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 데쉬 전투 나무위키 - kam deswi jeontu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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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데시 전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에 일어났다. 2009년 10월 3일, 300명의 탈레반 부대가 아프가니스탄 동부 누리스탄 주의 캄데시 마을 근처에 있는 미군 키팅 전초기지(COP, Combat Outpost)를 공격했다.

역사[편집]

이번 공격은 2008년 7월 캄데시에서 20마일(32km) 떨어진 와낫(Wanat) 전투 이후 미군이 벌인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키팅 COP에 대한 공격으로 8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으며 탈레반은 1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결과 키팅 전초기지는 부분적으로 공격을 받아 거의 파괴될 뻔했다. 531–41 관측소("OP") Fritsche가 동시에 공격을 받아 해당 위치에서 사용 가능한 지원이 제한되었다. 연합군은 전투 직후 기지에서 철수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얼마 전에 의도적인 철수를 계획했으며, 폐쇄는 아프가니스탄의 최고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Stanley McChrystal) 장군이 원격 전초 기지를 양도하고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해 인구가 많은 지역에 군대를 통합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미국인들은 전초기지가 폐쇄되고 철수했다고 선언했다. 너무 빨리 철수해서, 저장된 탄약을 모두 소진하지 못했다. 전초기지의 창고는 남겨진 치명적인 탄약을 파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반군에 의해 즉시 약탈되었고 미국 항공기에 의해 폭격되었다.

조사 후, 지휘계통에 있는 4명의 장교는 기지를 적절하게 지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8명의 비행사는 기지 방어를 도운 공로로 공훈훈장을 수여받았다. 클린턴 로메샤(Clinton Romesha) 병장과 타이 카터(Ty Carter) 병장은 전투 중 그들의 행동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전투[편집]

키팅 전초기지에는 미군 79명, 아프가니스탄군 42명, 라트비아인 2명이 있었고, 이를 300-400명의 탈레반 군대가 공격했다. 공격 직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대부분 도주했다.주력 부대는 제4보병사단 제4여단 제61기병연대 3대대 B중대 54명이었다. 브라보 중대장은 스토니 포티스 대위였다.

키팅 전초기지는 중대규모, 근처에서 키팅을 지원하는 프리체 전초기지는 소대규모였다. 2대의 F-15E 전투기가 거의 8시간 동안 19대의 다른 항공기의 공습을 조정하는 것을 도왔다. 키팅 전초기지에서 180 km 떨어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 이륙했다.

결과[편집]

미군 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 8명의 아프가니스탄 군인과 2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 경비원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은 공격을 격퇴한 결과 150명의 탈레반 무장세력도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미군은 이미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해당 지역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으므로 공격이 발생했을 때 기지 폐쇄가 임박해 있었다. 탈레반의 공격으로 이러한 철수 계획을 앞당겼다. 전투 후 군대가 너무 빨리 전초기지를 떠나서 일부 탄약을 포기했다. 전초기지의 창고는 탈레반 반군에 의해 즉시 약탈되었고 10월 6일 B-1 폭격기의 폭격을 받아 남겨진 치명적인 탄약을 파괴했다.

10월 5일과 6일에 연합군은 전초기지를 공격한 탈레반 군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파괴했다.

징계[편집]

부적절한 지휘체계의 책임을 물어 네 명의 육군 장교를 징계했다. 멜빈 포터 대위, 스토니 포티스 대위, 로버트 브라운 중령, 랜디 조지 대령

캄데시 전투 조사단은 기지의 방어력을 개선하지 못한 육군 지휘부의 잘못으로 결론을 내렸으며, 방어가 불가능한 전초기지들을 폐쇄할 것을 권고했다.

명예훈장[편집]

한 전투의 두 생존 병사가 명예훈장을 받은 건 베트남 전쟁 이후 50여 년만이었다. 클린턴 로메샤(Clinton Romesha) 병장과 타이 카터(Ty Carter) 병장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캘리포니아주(州) 출신의 클린턴 로메샤(32) 전 육군 하사와 가족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명예훈장을 직접 수여했다.

로메샤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 가운데 생존자로는 4번째로 명예훈장를 받게 됐다.

로메샤가 입대 초기에 독일에서 근무한 뒤 한국 동두천에 있는 캠프 케이시(Camp Casey)의 육군 제2보병사단 제72기갑연대에서 근무했으며, 대한민국 국방 근무 기장(en:Korea Defense Service Medal) 등을 받았다.

영화[편집]

2020년 아웃포스트 (영화)가 개봉했다.

