 언급한 이는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였는데 그는 180년경에 유명한 주교였었다. 이레네오의 이 언급은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이 언급이 사실인지에 대한 확인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언급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발견되고 있지 못하며 둘째로는 2세기경에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요한이 저술하였다는 데 대하여 여러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한가지 가능한 해석은 이 복음서가 복음서로써의 권위를 갖게된 그 연원이 사도 요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는 있으나 이 복음서 자체를 기록하고 편집한 것은 다른 사람일 것이리라는 가설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다음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이 복음서가 지닌 “사도적 권위”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을 친견했던 제자들의 증언이 복음서 원전과 기본을 이루고 있다.
(2) 사도들의 가르침을 교회발전에 따른 신학적 해석을 문자로써 기록한 복음 전파의 제자가 이 복음서 기록에 관여 했다.
(3) 복음서를 이룬 원전에 다른 여러 가지를 첨가하여 기록을 완성한 편집 제자가 있었다.

물론 이와같은 가설도 가설에 그친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일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복음서 자체가 저자를 명시하지 않는 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이리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요한사도가 세웠던 교회공동체들의 성장과정에서 오랜기간을 통하여 여러가지 전승이 전해져 왔고, 이 전승은 구어전승과 기록전승의 과정을 통하여 아마도 제 2대나 3대에 걸쳐 완성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여러 편집과 첨삭 가감이 이루어져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제 4대의 복음서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저술장소

저술장소 역시 저자처럼 확실치 않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장소는 에페소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요한교회가 성장한 지역은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라고 볼 때 이 또한 확실치 않다. 단지 요한신학과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냐시오의 신학이 유사한 점도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시리아에서 발견된 사료중의 일부에서 요한 복음서가 안티오키아에서 저술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긴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오늘날에 와서는 에페소가 저술장소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저술시기

저술시기 역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제베데오의 아들인 요한이 저자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꿈란 공동체의 여러 기록들과 이 복음서의 연관을 인정하고 있는 이들은 저술시기를 좀더 빠른 시기에 잡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 복음서가 희랍영향하에 기술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저술시기를 늦게 잡고 있다. 오늘날 파피루스 기록의 일부에서 이 복음서의 몇가지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2세기 전반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직은 이 복음서의 기록이 주후 90년에서 100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2. 제 4복음서와 공관복음서와의 관계

제 4 복음서를 쓴 “요한”(?)이 다른 공관 복음서를 접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이론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실로 미루어 요한은 마르꼬의 복음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루가 복음서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요한이 마태오 복음서를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놀라울 만큼 다른 복음서의 형태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90%이상이 다르다고 본다. 단지 몇가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데 예컨데 4:46-54절에 기록된 관리의 아들의 치유, 6:1-21에 기록된 물위를 건너신 다음의 빵을 많게 한 기적등이다. 이런 유사성보다는 다른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세례, 마귀를 쫓아낸 일, 엄밀한 의미에서 비유에 관한 이야기를 전연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중요한 종말의 임박성에 관한 언급이 전연 나타나고 있지 않다. 또한 사건기술의 순서에서도 전연 다른 틀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른 복음의 후반부에서나 나타나는 성전정화가 이 복음서에는 시작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예수님의 긴 가르침이 이 복음에서는 여러개로 배열되어 있다. 이 복음서 저자가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던지 모르고 있었던지 간에 다른 공관복음서를 참조로 기록한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데 이는 이 복음서가 전혀 다른 전승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이다.

3. 제 4 복음서의 구성

Ⅰ. 서론 ( 1: 1-51 )
1. 머릿말 ( 1: 1- 18 )
2. 증언 (1: 19- 51 )
a) 세례자 요한 (1: 19- 34 )
b) 제자들 (1: 35- 51 )
Ⅱ. 표징들 ( 2: 1 - 12: 50 )
표징 1 : 새로운 시작 ( 2:1 - 4:42 )
표징 2 :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 ( 4:43- 5:47 )
표징 3 : 생명의 빵이신 예수 ( 6:1 - 71 )
표징 4 : 신원에 대한 논쟁 ( 7:1 - 8:59 )
표징 5 : 세상의 빛 ( 9:1 - 10:42 )
표징 6 : 죽음을 이긴 삶 ( 11:1 - 54 )
표징 7 : 죽음을 넘어선 삶 ( 11:55 - 12:50 )
Ⅲ. 영 광 ( 13: 1 - 20: 31 )
고별사 ( 13:1 - 17:26 )
수난사화 ( 18:1 - 19:42 )
부활 ( 20:1 - 31 )
Ⅳ. 결어 :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 21: 1 -25 )

4.요한 공동체의 성장 단계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요한사도가 형성시키고 키워온 공동체가 어떤 단계로 성장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서는 바로 공동체의 삶을 투영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공동체는 대단히 특이하나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장과정을 밟았다. 요한 복음서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과정에 맞게 기록되었다.

(1) 선교의 단계

최초의 요한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집단으로써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교 회당중심의 생활을 했으며 유대교의 전통적인 유일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구약에 기록된 대로 받아들였으며 다른 유대인들과 별반 다른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가 예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성서의 약속된 바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고 믿고 있었다. 이 공동체의 가르침은 유대 전승속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인들이라고 생각했다(1.47).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 또한 유대교 회당의 삶 안에서 그들의 삶의 정황과 체험에 맞게 이루어 졌다.

