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 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 ▒ 전체 1,055개의 게시글이 있습니다. ▒


899 세쌍둥이

세쌍둥이가 떴다~~!

무려 100만분의 1의 확률. 그 놀라운 어마어마한 행운에 당첨되었다. 지나가기만 해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 집중은 기본. 남들보다 기쁨과 행복이 3배가 되었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물론 주저앉아 엉엉엉 울고 싶을 만큼 힘든 적도 많았다. 잠을 푹 잘 수도 없고 외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옆에서 묵묵히 응원해주고 손길을 보태주는 가족들이 있어 이만큼 잘 길러내었다. 

처음엔 보잘 것 없는 작은 씨앗이었다. 촉촉하게 물을 주고 포근한 햇빛을 주며, 선선한 바람도 불어 주었다. 거센 비바람이 불 때는 함께 아파하며 내 온 몸으로 막아주었다. 지켜내기 위해 내 것은 아낌없이 내려놓았다. 오로지 “엄마”의 모습으로 잘 영글어 갔다. 고귀한 노력은 헛되지 않아 무럭무럭 예쁜 꽃을 피어나게 하며 곧 튼실한 열매가 되었다. 어느덧 27개월. 참 수고 했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니 똑같은 신발이 3쌍, 똑같은 자동차 장난감이 3개, 어린이집 가방 역시 3개. 하물며 쪼르륵 놓인 유아변기 3개가 웃음을 나게 한다.

이제 막 낮잠에서 깬 세쌍둥이가 하나 둘씩, 방문을 열더니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 나온다. 너무나 값지고 예쁜 보물이다!

“처음에는 쌍둥이 인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다 몇 주후에 의사선생님께서 한 곳의 아기집에 한명이 더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두 명은 일란성, 한명은 이란성으로 태어났어요.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오고, 당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양가부모님께서 많이 축하해주시고 격려해주셨지요.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너무나 소중하다고 감사한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몹시 피곤해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세 쌍둥이 엄마 강미선씨는 무척이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했다. 잠에서 막 깬 세쌍둥이의 간식을 야무지게 챙기며 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세 명이서 사이좋게 앉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 

“임신주수가 채워질수록 점점 잠을 자기가 힘들었어요. 누워 있는 것이 고통이라 앉아서 잠을 청하기도 하였지요. 태동을 하면 배가 터질 것 같이 볼록볼록 튀어 나오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30주까지는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급작스런 통증으로 입원하고 2틀 만에 양수가 터져 탯줄이 빠지는 바람에 28주에 출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2.5kg가 되기까지 인큐베이터에 두 달 반이나 있다가 나왔어요. 생각보다 아이들이 너무나 작고 여린 모습이라 마음이 아프다고 신랑이 많이 울기도 했었습니다. 병원에 아이들을 두고 올 때마다 저 역시도 마음속으로도 많이 울었어요.”

아이들을 향하는 세쌍둥이 아빠 임성욱씨의 손길이 자연스럽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안일 역시 잘 도와준다며 강미선씨의 칭찬이 자자하다. 출산과 육아에 지친 아내가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최대한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준다고 한다. 특히 잘 놀아주는 아빠는 세쌍둥이에게도 인기 만점. 때론 퇴근 후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함께 보듬어가며 서로의 힘듦을 잘 참고 나누었다.

“가까이 계시는 친정 부모님께서 손길을 많이 보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틈날 때 마다 제 형제들도 세쌍둥이를 많이 봐주었어요. 9살 조카도 세쌍둥이에게 분유도 많이 먹여줬답니다. 친정엄마는 저랑 잠도 못자고 밤을 새며 함께 돌보느라 함께 고생 많으셨어요. 혹시나 전염성 있는 질병에 걸리면 세쌍둥이들을 번갈아가며 친정집에 맡기기에 늘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세쌍둥이와 외출을 하면 자연스레 모든 이의 시선집중! 특히 허락 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로 불편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냥 따뜻한 눈길로 조용히 바라만보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지켜보는 눈이 많기에 오히려 더 엄하게 키울 수 밖에 없다고.

