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사회 - guseoggi sidae sahoe

인류가 연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만 년 전이며, 이 시기부터 빙하가 물러간 약 1만 년 전까지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인류가 살아온 전체 역사의 거의 대부분은 구석기시대를 포함한 선사시대에 속한다.1)

구석기시대는 지질학적인 연구와 동·식물상의 연구를 바탕으로 각 시기마다 사용되어온 석기의 발전에 따라서 시기를 구분한다.

전기 구석기는 인류가 연모를 처음 사용한 시기부터 약 12만 년 전의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때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연모를 만드는 데 가장 초보적인 수준이었던 남쪽 사람 원숭이(Australopithecus)가 찍개를 만들어 썼으며, 그 뒤 약 100만 년 전쯤에 곧선사람(Homo erectus)이 출현하면서 더욱 발달되고 다양한 연모들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중기 구석기는 마지막 빙기의 중반까지인 약 12만 년 전부터 3만 5천 년 전까지이다. 이때는 앞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석기 제작 방법에 혁신이 일어난다. 이 시기의 주인공인 슬기사람(Homo sapiens)은 매우 빠른 속도로 문화를 발전·진화시켜 왔으며, 당시의 여러 조건에 적응을 잘하였다. 이들이 만든 연모는 종류가 다양하고 훌륭한 석기를 만들었는데 주로 주먹도끼, 뚜르개, 찍개, 자르개, 긁개, 톱니날석기, 홈날석기 등이 있다.

후기 구석기는 빙하가 물러가는 시기로 약 3만 5천 년 전부터 1만 년까지이다.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이 나타나 앞 시기의 인류보다 수준이 높은 우수한 문화를 발달시키면서 새기개, 돌날, 돌날몸돌 등의 훌륭한 기술이 필요한 석기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사실적인 예술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환경의 제약을 많이 받으면서 살림을 꾸렸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이런 자연에 대한 적응, 이용, 정복의 여러 모습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자연환경은 빙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흔히 빙하시대라고도 부른다. 빙하의 영향으로 지구상의 온도는 앞 시기에 비하여 약 10℃ 정도 내려갔으며 북반구의 1/3 정도는 얼음으로 덮였다. 이런 빙하의 출현은 자연환경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동·식물군의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빙하는 또한 바닷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지형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바닷물이 얼음으로 바뀌면서 바닷물의 높이는 매우 낮아져 지금보다 130~160m쯤 내려가 물속이었던 지역이 육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중국대륙과 연결되었으며 동해에도 커다란 호수가 생겼다.

구석기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은 한곳에서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짐승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면서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일정한 범위 안에서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서 다녔는데 일시적으로 머물던 곳은 물줄기 옆이나 동굴 같은 비교적 조망이 좋은 곳이다.

구석기시대의 연모에는 돌을 떼어서 만든 뗀석기(打製石器), 짐승뼈나 뿔로 만든 뼈연모, 뿔연모, 나무로 만든 나무연모 등이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뗀석기이다. 뗀석기를 만든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석기 만들기에 좋은 돌감을 미리 골라 쓰임새에 알맞은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인류의 진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뗀석기는 나무를 자르고 베는 데 사용하였으며,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바르고, 뼛속의 골수를 빼먹는 데도 쓰였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 구석기 전통의 유물이 발견된 곳은 300여 곳이며, 이 가운데 60여 곳이 발굴 조사되었다. 또한 경기지역에서도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지금까지 50여 곳에서 구석기 전통의 뗀석기가 발견되었다.

여주지역에서는 최근 전역에 걸쳐서 광역지표조사가 실시되어 모두 5곳의 구석기유물 출토 지점이 보고되었다. 이 지역의 구석기유적은 남한강을 중심으로 강안에 연접한 구릉 위에 대부분 위치하는데, 주로 고기하성층과 그 위의 갱신세층(토양쐐기층)에 발달하여 있다. 강안을 따라 형성된 유적으로는 여주시 단현동에서 몸돌·여러 면 석기·찍개·톱니날 등이 나왔고, 능서면 왕대리의 영릉 뒤 갱신세 퇴적층에서는 격지가 수습되었다. 또한 남한강과 가까이 형성된 하안대지로 연결되는 능서면 내양리와 백석리에서는 찍개, 주먹도끼, 여러 면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여주지역에서 조사된 이러한 석기들이 출토되고 있는 퇴적 양상은 비교적 갱신세 층이 잘 발달된 한탄강 유역의 연천 전곡리·남계리, 파주 금파리·가월리 등과 남한강 유역의 양평 병산리와 비슷하여 주목된다.