이런 가운데에서 이들이 특징적으로 행한 활동은 예수님이 남겨주신 선교사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활동들이었다. 이 선교그룹들은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의 회당이나 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넘어뜨리고자 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예언자의 명확한 가르침에 자신들의 삶을 재조명하였을 뿐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예수님의 활동을 기술한 첫번째 여러 사건들에서 명확히 찾을 수 있다(1장). 여러 제자들이 선택되어 훈련과 양성을 받으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갔듯이 선교를 위한 제자양성은 이 공동체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 복음서 초반부터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나온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두 제자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한다(1:35-40).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쫓아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1:41-42). 또한 필립보는 나타나엘이 예수를 추종하도록 만든다(1:45-46).

사마리아 여인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이 여인은 시카르의 여러 사람에게 “와서 보시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라고 말한다(4:29-30). “그 고을에서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4:39). 요한 공동체는 예수님이야 말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1:45)이라는 사실을 유대인 회당에서 공공연하게 공언하던 공동체였다. 초기 단계에 요한 공동체는 이와같은 선교활동을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등 모든 이들을 향하여 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초기 요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사명을 복음화로 받아들여 이를 수행하는 공동체였으리라 생각된다.

(2) 공세적인 단계

요한 공동체는 이 단계에 와서도 지역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살던 공동체로 남아 있었다. 아직도 예수님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었으며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오면 더 이상 선교적인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더 과감하게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으며 유대교 회당을 통하여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유대교의 믿음을 부인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즉 이들은 다분히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예식이 유대교 예식을 대치할 수 있다고 보았고, 구약에 관한 해석도 유대교와 달리 하기 시작했으며, 예수가 모세와 구약의 여러 성조를 대체한 우월한 분이었음을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다양한 행태들은 그리스도 공동체 신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들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 단계에 와 예수님에 대한 새롭고도 다양한 신앙고백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다른 예언자이며 하느님이 맺으신 계약의 백성의 새로운 참된 지도자이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다른 어느 예언자들보다도 위대한 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분은 성조 야곱보다도 위대한 분이시며(4:12) 성조 아브라함 보다도(8:53, 56-58), 심지어는 모세 보다도 (1:17, 3:13-17, 5:36, 5:46, 6:31-32) 위대한 분으로 들어났다. 실제로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나 지도자를 넘어선 분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새로운 것을 계시하는 분이시며, 새로운 예배의 길을 여신 분이시며, 경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이었다.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4:21) 이란 말씀은 구약의 모든 경신례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말씀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행하던 축제의 행사도 교체되었다. 즉 구약의 유월절을 빵을 떼어 나누는 성체성사로 대체하셨다(6:4). “참된 빵”(6:32)이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주는 것으로 선언하셨다(6:33). 성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대체되었다(2:21).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참”이란 접두어는 유대교 회당 전통을 “거짓”으로 단정하는 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예컨데 예수님은 모든이를 비추는 “참”빛으로 서술되었고(1:9),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예배자들이며(4:23),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 서술된다(6:23). 또한 예수님은 “참”된 포도나무로 모든이들이 그 나무에 속한다(15:1).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3:5).
“만일 여러분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여러분 안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6:53).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배타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요한 공동체의 이 성숙 단계에서는 이러한 배타성이 강조된다. 즉 하느님의 생명과 그 나라에 속하려면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을 진취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즉 이런데에 속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분파화의 단계

요한 공동체가 점점 과격하고 거칠게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됨에 따라 예수님을 점점 더 천상적인 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유대교 회당의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로 요한 공동체는 두가지 뼈아픈 체험을 하게 되는데 회당으로 부터의 파문과 이탈자의 발생이었다.

ㄱ) 파 문
요한 복음서 여러곳에서 파문과 같은 뼈아픈 체험이 들어나고 있는데, 치유받은 소경이 예수님의 재판시에 예수님이 하늘로 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자 그를 “밖으로 쫓아낸다”(9:34). 이 소경의 부모는 이 골치아픈 사단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데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도록 합의 했기 때문이다”(9:22). 이 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공동체에 가입하길 원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드러나게 고백하지는 못하였다”(12:42)고 기록한 것을 보면 파문의 위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고별 이야기 가운데 이러한 위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추방할 것입니다”(16:2)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ㄴ) 이탈자
요한 공동체가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생겨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탈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후에 “이때부터 예수의 제자들 중 많은이가 돌아서서 물러가고 더 이상 당신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6)라는 귀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이들은 요한 공동체를 이탈한 이들을 말한다.

(4) 마지막 단계 : 요한의 편지

요한 공동체의 역사는 요한의 편지를 통하여 마지막 단계를 알 수 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의 요한의 편지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당으로부터의 파문의 단계를 거치면서 공동체는 내적 갈등으로 쓰라린 체험을 겪는데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과 신앙고백의 차이로 급격한 분리가 일어난다. 그 결과로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나왔지만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했다면 우리와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으례 들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1 요한 2:19) 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반그리스도” 라고 불리웠으며 (1 요한 2:18, 4:8, 2 요한 7) “거짓 예언자” (1 요한 4:1) “속이는 자” 들로 불리웠다. (1 요한 2:26, 3:7, 2 요한 7) 공동체의 몇몇 엘리트들의 탈퇴는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요한 1서에 나타난 공동체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공동체의 존립과 존속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체에 남아있는 이들 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 바로 하느님의 “자녀”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1 요한 3:1-2)

이런 형태로 요한 공동체는 공동체 외부로 부터 모든 것이 차단되고 격리되어 갔는데, 이는 결국 “세상” 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세상 것을 사랑해서는 아니되게 되었다. “세상도 또한 그안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마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 요한 2:15) 요한 1서의 기저를 이루었던 생각은 비록 이탈자와는 다른 충성스러운 공동체원일지라도 예수님의 성혈을 필요로하는 죄인이었기에 용서를 구해야 했었다. (1 요한 1:8, 2:2) 그들은 예수님이 육화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다른 이탈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했다. (1 요한 4:2) 그들은 또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이탈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했다. (1 요한 4:20) 뿐만아니라 이탈자와는 달리 물과 피와 성령이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1 요한 5:6-10)

이렇게 네 단계를 거쳐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의 신학을 정립해왔으며 이 내용은 네째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렇기에 네번째 복음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네단계의 신학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5. 네째 복음서 해설

1) 서 론

서론 부분은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릿말 (1:1-18)과 증언 (1:19-51) 부분이다.