“크게 바라는 것은 전혀 없어요. 그저 건강하게만 그리고 인성이 바른 아이들로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답게 키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같아요. 저희 역시도 부족하지만 자기 몫을 하며 예의바른 아이들로 양육하고 싶습니다. 한꺼번에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뭉클하고 모든 피로가 사르르 녹아 버린답니다. 나중에 더 크면 서로 의지하며 큰 힘이 되어주겠지요. 서로가 얼마가 든든하겠어요.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답니다. 정말 잘한 일 같아요 .”

분명 더 많이 힘든 점도 있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함께 보듬어 가며 끝까지 할 수 있기에 오늘도 힘을 낸다. 밝고 선한 에너지가 가득한 세쌍둥이네로 인하여 상큼 달콤한 행복바이러스가 널리 퍼지길 기대해본다.

<이지희 기자>

  •  
  •  
  •  

898 김풍배 시인

'요양원' 별곡

갈치 생선 

한 토막

젖가슴에 묻어놓고

면회 오는 

아들만

기다리는 구십 노모

아들이 

그 말을 듣고 

바다만큼 울었네

<모정-요양원 24>

중증 치매를 앓고 있지만 거동은 할 수 있었던 90세 어르신, 식사하고 오신 후 몸에서 냄새가 났다. 대소변 냄새도 아닌 비릿한 내음. 기저귀를 살펴봐도 이상이 없다. 목욕을 시키려 옷을 벗기는 순간, 어르신의 젖가슴에서 툭 떨어지는 생선 한 토막! “큰 애 줄려구..........” “큰 애 줄려구....................” 며칠 후 면회를 왔다가 그 소리를 들은 아들은 어머니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시인의 속에서 또로록 눈물방울 같은 시가 흘러내렸다. 가슴으로 흘린 눈물, 그 눈물로 쓴 시. 그 시는 시인을 적시고, 노인들을 적시고 흘러 자식들을 적시고, 방울방울 세상을 적셨다. 모정은 그리도 지독했고, 시는 그리도 절절했다. 

고희가 넘은 71세의 나이에 태안의 한 요양원에서 4년을 일하며 황혼의 삶들을 섬겨온 김풍배 시인의 ‘요양원’ 연작시집 ‘노을에 기대어 서서’에는 이런 시가 여든 여덟 편이나 실려 있다. 자식들이 요양원에 심어 놓아 꼼짝없이 나무가 된 노인들, 장독같은 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내색 없이 살며 이게 다 오래 산 벌이라 하는 어르신, 죽고 싶다 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영양제 맞고 온 91세 할아버지, 면회 온 다들 붙잡고 하루 종일 굶었다며 날마다 만우절이신 93세 할머니를 담은 시에 눈물을 짓고, 웃다가도 금세 가슴을 내리 누른다. 먹먹하다. 하염없이 슬프다가도 천연덕스러움과 천진난만 그 경계에 선 것들에 웃음이 난다. 그게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종이 한 장 너머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불쑥 불쑥 놀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제가 쓴 한 편 한 편의 시는 그동안 머무셨던 어르신들 삶의 그림자가 순간순간 한 컷의 그림자처럼 글 속에 담겨 있어요. 누구나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떠나갑니다. 가족도, 친구도, 물질도, 명예도.... 심지어 정들어 살던 집까지 떠나야 합니다. 떠나간 그 자리에 낯선 환경과 외로움과 약봉지와 아픈 몸이 대신하고 있어요. 제가 쓴 시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아직은 거북스러운 요양원이라는 시설의 이름과 어르신들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어 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가 사비를 들여 낸 시집 500권은 금세 동이 났다. 여기저기 달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는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원치 않는다. 시집이 잘 팔려 돈을 버는 것도 싫다. 다만, ‘요양원’이라는 아직도 불편하고, 낯설고, 죄스러우며, 거북살스러운 그 편치 않는 세 글자의 단어에 담긴 진짜 이야기들이 시라는 바람을 타고 널리널리 퍼지길 바랄 뿐이다. 