이 이야기는 2009년 10월 3일, 아프간의 외딴 전초기지 "키팅"에서 있었던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AIR FORCE MAGAZINE이 연재한 기사를

바탕으로 추가 자료를 모아 재구성한  번역글 입니다. 기본 베이스는  미공군 잡지의 글 구성 순서를 따릅니다. - 필자 주 -

외딴 아프간 전초기지의 병사들이 중무장한 탈레반 군대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숫적으로 밀리던 병사들은 공중화력의 지원으로 탈레반 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2006년 PRT(지방재건팀) 기지로 건설된 전초진지 “Keating” 는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파키스탄 국경에서 약 10마일 떨어진 누리스탄 주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강의 교차점 근처에 위치한 이 고립된 진지는 아프간 민간인과 게릴라들이 다수 거주하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진지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보급이나 접근성은 비교적 좋은 편이나, 고지대에 위치한 아프간 주민이나 탈레반 게릴라가 기지 병력의 움직임을 항시 관찰할 수 있었다.

처음 파견된 병력들은 현지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이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것을 저지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러나 기지 주변 상황은 곧 살벌해졌다. 결국 미군의 임무는 현지민의 마음을 얻는데서 순수한 방어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주둔 시작후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키팅”진지는 수시로 기습적이고 차츰 강력해져가는 공격을 받아왔다. 게릴라들의 패턴은 늘 비슷했다. 소수의 게릴라가 움직였으며 가능한한 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전략을 짰다.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짧고 강렬한 공격이 몇 분간 진행된 후 이들은 산악지대로 사라져 버렸다.

최근 2009년 10월 3일에 있었던 대규모의 조직적인 전투와 같은 공격은 기존에는 없었던 게릴라들의 방식이었다. “키팅”진지에 대한 최후의 타격(2009년 10월 3일)은 잘 준비된 대규모 공격이었다. 거의 300명에 달하는 게릴라 전사들은 진지의 완전한 점령을 목표로 했고 처음부터 퇴각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은 소수의 “키팅”진지 수비대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숫적으로도 너무 밀리는데다 사방이 적이어서 퇴각할 곳도 없었다.

이 날의 전투에서 미군 8명이 전사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 기지에서 파견된 제61 기병연대 3대대 브라보 중대 소속이었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이들은 다음날 새벽까지 포위되어 발이 묶여 있었다.

80명 규모의 수비대는 4 대 1 정도로 숫적 열세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게릴라 전사들은 캠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악지대에 은신한채 사격을 가하고 있어 기지 수비대로서는 사실상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게릴라 들의 무기는 자동소총과 로켓탄 등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긴 했지만, 숫적으로 우세하고 잘 은폐해 미군 기지 수비대의 화력을 압도했다. 그들의 공격은 사방에서 날아왔다.

당시 나토 국제보안군에서 제공한 전투조사 보고서의 개요에 따르면, “키팅”진지 인근 고지대에는 관측진지 “프리셰”가 있었다. “프리셰”는 저지대에 위치한 “키팅”을 돕기위해 관측정보를 제공했지만, “프리셰” 역시 게릴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어 지원에는 제한적이었다. (이 날 관측진지 “프리셰”는 위기에 처한 “키팅”을 위해 관측정보와 박격포 지원사격을 수행했다. 그러나 자신도 게릴라의 공격에 직면한터라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게릴라와 대치했던 병사들은 12시간 동안 치뤘던 그 전투에서 여타 전투에 비해 사상자가 많았던 것은 항공지원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군과 육군의 항공전력이 차단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키팅”진지가 함락되었을 것이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절망적이었던 “키팅”진지 포위전에서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공군의 전폭기와 육군의 공격헬기가 19대나 투입되었고, 그 결과 게릴라 150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지상군이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우리가 받았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항공지원이 없었더라면, 그 날은 아프간 미군 전투사상 최악의 날이 되었을 것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적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폭탄을 퍼붓는 거대한 항공기 대열이 우리에게 절망적인 패배상황을 격전 끝에 거둔 값진 승리로 바꿔준 것은 사실입니다”

- 현장 지휘관 61기병연대 3대대장 로버트 브라운 중령-

2009년 61기병연대 3대대 B중대 병사들이 “키팅”진지에 파견될 무렵, 진지에 파견된 미군과 아프간 군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이 외딴 계곡 전초진지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신념을 가질 수 없었다.