ㄱ) 머릿말(1:1-18)

이부분은 복음서의 머릿말 부분으로 복음서가 대략 쓰여진 다음에 편집과정에서 모두가 기록 삽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복음서의 핵심적 주제들을 종합 정리 요약한 신학적 논제들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생명 (이복음서에서 36번이나 기록), 빛 (23번 기록), 어두움, 증언 (14번 기록), 증언하다 (33번 기록), 세상 (78번 기록) 등의 용어가 이 머릿말 부분에 등장한다. 그래서 머릿말은 복음서 전문을 읽고난 다음에 종합 정리 요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어떤 성서 학자는 이 부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노래 형태를 따라 구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노래나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주년 기념 성서의 번역 참조)

ㄴ) 증언(1:19-51)

이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 (1:19-34) 부분과 저자로 알려진 요한의 증언으로 명시된 (1:34)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 (1:35-51)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증언 부분에서 중요한 귀절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1:19) 와 제자들의 세 증언, 즉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다” (1:41),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을 우리는 만났다” (1:45), “랍비, 랍비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1:49) 라는 증언 들이다. 이를 다시 상세히 보자.

세례자 요한의 증언 (1:19-34)은 세례자 요한이 “당신은 누구요?” 라는 제관들과 레위지파 사람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요” 라는 답변으로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의 답변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이라는 사실을 들어낸다. (4:26, 6:20등) 이렇게 보면 네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보다는 높은 분 이시라는 사실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공관복음서와 같은 입장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을 이사야서 40:3 을 인용하여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요” 라고 답변한다. (1:23)

세례자 요한은 또한 요르단 강 건너편 쪽에서 물로써 참회의 셰계를 베푸는데 (1:26)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세례와는 다른 세계이다. 이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행적은 앞으로 오실 그 분과는 전연 다른 행적을 남긴다. 오실 그분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못한 자로 자신의 신원을 밝힌다. (1:2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1:29) 으로 부르는데 이 말은 구약의 대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 중요한 선언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로서 신원이 밝혀진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베푸실 세례와는 다른 세례라는 사실도 밝힌다(1:33).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이 머무르시는 분으로 두번씩이나 반복 언급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때가 될때 이 사실은 명백히 입증된다(7:39, 19:30 참조). 이 부분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증언의 내용들이다.

다음 부분은 제자들의 증언이다( 1:35 - 51).
우선 안드레아와 다른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공적 증언을 듣고 예수님과 합류하는 과정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1:37).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1:39). 이 과정은 따라가서, 보고, 함께 지내는 것으로 서술된다. 베드로는 동기였던 안드레아의 안내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이때 베드로는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고 이는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표현된다.(1:42)

필립보는 직접 예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는다(1:43-44). 이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안내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나타나엘은 의심이 많은 이로 서술이 된다. 이에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구약의 야곱,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교하신다. 나타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필립보가 소개하기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한다. 무화과 나무 아래 서 있었다는 표현은 메시아가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타나엘로 하여금 자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고 이를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로 비유하여 설명한다(1:51, 창세기 28:12 참조)

네째복음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대략 말하자면,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사명과 수난 그리고 죽음과 일치되고 있다. 첫째 부분은 일반적으로 표징들(2:1-12:50)로 일컬어지는데 네째복음서에 보고된 일곱가지 표징(기적)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분은 때로 수난의 책으로 불리우기도 하지만 당신의 고별사,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13:1-20:31)로 구성되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일반적인 명칭인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은 원래 20 : 30 - 31절로 끝나는 원문에 덧붙여진 부록으로 알려져 있다.

2) 표징들 ( 2: 1 - 12: 50 )

구 조
네째복음서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어떤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2:1-11)의 이야기(이야기란 예수께서 뜻하신 어떤 사건의 서술을 의미한다)와 성전정화(2:13-21) 이야기가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와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4:1-42)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어 관리의 아들의 치유이야기(4:46-54)와 베짜타 못의 어떤 사람의 치유이야기(5:1-18)가 나오고 이들 이야기들은 생명과 심판에 관한 말씀(5:19-47)으로 이어진다. 또 빵의 기적(6:1-15)과 물위를 걸으신 이야기(6:16-21)후에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6:22-71)이 나온다.


이처럼 요한복음 2 - 6장에는 이야기와 말씀의 형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성서학자들은 이 표징부분의 구조를 설명할 때 이야기와 말씀의 형태를 한 단위로 간주하고 이를 ”일화“라고 부른다.