“어르신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 분들을 위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인간이기에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웃는다. 침울한 요양원의 현실을 어깨를 토닥이듯, 괜찮다고 가만히 안아주듯 그렇게 웃어준다. 시인이 울어준다. 숱하게 흘러나가는 죽음에 진심을 다하고, 차마 울지 못하는 현실에는 입으로 웃고 눈으로 운다. 시인이 잊지 말라 한다. 누구나 늙는다고, 부모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71세의 나이 노을에 기대어 서서 그가 전한다.

노을에 기대어 서서 허허로운 세월아

조그만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김풍배 시인이 요양원에 몸담게 된 것은 잘 아는 목사님의 소개 때문이었다. 만리포라는 바다가 가까이에 있다는 조건 하나 만으로 무조건 승낙한 그가 요양원에서 만난 바다는 만리포의 잔잔한 바다가 아닌,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충격의 바다였다. 비애와 고독, 체념과 달관, 웃음과 기쁨, 반가움과 기다림, 인생의 온갖 느낌들이 하루에도 수차례 파도처럼 밀려왔고, 조개껍데기처럼 부스러졌다. 희로애락의 4대 감정 사이에 낀 감정의 온갖 파편들이 끊임없이 휘몰아쳤고, 그 바다위에 그는 묶이고 말았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6.25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와 경제대국을 일으킨 역사를 같이 살면서도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하고 낯선 경험들은 날마다 철썩였다. 그는 그것들을 물고기처럼 하나하나 낚기 시작했다. 그렇게 낚은 여든 여덟 개의 시상은 한권의 시집으로 묶어져 세상에 나왔다.

고희를 넘긴 황혼기의 시인이 충남 태안의 한 요양원에서 4년간을 지내며 느낀 소회는 그렇게 세상에서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곳보다 처연하고, 그 어느 곳보다 처절하고, 그 어느 곳보다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이다 못해 가끔은 눈 질끈 감아버리고픈 현실들을 그는 온몸으로 부둥켜안았다. 거북한 곳에 한 손 치켜 올려 촛불을 들어 밝혔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해학과 진정성으로 버무려 세상에 편지를 부쳤다. 요양원은 그렇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김풍배 시인과 알고 지낸지는 만 5년이 됐다. 소년 같은 동그란 얼굴을 하고 선 그는 시조를 낭송했고, 하모니카를 불었으며, 또 아코디언도 연주했다. 하모니카로 ‘얼굴’을 연주할 때는 몰아치다가도 속삭였으며, 아코디언을 맸을 때는 영락없는 풍류장이가 됐다. 앙코르 하지 않으면 샐쭉 토라지는 척 했다가도, 연거푸 터지는 앙코르 소리에 볼까지 빨개지며 아이처럼 좋아라했다. 끼도 많고, 재능도 많지만, 늘 그의 얼굴은 겸손으로 낮았다. 세상의 일들을 아름다운 시어로만 남기지 않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어려운 시로 풀지도 않았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시조에 담긴 그의 시상은 늘 친근하고, 곱씹을수록 잘 익은 칡 마냥 쓴물도 나고, 단물도 났다. 그래서 자꾸 자꾸 읽고 싶었다. 때 묻지 않은 시라 더 그렇다. 멋 부리지 않은 시라 그렇다. 시에서 사람이 보이고, 사람에서 시가 보인다. 

김풍배 시인이 등단한 것은 2007년 만 62세 때 이다. 시집으로는 ‘물동그라미’, ‘가깝고도 먼 길’, ‘바람소리’ 등을 냈다. 창조문학, 문학공간, 공무원 문학, 서석문학, 서주문학 등의 문인모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부지부장, 한국공무원문학 감사, 한국 시인연대 이사, 한국 창조문학 운영이사 등을 맡아 굵직한 힘을 보태고 있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미와 재능을 보인 그지만, 농대에 들어가 중퇴를 하고, 금융기관에서 30여년을 일했다. 퇴임 후 어르신들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신학도 공부하며 살다가 62세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삶이 10여년에 이르고 있다. 