B중대의 파견근무기간 “키팅”진지의 임무는 해당진지 근무 병사들에게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대침투 전술지침을 숙지하고 현지민과 전투를 벌이고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병사들을 헷갈리게 만들 뿐이었다. 키팅 진지를 보호하기에는 부족한 병력과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진지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키팅”진지의 최우선 목표는 오직 기지방어에 한정되었다. 2009년 중반, 이미 “키팅”진지를 사수하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고위 지휘관들은 “신 아프간 전략”에 따라 외곽 전초진지들을 폐쇄하고 병력을 인구밀집지구 방어를 위해 집결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폐쇄작전은 원래 2009년 7-8월 사이에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바르게 마탈” 지역에서 수행된 여단급 작전 지원을 위해 외곽진지 폐쇄 및 물자 수송에 이용될 자산들(수송헬기가 해당될 것이다 - 필자주-) 이 동원되는 탓에 계획은 밀리고 있었다.

정보자산들 역시 “캄데쉬”계곡 북부에 위치한 “바르게 마탈” 지역에서의 작전 지원을 위해 우선순위가 재조정된 상태였다. (“키팅” 진지도 캄데쉬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잔여 정보자산들은 아프간 남부지역 작전에서 실종된 미군 소재를 확인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획득된 일부 정보에서 “키팅”진지가 처한 심상치 않은 상황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었으나 현재 전투가 확대되고 있는 다른 지역에 비해 명확하지 않은 탓에 역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키팅”진지의 B 중대원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미군 보고서는 키팅진지의 중대원들이 그들의 전임자들이 파견 근무 동안 받았던 공격의 3배가 넘는 47차례의 크고 작은 공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몇 몇 사례의 경우 게릴라 들이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키팅”진지 외곽 방어선까지 접근했었음을 알 수 있지만, 다행히도 이 때만해도 게릴라 몇몇이 이따금 박격포나 자동소총 사격을 하는데 그치는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의 전투는 5-10분간 지속되는데 그쳤었다. 그 결과, “키팅”진지 수비대가 임박한 “대규모 지상공격”에 대한 정보 보고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키팅’진지 인근에서의 게릴라와의 소규모 전투 경험 때문에 대규모 게릴라 군의 공격가능성에 관한 리포트는 과장되고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말았다. 결국 그러한 인식이 사상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

공군 병장 “매튜 맥머트리”는 “키팅”진지에 주둔 중인 61연대 3대대에 배속되어 “cyber systems operator”로 근무 중이었다.

공격이 있던 날 새벽 6시 경, 그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가 업무를 처리하고 숙박도 하는 information technology building의 벽이 심하게 흔들리고 방은 먼지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수 초 후 로켓탄 하나가 건물 벽을 뚫고 들어와 4피트짜리 구멍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맥머트리”는 재빨리 방탄복을 착용하고 자동소총을 들고 응급구호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장은 이 날 지상에 있었던 유일한 공군 소속 병사였다. 3주 전에 이 외딴 진지로 파견된 맥머트리 병장은 바그람 비행장에 주둔 중인 제755 항공원정군 소속이었다. ( “키팅”진지로의 파견이 그에게는 첫 전투 임무였다) “키팅”기지에서 병장이 하는 일은 인터넷과 전화 접속을 제공하는 위성통신 시스템의 설치와 유지관리였다.

첫 사상자가 도착하는 데는 불과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응급구호소-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로켓탄 한 발이 근처 벽에 맞으면서 파편을 구호소의 의무병들에게 날렸다. 결국 의무팀은 밀어닥치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용하기 위해 응급구호소 앞 현관에 임시 구호소를 마련해야 했다.

맥머레이 병장도 이제 컴퓨터 대신 새로운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의무병들을 도와 의료장비를 나르고 전사자의 무기를 수집해 정비했으며 전사자를 시신 회수용 백에 넣는 일 까지 해야 했다.

“공격은 너무도 강렬했습니다. 사방이 불길에 휩싸였고 로켓탄들이 무더기로 날아와 벽에 박혔습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적들은 항공기가 날아오고 돌아가는 패턴에 맞추어 공격을 멈췄다 재개하는 것을 반복하더군요.”

작전에 관한 민감한 정보- 항공력의 현장 도착시점과 투입된 항공기의 종류-에 대해서는 군 관료들이 정확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오전 8시 겨우 455 항공원정단 소속 스트라이크 이글 4기와 아파치 헬기 여러 대가 “키팅”진지 상공을 선회하며 무장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키팅”기지로부터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바그람”비행장에서는 “마이클 폴리더” 대위와 “아론 도브” 중위가 스트라이크 이글 조종석에서 통상적인 정기 순찰 비행을 준비 중이었다. 이들에게 긴급하게 근접항공지원 요청이 하달되었다.