일화란,
(1) 이야기와 이어지는 말씀(담화)으로 이루어지는 한 구조단위이다 ;
(2) 이야기와 말씀은 기본적인 주제를 지니고 있다(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잔치, 성전 정화 그리고 니고데모.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 모두는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치시키는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다) ;
(3) 이야기와 설화는 서로 보완적인 것인데, 이야기 밑에 흐르는 신학은 말씀에서 신학적으로 발전된 것이며, 말씀에 나타난 신학은 이야기속에서 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
(4) 말씀은 대화로 시작될 수 있으며(예 3:1-10), 이 대화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슬그머니 독백으로(3:11-21)발전하고 이어 끝말(3:22-36)로 마감된다 ;
(5) 각각의 일화는 어떤 의미로 독립된 단위 즉 소(小)복음이라 할 수 있으니, 참조하는 형식으로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당신 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2:17-라는 첫번째 일화는 예수의 죽음을 그리고 2:22절은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
(6)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일화는 모두 ”연결말“ 혹은 ”고리말“을 갖고서 복음서 전체에 걸쳐 다른 일화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영“이란 말이 1:32.33 ; 3:5 ;4:23, 24 ; 7:39 ; 19:30 ; 20:22절에 모두 나오고 있다.
그러면 요한 복음서 첫째부분에 나타난 일곱가지의 표징들을 살펴보자.

표징 1 : 새로운 시작 ( 2 : 1 - 4 : 42 )

☆ 가나의 혼인잔치(2:1-11)이야기에서 예수는 때가 왔을 때 낡은 것을(물이 가득찬 항아리로 상징된다) 포도주로, 새로운 질서의 좋은 포도주로,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선물로 대치시킬 것이다(마리아는 이 이야기에서 중개자로 등장하지 않고 하느님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여성-으로 나타난다).
☆ 성전 정화 이야기(2:13-21)에서 우리는 낡은 예배장소인 성전이 새로운 경배장소인 ”몸“,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뀔 것임을 깨닫게 된다.
☆ 니고데모와의 대화( 3:1-21, 22-36 )는 낡은 생활양식이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암시한다. 이 새로운 생활양식은 너무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탄생과 비교되며,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의 원칙과 ”물과 성령으로“ 의 원칙들은 세례와 계속되는 신앙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4:1-42)도 역시 낡은 것, 야곱의 우물, 이스라엘의 조상은 ”살아있는 물“, ”영원한 생명의 원천“, 다시 말하자면 영원하고도 거룩하신 생명이신 분의 생명으로 대치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성전의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 즉 성령의 힘으로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는 예배, 그리고 그들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반영하는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

표징 2 :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 ( 4 : 43 - 5 : 47 )

☆ 관리아들의 치유이야기 (4:46-54)에서 예수는 거의 죽게 된 한 소년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으로 살리신다. 이 이야기는 또한 신앙의 성장을 의미한다. 즉 기적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한 존재의 전인격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신앙으로 발전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
기라고 하겠다.
☆ 베짜타못 병자의 치유(5:1-18)에서 예수는 살았다고 할 수 없는 목숨을 38년동안이나 연명해온 한 사람을 고치신다. 다시한번 이야기는 예수의 말씀에 의한 치유와 그 말씀에 대한 그 사람의 전적인 복종을 표현하고 있다.
☆ 이어지는 담화(5:19-47)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생명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일 뿐만 아니라 부활한 생명(5:21, 28),즉 최후의 심판 때에 선인에게 내려지는 생명임을 알게 된다. 이같은 예수의 주장은 세례자요한(5:33-35)과 하느님의 증언으로 지지되며, 예수의 행적(5:36)과 성서의 말씀(5:39)으
로 더욱 확실해 진다.

표징 3 : 생명의 빵이신 예수 ( 6 : 1 - 71 )

☆ 빵의 기적이야기(6:1-15)는 해방절 때에 이루어지고 있다. 모세같은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신명 18:15) 예수께서도 산에서 빵을 군중에게 주셨고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구세주/왕의 역할을 거절하였다(수난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기념할 때 어떤 의미로 그분을 왕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 빵의 기적이 끝난 후 다른 표징을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물위를 걷는(6:16-21) 또 하나의 표징을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8:24, 58 ; 13:19 ; 18:5) “나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구약의 “나는 있는 자 그대로이다”(출애굽 20:5 ; 신명 5:5-9 ; 이사 43:10 ; 44:6)라는 구약의 하느님의 거룩한 계시를 상기시켜준다.
☆ 생명의 빵에 관한 대화(6:22-59)에서 예수는 출애굽동안에 모세가 하늘에서 생명의 빵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지금 예수를 통하여(6:26-34) 그 빵을 주고 계신다고 설명한다. 예수자신이 진정으로 생명의 빵(6:35-50)이다. 대화의 마지막 부분(6:51-59)은 먹고 마시는 형식의 성찬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여 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를 떠나갔으나(6:60-65),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의 참된 신원을 고백(6:66-69)하였으며, 군중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마지막 구절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일치되는 것 같다(마르 8:27-30).

표징 4 : 신원에 대한 논쟁 ( 7 : 1 - 8 : 59 )

☆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신 친척들의 요구를 첫번째로 거절하신 후 초막절기를 지내기 위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말해준다(7:1-13).
☆ 이어지는 말씀(7:14-8:59)은 예수의 신원에 관하여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벌이는 7가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논쟁들은 간음을 행한 여인의 이야기 때문에 (7:53-8:11) 중단되는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초기의 네째복음서기록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원래 네째복음서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일곱가지 대화는 또한 예수가 생명이시며(7:37-39) 세상의 빛98:12)이심을 설정하고 있다. 이 두가지 확인은 초막절 축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여성의 회당에는 불이 놓여 있고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와 제단에 붇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4:13-14 ; 7:37- 38)

표징 5 : 세상의 빛 ( 9: 1 - 10 : 42 )

☆ 태생소경의 치유이야기(9:1-12)는 시험을 받는 장면으로 확대되는데, 두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회당의 장면(9:13-23과 9:24-34)이 나온다. 앞을 보게 된 한 사람(9:5)은 사람들이 노리고 있었던 예수의 행위를 사실 그대로 증언한다. 마지막에 우리는 외모가 어떻든지간에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 때에는 예수가 심판관이시고 지도자들이 심판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9:35-41). 요한복음 9장의 주요주제는 빛과 심판이다.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10장으로 이어진다.
☆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10:1-21, 22-42)은 출애굽 34장(이스라엘의 지도자/목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배경과 달리 예수는 당신이 착하신 분이며 당신 백성의 참 목자라고 강조하심으로써 성서적 의미의 지도자상을 만들어내신다.