김풍배 시인이 ‘요양원’이라는 색다른 소재로 시를 쓰며 지켜온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쉽게 쓰자는 것이다. 아무나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어 공감하고 위로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둘째는 짧게 쓰려고 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시가 길면 아예 읽기를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시인의 쉬운 시는 어지럽히지 않는다. 시인의 짧은 시는 그 찰나를 온전히 붙든다. 시 한편에 마음이 참 먹먹하다. 

땅속에 묻어둔 돈

가져갈 까 겁나네

뜸하던 아들 내외

소문 듣고 달려와

어머니 

어디 묻었노?

거짓말도 못하나?

          <어머니의 꾀-요양원 41>

✽김풍배 시인의‘요양원’연작시집‘노을에 기대어 서서’는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배영금 기자>

  •  
  •  
  •  

897 자영업자의 눈물

자영업자의 눈물은 이제 그만! 임대인과 임차인은 ‘동행’ 관계

얼마전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영업을 하는 지인이 운영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 졌다는 이야기였다. 개업한지도 꽤 되었고 규모도 있는데다 장사도 잘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근래 들어 계속되는 불황과 소비침체로 매상이 떨어져 임대료와 직원 월급까지 밀리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생의 끈을 놓고 싶었겠냐마는 되돌릴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인 것만은 확실하다. 당사자는 차치하더라도 가족들에게 남겨진 아픔과 삶의 무게가 못내 안쓰럽기만 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펼치고, 남 밑에서 눈치 보는 샐러리맨 노릇이 싫어 자영업에 뛰어든다고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상당수가 명예퇴직하거나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뛰어드는 생계형 창업이다. 

최근 자영업자 사이에서는 IMF때보다 경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자영업 종사자(무급가족종사자 포함)수는 670여만 명이며, 경제활동 인구 중 실업자를 제외하면 인구 5명 중 1명꼴이다. 이들의 부양가족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천여만명이 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2014년 전국 통계를 보면 101만여 명이 신규 창업을 한 반면, 폐업은 76만여 명에 이른다. 폐업한 개인 사업자중 창업 후 3년 이내 폐업 비중이 50%가 넘는다. 창업자 10명중 8명이 5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다고 한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장사 하다가 망한’ 것이다. 세대에 관계없이 명예퇴직이 상시화 되고, 재취업의 기회는 희박하다 보니 상당수의 경제활동인구가 자영업으로 내몰리고 있지만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개인 사업자 대출은 해마다 늘고 있으며, 대출 연체율 역시 증가 추세라고 한다. 이는 자영업 경영이 어려운 탓에 대출로 연명하는 사업자가 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바꿔 말하면 퇴직금에 대출까지 받아 자영업을 시작하지만 실패를 하고,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다시 들어오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꼬집어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좋은 재료를 쓰고, 정성을 다하고,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해도 결국 남는 건 빚밖에 없다면 자영업의 미래는 없다.

우리나라 치킨집이 전 세계 맥도널드 매장보다 많다는 통계가 있다.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음식업, 도·소매업에 너도나도 몰리다 보니 포화상태를 넘어선지 오래다. 누구나 쉽게 창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장기적인 경기불황과 내수침체로 역공하는 꼴이다. 치킨집 뿐만 아니라 카페, 편의점, 분식점, 미장원 등 뭐 좀 된다 싶으면 한집 건너 생기다 보니 경쟁을 넘어서 제 살 깎아먹기로 비화 된지 오래다. 

우리 지역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2008년 도심의 휴식공간으로 정비되어 개장된 중앙호수공원에 신도심권이 생기다 보니 기존의 동문동 먹거리골이나 소위 중앙통이라 불리던 원 도심은 빈상가가 늘고 있다. 중앙호수공원 인근 상가는 몇몇 대형 평수를 빼놓고는 프랜차이즈를 비롯해 수많은 매장이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고 있다. 대부분 신축건물이고 깨끗한 환경에 젊은이들의 니즈를 충족할만한 브랜드가 입점하다 보니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하지만 마치 짬짜미라도 한듯 한 살인적인 임대료는 임차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로변이나 코너 1층 상가의 임대료는 수백만 원을 호가하며, 회전이 다소 늦더라도 가격흥정에는 인색하다. 우스갯소리로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장사가 잘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생각보다 못할 경우 투자비용 회수는커녕 한 달에 지출되는 고정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시설투자비용을 손해보고 계약을 파기하기에는 출혈이 너무 크다. 재기는 더욱 어렵다. 자기 인건비는 고사하고 적자만 면한다면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기처럼 버틸 수 밖에 없다. 매장 가치의 하락이 걱정되어 누구에게 쉬이 하소연도 어렵다. 다는 아니겠지만 통계에서 보듯 많은 자영업자들이 겪는 말 못할 사연들이다.  