상황은 매우 나빴다. 전초진지“키팅”이 게릴라의 공격으로 함락직전이라는 상황설명에 따라 그들은 즉시 이륙하려 했지만, 출격을 위해서는 세부적인 준비-무장과 유류 등 근접항공지원에 맞는 장비교체-를 위해 약간 지체되었다.

“폴리더” 대위 일행의 스트라이크 이글이 현장에 도착하는 데는 10분여가 소요되었다. 그들은 먼저 도착한 스트라이크 이글 2기의 파일럿으로부터 현재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막 강력했던 적의 첫 번째 공세가 잠시 멈추려하던 시점이었다.

“우리는 3개의 통신채널을 통해서 쏟아지는 지상병력들의 감사인사를 들었습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신이 없었죠. 그들은 동시에 우리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그걸 다 듣는데는 15-20분이나 걸렸습니다. 우리와 통화를 했던 군인들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타켓팅 포드를 통해서 지상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적외선 영상 속에서 빛나는 총구의 화염은 마치 독립기념일의 폭죽놀이 같았습니다.”

“폴리더” 대위일행도 즉각 수 발의 2000파운드급 유도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현장에 먼저 와 있었던 스트라이크 이글 편대로부터 전술 항공 통제관 임무도 인수했다. 이들 이글 편대는 야간작전을 끝내고 즉각 항공지원에 투입된 터라 이제 연료가 바닥나고 있었다. 이들 중 위험수위였던 이글 전폭기 1기는 바그람 기지로 날아갔고, 나머지 1기는 30분을 더 있다가 역시 철수했다. ( 나머지 1기의 전폭기는 그 30분 동안 화력진지“바스틱” 상공에 머무르면서 통신 중계 임무를 수행했었다.)

험준한 산악지대는 전초진지“키팅”과 항공기 간의 직접 교신을 방해했다. 그래서 스트라이크 이글 1기가 20마일 떨어진 “합동 최종 타격 통제관” 위치한 화력진지 “바스틱”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바스틱”의 통제관이 “키팅” 진지의 병사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전장 상공에 떠 있는 전폭기들에게 정보를 중계해 줬다. 그 정보를 수신한 전폭기가 다시 “폴리더” 대위 일행의 전폭기에게 연계시켜주었다. 그 결과 대위의 전폭기는 지상군이 원하는 목표물에 언제든지 무장을 투하할 수 있었다.

“폴리더” 대위 일행의 스트라이크 이글이 지상군이 중화기 공격을 받은 언덕에 2000파운드급 JDAM 몇 발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퍼붓고 나자, 그는 윙맨의 이글에도 같은 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윙맨의 스트라이크 이글은 2발의 유도탄을 투하하는데 성공했지만, 유압계통의 문제로 인해 바그람 기지로 돌아가야 했다.

윙맨이 떠난 후, “폴리더” 대위 일행은 재급유를 받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 추가로 폭탄을 투하한 다음 통신 중계 임무를 계속했다. 종종 무장투하 임무를 수행했지만 대위의 이글 전폭기는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7시간 이상 통신 중계 임무를 계속했다.

(폴리더 대위와 도브 중위는 훗날 이 날의 공을 인정받아 수훈비행십자장을 수상했다)

오전 9시 경, 정기 순찰 임무를 수행하던 B-1 폭격기가 “키팅”진지가 위험에 처했다는 요청을 받고 날아왔다. “본 21” 이라는 호출부호를 쓰는 이 폭격기는 수 분 만에 기지 상공에 도착해 “키팅”을 비롯해 계곡 일대에서 공격받고 있는 진지 수비대원들의 항공지원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현장 상공은 항공지원과 상황 보고하는 지상군 병력들의 통신으로 인해 통신폭주 상태였다.