참다운 지도자는 ㉠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10: 11, 17), ㉡그의 백성을 “알고”,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체험에 참여하며(10:15) 그리고 ㉢참다운 일치를 가져온다(10:16).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 (10:28)을 줄 것이다. 이 생명의 주제는 다음의 일화로 이어진다(요한 11장).

표징 6 : 죽음을 이긴 삶 ( 11 : 1 - 53 )

이 이야기와 말씀의 일화는 밀접하게 짜여져있다. 이 이야기는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마르 5:21-24, 35-43). 여기에다 대화가 덧붙여져서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의 신학적의미와 암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라자로의 부활이야기는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가 점점 더 얻게 된 명성 때문에 산헤드린(최고회의)에서의 만남은 긴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1:45-53). 가야파는 논쟁을 서두를 것을 호소하고 있다(11:50). 이제 논쟁은 “국가안보”에 관한 것이 되었다. 산헤드린은 자신의 안보를 위하여 두려움에 가득차 행동하고 있다(그리스어 원전에서는 더 이상 산헤드린을 거룩한 곳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산헤드린은 권력의 장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 위치에 대한 두려움을 빌라도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면 곧바로 그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19:12-16). 요한사가는 권력자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백성을 억압하고 박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이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은 마침내 시작되었고, 그러므로 2:4 ; 7:30 ; 8:20절의 내용과 달리, 복음사가는 이제 “때”가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12:23 ; 13:1)

표징 7 : 죽음을 넘어선 삶 ( 12 : 1 - 50 )

☆ 베타니아에서의 향유 바름 이야기(12:1-11)는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나온다(마르꼬 경우는 입성후에 나온다). 이것은 향유 바름(“구세주”는 “향유바름”을 의미한다) 이 예수의 개선적인 입성을 위한 준비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장례 준비로써 예수의 발을 향유로 씻긴 마리아의 예언적 행위도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죽음과 묻힘을 통하여 구세주로서의 영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예루살렘의 입성이야기 (12:12-15)는 즈가리야 9:9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보라 네 임금이 오신다... 암나귀의 새끼나귀에 겸손되이 올라 앉으시어...”. 그러나 이사실은 부활후에야 비로서 이해되었다(요한 12:16-19).
☆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리스출신의 유대인들에게(12:20-22) 예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12:23-26)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리고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을 내어 맡기신다(12:27-28). 그러자 “하늘로부터 목소리” 가 응답한다(12:28b-30). 수난은 세상에 대한 심판, 세상과의 대립으로 간주되며 여기에서 창조계획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3:16-17에서는 그렇게 언급되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으로 언급되고 있다(12:31).
☆ 표징부분의 정리-요약 (12:37-50). 여기에서 복음사가는 예수의 사명에 관한 두 가지 정반대의 응답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 이사야
53:1과 6:10절에 나오는 사람들과 믿었던 또다른 많은 사람들(12:37-43)을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예수의 메시지는 총정리되어 잘 요약된다(12:44-50).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표징들에 나타난 일곱가지 주제와 그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은 이야기와 말씀으로 잘 요약되어 있다고.

3) 영 광 ( 13 : 1 - 20: 31 )

네째복음서의 두번째 부분과 첫째부분인 표징을 비교해 보면,

☆ 두번째 부분에서도 같은 요소들, 즉 이야기와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으니,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 표징에서는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말씀이 잇달았으나, 두번째 부분에서는 먼저 긴 말씀-말씀들-(13:1-17:26)이 있고 다음에 긴 이야기(18:1-20:31)가 나온다. 이렇게 순서가 바뀐 이유는 명백하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먼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난후에 그의 고별사를 말했다고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부분과 똑같은 “논리적”관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즉 수난과 부활이야기의 신학적의미들은 고별말씀에서 거의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표징 부분에서는 7번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말씀이 있었지만, 두번째 부분에서는 오직 한번의 이야기와 말씀이 있다.

㈀ 고별사 ( 13 : 1 - 17 : 26 )

14: 31의 “자, 일어나 가자”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의 전통적인 역사인데 아마도 18: 1의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나아가셨다”는 구절이 곧바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5-17장은 후에 삽입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13:31-14:31과 15:1 -16:33을 예수의 고별사에 관한 두가지 변형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17장은 아마도 15:1- 16:33과 함께 삽입되었을 것이다.