그런데 주변의 양평과 충주, 원주 등지에서 구석기 전통을 지닌 뗀석기 출토지역이 많이 나와 남한강가에 위치한 여주지역에서도 앞으로 유적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최근 남한강을 중심으로 제4기 갱신세에 대한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단구(段丘)와 유물퇴적층이 발견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좁고 측면이 날카로운 석인을 이용한 도구제작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한반도에는 대체로 3만 5천년 전에 현생인류의 출현과 같은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시아에 현생인류가 출현한 것은 중국 남부의 마바유적의 경우에 적어도 6만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데 한반도에서는 출현 시기를 단정할만한 화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알려진 최고의 현생인류는 17만년 전에 이디오피아의 호르타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현생인류는 몇 차례의 확산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6만년 전에서 4만년 전후의 시기에 전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고 믿어진다. 현생인류는 돌날석기공작의 제작,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남부 지역에서는 돌날석기공작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지역적인 환경에 대한 기술적인 적응 과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후기구석기시대는 빙하가 최고로 발달한 시기에 해당되는데, 기후구분으로 MIS 3기와 MIS 2기의 시기에 해당된다. 빙하가 발달함에 따라 해수면은 하강하여 황해는 극성기에는 거의 육지화 되었고 해안선이 제주도의 훨씬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내륙호수로 남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한반도 주변 지역에서 인류나 동물의 이동이 쉬웠던 시기였다. 함경도 화대 장덕리유적에서는 매머드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한반도는 상당히 추운 기후였고 초원지대가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돌날은 간접타격법 등의 발달된 박리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양측 면이 날카로운 것이 보통이다. 이 석기제작법은 석재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위 석재 당 가장 많은 ‘사용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다. 이 돌날에 가압법으로 가공하여 기능적으로 분화된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후기구석기에는 석기뿐만 아니라 조각도를 이용하여 많은 뼈연모〔骨角器〕를 다듬고 있다. 후기구석기시대에는 고도의 박리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석재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쳐트(chert)와 같이 곱고 치밀한 밀도를 가진 석재들이 선호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후기구석기시대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다수의 흑요석재는 상당거리 운반된 것이다.

한반도의 후기구석기공작들은 크게 두 가지의 다른 계통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치밀한 석재를 이용하여 제작된 돌날석기들이 포함된 석기공작들과 석영이나 규암제 등의 거친 석재를 활용하여 만든 전·중기 이래의 격지석기 중심의 석기공작이다. 물론 석기의 구성에서 소형화되고 2차 가공이 두드러지는 등의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전통의 석기공작들이 있다. 이러한 두 계통의 석기공작은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혼재하고 있다. 그러한 혼재 현상은 동아시아 지역의 후기구석기시대의 주민이동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중국 남부 지역의 돌날없는석기〔無石刃石器〕공작을 가진 사람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돌날석기공작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한반도 지역에서는 혼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도구로서 긁개, 조각도, 부리형석기, 밀개 등의 소형석기들이 흔히 보이지만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서 슴베찌르개〔有莖尖頭器〕를 들 수 있다. 이 석기는 아마도 중기구석기시대에 시작되어 후기구석기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석기이며 후기구석기공작을 특징짓는 도구이다. 그리고 이 석기는 일본의 서부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이프형 석기의 조형으로 알려져 있다. 돌날몸돌으로는 쐐기형 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중에서 마주보는 양끝에서 중심을 향해서 박리작업을 한 돌날몸돌들이 있어서 기술적으로 내몽골 지역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후기구석기공작들은 1960년대 초에 발견된 석장리유적이 대표적이며 단양 수양개유적, 밀양의 고례리유적, 화천의 상무룡리유적, 순천 월평유적, 화순 신북유적, 홍천 하화계리유적, 굴포리유적의 상층 등, 전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후기구석기의 후반, 대체로 2만년 전에 이르게 되면 대단히 작고 정교한 돌날공작이 나타나는데 이를 좀돌날공작이라고 부른다. 좀돌날은 일종의 조합식 석기를 만드는 재료이며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좀돌날 제작은 크기가 작아서 나무 등의 기구에 끼워서 제작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좀돌날을 끼우기 위한 사전 조정작업들을 몸돌에서 볼 수 있는데, 쐐기형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원추형에 가까운 것도 보인다. 다양한 기술로 제작된 좀돌날이 나타나서 후기구석기시대의 말엽이나 신석기시대의 초엽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기공작들은 대체로 후기구석기의 상층에서 발견되는데, 동해시 기곡유적, 철원 장흥리유적, 화천 상무룡리유적, 순천 월평유적, 화순 신북유적, 전라남도 송광면 곡천유적, 곡성 옥과유적, 화순 대전리유적, 홍천 하화계리 사둔과 작은 솔밭유적, 남양주 호평동유적, 북한의 만달리 동굴유적 등에서 발견된다. 남쪽으로는 부산 지역의 해운대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이 시기에는 이미 한반도 전역의 다양한 생태환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좀돌날공작 역시 중국의 북부 지역과 한반도, 연해주와 일본열도에서 연속되고 있지만 황하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돌날석기공작과 같이 시베리아-몽골 기원의 북방석기공작기술로 볼 수 있다.

후기구석기문화는 한반도의 전역에 퍼져 있는데, 그 당시에 황해의 많은 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많은 유적은 바다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좀돌날석기공작은 후기구석기시대의 마지막 단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로 가압박리법으로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기법이 신석기시대 초기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미 갈아서 도끼를 만든 것이 보이는데 장흥리유적이나 신북유적에서 나오는 국부 간돌도끼〔磨製石斧〕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기존에 신석기시대의 도구라고 생각하던 기술로 만든 석기들이 이미 후기구석기시대에 사용되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