“ ‘키팅’진지 하늘은 이미 전폭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죠. 우리가 목표물 상공을 지나갈 때 ‘키팅’진지에서 발생한 엄청난 화염을 보고 놀랐습니다. 마치 전체 진지가 불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 제379 항공원정 비행단 소속 B-1 조종사 “저스틴 쿨리쉬” 대위 -

실제로도 “키팅”진지 시설 대부분은 불타고 있었다. “맥머트리” 병장이 돕고 있던 응급구호소 앞 건물도 불타고 있었는데, 화염이 너무 강렬해서 군인들은 응급구호소에 불길이 번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맥머트리”병장은 의무병들을 도와 부상자와 장비를 20야드 떨어진 병영으로 옮겼다. 그곳은 아직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

“키팅”기지 상공에 도착하기 전 이미 9시간째 비행 중이던 폭격기“본 21”은 일부 탄약을 목표물에 투하하고 재급유를 받기 위해 이동했다( 이 B-1은 500파운드급 GBU-38과 2000파운드급 GBU-31을 통합 20발 탑재하고 있었다).

정오가 될 무렵, 서쪽에서 겨울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200피트에서 3만피트 사이 대기층에는 뇌우까지 포함된 구름이 깔려 있었다. 이 폭풍이 한바탕 몰아지고 나면 지상은 더 이상 관측이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전폭기들은 지상군의 협조를 받아서 오직 GPS유도 무기만 활용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이 전투에서 수훈비행십자장을 받은 “도브” 중위의 노력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탑승한 스트라이크 이글의 장비 조작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덕분에 우군에 대한 오폭이나 민간인에 대한 부수적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특히 전투 중에 일어난 2번의 공지협조오류를 발견했고 그 중 한 번은 무장 투하 직전에 폭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연료 재보급은 매우 어려웠다. 급유기가 약 100마일 밖에 위치한터라 재보급을 위해 찾아가는 데만도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게다가 날씨도 재보급 작업을 방해했다.

장시간 체공 중이던 폭격기 “본 21”이 이제 철수해야 했다. 돌풍 속을 날면서 동체에 얼음이 맺혔고, 이로인해 폭격작전은 몇 차례 더 가능한 상황이었다. B-1 폭격기는 몇 차례 추가 비행에서 잔여 탄약을 모두 투하한 다음 모 기지로 철수했다. 무려 16.5 시간이나 수행한 장시간 체공 임무였다.

전투가 막바지로 다다를 무렵, “폴리더-도브” 콤비의 스트라이크 이글은 전방항공통제관으로서 총 19기의 현장 투입 전폭기들을 지휘했다. 6기의 스트라이크 이글과 4기의 썬더볼트, 2기의 아파치와 1기의 랜서 가 이들의 유도에 따라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지상 전투는 게릴라 군대가 몰려오자 아프간 정부군 대부분이 그들의 진지를 황급히 포기해버린 탓에 게릴라들은 세 방향에서 “키팅”진지를 향해 밀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군들은 방어선을 좁혀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철수했고, 이후 공군과 육군 항공전력을 대규모로 투입한 끝에 미군은 서서히 주도권을 잡고 반격을 개시 오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핵심 시설을 재탈환 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키팅”진지를 포위하고 내부로 침투한 게릴라들을 향해 총 16톤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기총사격도 170발 가량 이루어졌다. 이 덕분에 미 지상군은 72명의 병사를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09년 10월 3일 저녁, ‘키팅’진지는 온전히 미군의 손에 들어왔고, 게릴라 군은 전술적으로 완패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진지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미군 8명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죠”

미군 항공전력의 폭탄투하로 불타는 "키팅"진지 주변(좌),  폐허로 변한 "키팅"진지 (우)

키팅 진지를 외부와 연결해 주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인 치누크 헬기...  그들을 기지로 배치시키고, 폐쇄후

철수시킨 것도  치누크 헬기다.  베트남전 당시만해도 가벼운 경량급 휴이가 강습수송의 주력이었으나, 병력 탑승규모와

방어력 증대가 용이함  등 치누크 헬기가 보유한 상대적 강점으로 인해 최근들어 치누크 헬기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아래)

지상군은 기밀서류와 무기를 회수하는데 3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을 이동시킬 수송편이 도착함에 따라 “키팅”에서 철수했다. 공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맥머트리” 병장에게는 Army Commendation Medal 2개가 수여되었고, 기병대 병사들(61기병연대 소속 병사들이었다)은 Combat Action Badge와 cavalry spur를 받았다.

“항공지원이 없었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상대한 적의 규모와 우리의 전력을 고려한다면요. ‘키팅’의 수비대원들은 용맹했습니다. 그들을 대신할 만한 이들은 찾기 힘들 겁니다. 그들 덕분에 덩달아 저도 영웅이 됐죠. 하지만, 항공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필수사항이었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요.”

전초진지 “키팅”은 10월 6일에 폐쇄되었다. 적에게 아군 장비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수 직후 진지는 폭격으로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