* 발을 씻기심 ( 13 : 1 - 30 )

발을 씻기시는 행위는 고별말씀을 하기위한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발씻기는 예식에 이어 베드로와의 대화(13:6-11)가 나오고 이 대화는 발씻김이 겸손의 표양(13:15)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 그때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이 일어난 후(13:7) 이해할 의미, 즉 발씻김에 참여하지 않으면 나눌 수 없는(13:8) 그런 의미를 갖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겉옷을 벗고”(13:4) 발을 씻고나서 “겉옷을 입고”(13:12) 같은 표현, 그리고 목자가 목숨을 바치고 다시 목숨을 얻게 되는(10:17-18)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의 떠남과 돌아옴 ( 13 : 31 - 14 : 31 )

절박해진 이별앞에서 예수는 이제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새로운 계명을 참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13:31-38).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간 후 어떻게 그들안에 계속하여 자신이 현존하는가를 설명하며(14:1-5) 제자들을 위로한다. 그리고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14:6-11)임을 말한다. 그가 떠난 후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었다(14:12-14). 또한 서로의 사랑에 의하여 그들 가운데 현존하는 예수를 드러내야 할 것이었다(14:15-24).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이 주관하실 것이었다(14:25-26). 만약 그들이 예수가 떠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기뻐할 것이었다(14:27-31).

*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에 관한 대화 ( 15 : 1 - 16 : 33 )

예수와 그의 공동체간의 살아있는 일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15:1-11). 또한 이 일치는 제자들을 박해하는 세상의 증오 앞에서(15:18-16:4)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으로(15:12-17) 표현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대화는 성령의 일하심에 관하여 전개된다(16:5-15). 성령의 필요성을 설명한 후(16:5-7) 대화는 세상을 향한 성령의 사명과(16:8-11) 제자들에게 미치는 영향(16:12-15)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이어 다가오는 이별의 주제로 돌아가(16:16-24), 커다란 슬픔이 있겠지만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니, 그 슬픔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라고(16:25-33)한다.

* 예수의 기도 ( 17 : 1 - 26 )

먼저 예수는 아버지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달라고, 다시 말하면 예수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가 당신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표현하시라고 기도한다(17:1-5).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17:6-19) 그들의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간구하며(17:6-10), 세가지 청원을 바라고 있다 :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17:11); ㉡“그들을 악마에게서 지켜주시기를”(17:15); ㉢ “그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바치는 사람이 되도록”(17:17). 마지막으로, 예수는(후에 나타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즉 사도들의 말을 통하여 그를 믿게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17:20-26) 기도하는 것이다.

㈁ 수난사화 ( 18 : 1 - 19 : 42 )

수난이야기는 매우 조심스럽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

① 체포와 “산헤드린에서의 재판”(18:1-27) ; ②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18:28-19:16) ; ③ 십자가 처형, 죽음 그리고 묻힘(19:17-42)이다. 공관복음의 수난사화와 비교할 때 요한복음 18 : 1 - 19 : 42절은 산헤드린의 재판에는 극히 짧은 부분을 할애하나 ( 18:19-24절은 산헤드린전체의 공식적인 심문이 아니라 안나스에 의한 사적인 심문으로 묘사되고 있다), 빌라도의 재판은 요한수난사화에 있어 핵심부분으로 더 발전되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빌라도는 또한 세속세계를 의미하는데,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이미 시작하고 있는(12:31) 예수와 갈등관계인 산헤드린보다 덜 잔혹한 상대이다. 전 수난사화 중심에는 왕권 혹은 구세주의 권한에 관한 문제가 놓여있고(18:33-40 ; 19:14-15), 이 주제는 수난사화 시작과 끝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난사건 전체의 핵심주제인 것 같다.

① 체포와 심문 ( 18 : 1 - 27 )

예수의 체포(18:1-11). 공관복음서와 달리, 네째복음서에는 고뇌의 장면이 없다. 복음사가는 이미 12:27절에서 이를 언급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로 온 것이다.“ 체포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복음사가는 예수가 자신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래서 사건들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18:4).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체포를 피할 수도 있었다(18:4-7). 그리고 제자들의 운명도 마음대로 처리해버릴 수 있었다(18:8-9)

안나스의 심문; 베드로의 부인 ( 18 : 12 - 27 ). 공관복음과 달리, 네째복음서에는 산헤드린에서의 장면이 없다. 예수는 안나스의 심문을 받는데(18:13-14, 19-23), 안나스는 그를 대사제 가야파에게, 이어 산헤드린에 보내는데(18:24), 그곳에서 예수는 총독관저로 끌려가 빌라도앞에 선다(18:28). 예수는 요한복음 5장부터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에게 계속 심문을 받는데 독성죄가 처음으로 5: 18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7: 47-52절의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란“ 장면에서 예수의 구세주 주장은 거부당하고, 이미 산헤드린 재판의 초기부분에서 판결을 받은 셈이다(11:47-52).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명(1:28 -10:40)도 이미 끝난 것이다. 안나스의 심문은 베드로의 부인사화에 의해 틀이 잡히고 있다(18:15-18 그리고 18:25-27)

②빌라도의 재판 ( 18 : 28 - 19 : 16 )

빌라도앞에 예수의 출현은 왕관을 씌우는 장면과 매질하는 장면의 두부분으로 나뉘어진다(19:1-3). 그리고 빌라도의 전 재판과정은 7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관저바깥(18:29, 38 ; 19:4, 13)과 관저안의 장면(18:33 ; 19:1, 9)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a.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려가다 ( 18 : 28 - 32 )
b. 빌라도가 왕권에 관하여 예수를 심문하다 ( 18 : 33 - 38a )
c. 바라바 사건 ( 18 : 38b - 40 )
d. 매질과 가시관 씌움 ( 19 : 1 - 3 )
e. 자, 이 사람이다 ( 19 : 4 - 7 )
f. 다시 시작된 심문과 권력에 관한 대화 ( 19 : 8 - 11 )
g. 왕은 카이사르밖에 없다 ( 19 : 12 - 16 )