자영업은 지금 3고(高=고밀도화·고연령화·고부채) 3저(低=저숙련·저소득·저희망)에 빠져 있다. 남들이 많이 하는 직종을 40~50대가 대출을 안고 진입하다 보니 실패 확률이 높고, 재기 여력도 약할 수 밖에 없다. 근래 들어 청년 창업이 늘었다고는 하나 성공했다는 이를 보기 힘들다. 이렇게 범국가적인 불황속에서 자영업자들이 안정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 상생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임대인과 임차인은 갑을관계가 아니라 ‘쌍방투자’를 하는 ‘동행’ 관계이다. 임대인이 건물에 투자를 한 것처럼 임차인은 매장에 투자를 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너무 ‘수익성’ 만 따지다 보면 어느 하나가 그 손해를 떠안아야 하는 치킨게임 같은 것이다. 예비자영업자 역시 충분한 사전준비와 리스크에 대한 피드백을 가지고 창업전선에 뛰어 들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www.sema s.or.kr)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통한 상권분석과 컨설팅도 도움이 된다. 특화된 아이디어나 숙련된 기술 없이 도피성 창업을 한다는 것은 결국 실패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자영업은 국가산업의 기초이자 가정유지의 근간이 되는 경제활동이다. 우리 부모 세대의 얼굴이고, 나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잘 살 수는 없으나 열심히 하는 만큼 웃으며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더 이상 자영업자의 눈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박홍식 기자>

  •  
  •  
  •  

896 성연 찰토마토농장 이영희씨

"내사랑 토마토"

6월의 덥다 못해 따가운 햇볕에 토마토도 붉게 익고, 주인장 얼굴도 벌겋게 익었다. 온종일 허리를 구부려 출하할 토마토를 따낸 지가 엊그제인데, 다섯 개동 하우스는 그새 주홍빛, 붉은빛이 알알이 알록졌다. 이렇게 무르익기 시작한 붉은 토마토 색깔이 새색시 연지곤지처럼 너무 예쁘다는 농장주인 이영희(65)씨는 하우스 열기와 초여름 햇살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 가득 웃음이 가득하다. 새벽부터 따기 시작한 토마토 농장 일에 허리 한번 펴기가 힘들어도 얼굴은 싱글벙글, 노래도 흥얼댄다. 

“일할 때 어려워도 보면 재밌어요. 아침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토마토들에게 인사하는 거예요. 너희들 잘 있었니? 무럭무럭 잘 커라 하고 말해요. 다 알아들어요. 너 잘 크고 있구나 하면 잘 크고, 안 큰다고 하면 안 크고 그래요.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식물이지만, 저는 사람 대하듯 그렇게 해요.”

그래서 그녀는 식물들도 좋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며 음악도 틀어준다. 트로트도 좋고, 발라드도 좋다. 지나간 추억의 노래는 아련해서 좋고, 신나는 가요는 축축 처지는 한 낮의 날씨를 풀 먹인 광목처럼 팽팽하게 펴준다. MP3에 담긴 음악에 따라 토마토를 따는 손길도 느려졌다 빨라지고, 무릎과 허리에도 더 짱짱하게 힘이 들어간다. 토마토도 마찬가지. 초록 잎사귀 뒤에 숨었던 빨간 얼굴도 쏙 내밀어주고, 잠시 노니는 바람에 흔들흔들 그네도 탄다. 