십자가처형에 바로 앞서 행해진 매질은(마르 15:15) 이 요한복음에서는 의도적으로 빌라도의 재판 중심장면에 들어와 있고 따라서 전 수난사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매질장면이 왕이나 황제취임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권/구세주권은 요한 수난사화의 핵심주제이다.
재판 끝장면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심판의 자리(돌 깔아 놓은 자리)에 앉았다“(19:13). 그런데 이구절은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나와 심판의 자리에 앉게 했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세상의 심판“에서(12:31) 예수는 사람들에게 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심판관처럼 조용히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③ 십자가처형, 죽음 그리고 묻힘 ( 19 : 17 - 42 )

십자가 처형과 죽음(19:17-30). 아버지의 사랑하는 외아들이며 또다른 이사악인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19:17). ”나자렛의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는 히브리, 라틴, 그리스말로 씌어져서 모든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은 예수의 왕권에 대한 마지막 침묵의 선언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극심한 반대를 받게된다. 시편 22:18절의 표현대로, 예수의 옷은 병사들이 나누어 가졌고, 솔기가 없는 그의 옷들은 예수의 공동체의 일치를 상징하거나, 대사제의 옷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구세주는 ”그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느님의 백성,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에게 맡긴다(19:25-27). 예수의 구원적인 사명은 이제 완성된 것이다(19:28). 이어 복음사가는 시편 22:15(갈증)절과 69:21절(신 포도주)을 통합시킨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아버지께 내어 맡긴다(19:30).

예수의 묻힘 ( 19 : 31 - 42 ). 이 부분은 ”과월절 준비일“(19:31,42)을 언급하며 틀을 잡는다. 예수가 이미 죽었으므로 병사들은 다리를 꺾지 않았고(과월절에 쓰는 양들의 뼈를 꺾지 않는 관습의 암시인 것 같다 -19:36 참조)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나왔다는 표현은, 예수가 진짜로 죽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19:34). 이어 저자는 이 모든 사건이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증언에 근거한다고(19:35) 독자에게 확신시킨다. 요한복음 19 :36- 37절은 출애굽 12:46절, 민수 9:12절, 즈가리아 12:10절(그리고 시편 22:16)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어떤 다른 사람의 무덤에 묻혔으나 (이사 53:9 참조), 두사람의 유대지도자,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하여 왕의 매장예식의 대우 (많은 향료등)를 받는다.

㈂ 예수의 부활 ( 20 : 1 - 31 )

요한의 부활묘사는 두 이야기씩 짝을 지어 이루어지고 있다. 첫번째 두 이야기는 무덤가에서 일어났다. 즉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20:1,2-10), 그리고 막달라여자 마리아에게 출현(20:11-18)하신 이야기이다. 또다른 두 이야기는 식사때에 일어난다.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고(20: 19-24) 다음으로 같은 그룹에 나타난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도마가 함께 있다.(20:24-29). 20:8,17,21-22절에서 발견되는 신앙에 관한 언급은 사랑받던 제자와 대조되는,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다. 20:30-31절이 원래 요한복음의 끝부분이므로, 이 복음에 나타난 독자들과 미래의 신앙인들에게 하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라는 구절이다.

* 베드로와 다른 제자 ( 20 : 1 - 10 )

수의의 모습과 위치에 관한 조심스런 묘사는 무덤에 누가 훔치러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체가 그곳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결과로 사랑받던 제자는 “보고 믿었다”(20:8 ; 참조 1:18,34,46 ; 2:11 ; 9:36-41 ; 20:29).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베드로의 신앙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복음사가는 아마도 오로지 깊은 사랑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믿음으로 이끈다고 제시하는 것 같다. 이처럼 빈 무덤을 맹목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지지 않는 것이다.

* 막달라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 20 : 1, 11 - 18 )

시체를 보러 무덤에 갔던 막달라여자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몰두해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눈앞에 서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10:27참조) 마리아는 그를 알아 보았고, 예수는 그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새로운 관계, 고별사에서 언급되었던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라고 말한다(14:18-21). 이 관계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이미 시작된 관계이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제자들과 예수의 형제들에게 알릴 것이었다(20:17). 부활에 관한 참 신앙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고 신체적 모습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20 : 19 - 23 )

이 구절은 예수가 닫힌 문을 통하여 들어온다든가 벽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참조 14:18-23,28 ; 16:16,22)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야기는 네가지 점을 강조하는데, (a) 평화의 인사(20:19) ; (b) 사도들의 파견(20:21) ; (c) 성령의 선물(20:22) ; 그리고 (d) 죄를 용서하는 권한(20:23)이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도마 ( 20 : 24 - 29 )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주장했던 대로 정확하게 그의 육체적 부활을 직접 시험해보도록 초대하며, 그에게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인이 되라고 도전한다. 도마가 그의 동료제자들의 증언을 믿었어야 했다는 것을 이 구절은 암시하고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 - 복음의 독자들이나 미래의 신앙인들을 소위 복되다고 일컫는다(20:29).

* 마무리 ( 20 : 30 - 31 )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의 복음을 위한 자료들을 선택하면서 한가지 기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그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료가 신앙을 갖게 하거나 심화시키는데 특히 도움이 되는가 하는 기준이다.

4) 결어 (結語) 갈릴레아에 나타나심 ( 21 : 1 - 25 )

네째 복음이 20:30-31에서 끝난후 얼마 지나서, 그러나 최종적으로 사람들에게 주기전에 한 편집인 (혹은 어떤 그룹이?) 이야기를 더 보충하고 독자들이 가질 어떤 질문들, 예를들면 베드로의 처지와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와의 관계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덧붙이기로 결정했음에 틀림없다.

☆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21 : 1 - 14 )

제자들, 혹은 사람낚는 어부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15:5참조) 사람들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쳐서 고기를 듬뿍 낚게 되는데, 이런 표징은 사랑받던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는 표징이다. 153마리의 물고기는 그들 사명의 완전하고도 보편적인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고나서 제자들은 주님이 그들을 위해 마련한 식사(성찬례)로 초대된다. 식사가 다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마리 가져오라고 한다(사명과 성찬례의 연결을 의미한다?)

☆ 예수, 베드로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 ( 21 : 15 - 23 )

세번 되풀이되는 질문과 대답(세번의 부인과 비교되는)에 의하여 베드로는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떼를 돌보라는(21:15-17)사명까지 받게 된다. 이어지는 구절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으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인 “나를 따르라”(21:19)는 13:36절에 관한 암시인 것 같다. 즉 “너는 지금 나를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이제 베드로는 예수를 참으로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사랑받던 제자의 앞날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분명히 오해되고 있는데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즉, 그 사랑받던 제자는 이 글들이 씌어질 때 이미 죽었음이 분명하다.

☆ 두번째 결어 ( 21 : 24 - 25 )

24절은 20:30절에 따라 요한공동체가 그 전통을 사랑받던 제자로부터 이어 받았다고 지적한다. 또 20:31절을 따라 25절은 복음이 선택적인 것으로, 예수의 삶에 관한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에 별반 관심이 없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중요 요점

☞ 요한 복음서의 저술시기는 주후 90년에서 100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 90% 이상이 다르다. 즉 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세례, 마귀를 쫓아 낸 일등 비유에 관한 이야기나 종말의 임박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 시작부분에 성전 정화가 나타나는 것도 다른 틀인데 이러한 차잇점들로 미루어 요한 복음서가 공관복음서를 참조했다기 보다 전혀 다른 전승을 참조했다고 볼 수 있다.
☞ 요한 복음서의 이해를 위하여 먼저 요한사도가 형성시키고 키워 온 공동체의 성장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최초의 요한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가 예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 역사와 성서의 약속된 바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특징적으로 행한 활동은 예수님이 남겨주신 선교사명을 이룩하려는 활동들이었다. 따라서 선교를 위한 제자양성은 이 공동체의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요한 복음서 초반부터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나온다. 그리고 이 선교활동을 유대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등 모든 이들을 향하여 했다.
☞ 두번째 단계는 더 이상 선교적인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더 과감하게 예수를 선포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믿음을 부인하는 공세적인 단계가 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등 예수님의 여러 말씀은 배타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요한 공동체의 성숙단계에서는 배타성이 강조된다. 즉 하느님의 생명과 그 나라에 속하려면 예수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다.
☞ 세번째 단계는 분파화의 단계로써, 요한 공동체가 점점 더 과격하고 거칠게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함에 따라 두가지 뼈아픈 체험, 즉 유대교 회당으로부터의 파문과 이탈자의 발생이었다.
☞ 마지막 단계는 요한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회당으로 부터의 파문의 단계를 거치며 요한 공동체는 내적갈등, 즉 예수님께 대한 다른 생각과 신앙고백의 차이로 급격한 분리를 겪게 된다. 공동체에서 몇몇 엘리트들이 탈퇴하였고, 공동체에 남아있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라고 표현되었다(요한 1서)

이런 형태로 요한 공동체는 외부로부터 모든 것이 차단되고 격리되어 갔는데 이는 결국 “세상“으로 부터의 격리를 의미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화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형제를 사랑하는 것, 남아있는 공동체원 모두가 예수님의 성혈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기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 이러한 네 단계를 거쳐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의 신학을 정립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요한 복음서이다.
☞ 요한 복음서는 머릿말과 증언으로 구성된 서론(1장), 일곱가지 일화들로 구성된 표징들(2-12장), 고별사 수난사화 부활로 이루어지는 영광(13-20장), 그리고 갈릴래아에 나타나시는 예수(21장)를 묘사하는 결어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마감하며 - 결론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설교가들은 (복음전승의 두번째단계) 그들의 청중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는 방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청중들의 필요에 따라 해석하였다. 즉 그들 청중들의 마음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사가들도(복음전승의 세번째 단계)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였다.” 복음사가들은 다른 순서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연결시켰고, 말씀의 원래 의미를 간직하면서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받고 전하는 과정을 우리는 전승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전승이란 단어를 들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항상 이래왔고 그러니까 항상 이렇게 남아있어야 해.“ 이런 생각은 전승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전승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승은 종이로 포장된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며, 보통 생각하듯이 내용이나 포장 모두가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변화되어야 한다! 메시지를 받으면서 또 전하면서 그사이에 우리는 메시지를 인식하고 축적해야 하며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메시지를 전할 때는 우리가 그 메시지를 살아내는 방식도 함께 전해져야 한다. 이런 사실은 궁극적으로 종교에 대해 맹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과, 참다운 종교교육가.참다운 교리교육가사이에 차잇점을 드러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의 문제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확고한 지식없이 삶을 참으로 전달하는 것도 또 가능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예로니모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였다. ”복음에 대해 무지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복음에 대한 무지란, 복음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연구없이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복음의 역사적배경을 배우면서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것, 혹은 복음선교나 신앙쇄신은 자주 잘못 채택되고 고착된 자료를 맹목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자 한다면 그 선포가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삶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기있게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삶은 결코 질식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풍부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참사람되어 단행본,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네 개의 복음서가>, 헤르만 헨드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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