이영희씨가 남편 김옥출(71)씨와 함께 이곳 성연면 오사리에서 토마토 농장을 한지도 어언 20년. 700여 평 농사짓던 하우스를 태풍 곤파스로 다 잃고 오사리 3구 지금의 터전 500여 평에 하우스 다섯 개동을 지었다. 

“한겨울인 12월에 모종을 심고 나서 40여일 지나면 벌통을 하우스 안에 사다둬요. 하우스 안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벌들이 수정을 하죠. 벌들이 추워서 일을 하지 않을 때만 잠깐씩 인공으로 수정을 하고, 나머지는 다 벌들의 몫이에요.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들은 또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이곳 토마토 농장에서 수확되는 토마토는 이렇게 벌들에 의해 자연 수정된다. 사람 몸에 좋지 않은 약은 치지 않는다. 자식들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심적으로 정성을 다해 모종을 심어 가꾸고 수확을 한다. 그렇게 따낸 토마토들은 성연토마토라는 이름으로 하나로마트에 납품이 되고, 공판장과 로컬푸드 매장에도 들어간다. 고정 납품처 외에도 일반 단골도 많다. 물어물어 일부러 농장에 와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한 박스 사가기도 하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주스용으로 사가기도 한다. 어떤 것은 작은 청포도알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두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복숭아 같은 토마토들이 매일 매일 익어대니 한창 수확 철에는 새벽 5시에도 농장에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다. 붉은 토마토, 새파란 토마토 분간만 할 정도면 일해도  되는 시간이다. 

“약을 덜 쳐서 조금 덜 따면 어때요. 조금 더 힘들면 어때요. 그냥 우리 자식들 먹인다고 정성껏 키운 거 많은 분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해지면 좋은 거죠. 곁순 계속 따줄 때는 좀 힘들어도 열매 열리기 시작하면 힘들지 않아요. 열매가 이쁘고 따는 게 재밌으니까요. 허리 안 아프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이 토마토 농장에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말은 거짓으로 할 수 있어도, 표정은 거짓으로 하지 못한다. 토마토가 예쁘고, 농장에서 수확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는 그녀의 말은 표정에서 ‘진심’으로 빛난다. 여름 햇살에 익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또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게 사랑이다. 

✽성연 찰토마토농장 ☎010-9488-8159

<배영금 기자>

  •  
  •  
  •  

895 선장의 아들 양재봉 대표
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바다를 붙든 선장의 아들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자하여 고향에 내려왔어요. 어머니 아버지 일도 도와드릴 겸 이런 저런 일을 하는 데, 너무 좋은 거예요. 맘도 편안하고 재미도 있고.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고 힘들었던 일들이 어른이 되어 해보니 재밌고 즐거웠죠. 이렇게 맘 편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살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아예 정착을 하자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황도(黃島)에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선장의 아들’ 양재봉 대표) 

다시 찾은 고향은, 그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뱃길을 나서고, 늦은 밤 해루 질에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좋았다. 하루 웬 종일 짠내가 나고 끈적끈적한 땀이 온 몸을 뒤덮었지만, 광활한 바다 앞에만 서면 훨훨, 하루 일의 고단함도 일상의 스트레스도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출렁이는 파도를 따라 멀리 멀리 날아갔다. 

“처음에는 외롭기도 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블로그(http://blog.naver.com/mygury1)’를 하자였죠. 일기 형식으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어 올리다 보니 블로그 이웃도 생기고, 판로도 열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의 고향 황도에서 10분 내외, 백사장항에 위치한 ‘선장의 아들’ 작업 장 에는 산처럼 쌓인 스티로폼박스가 가득하다. 오늘 출고되는 박스만 해도 50박스. 고객을 만날 준비를 마친 새하얀 스티로폼박스에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곳곳의 수많은 지역 주소가 빼곡히 적혀있다. 

“지금은 소문이 나서 물량이 부족해요. 레스토랑이나 식당, 깐깐하기로 유명한 생협, 유기농매장에도 납품을 하다 보니 매일 들어오는 주문 양을 맞추기가 쉽지 않죠. 또 일일이 선별하고 세척을 해서 좋은 것만 보내드리기 때문에 일손도 부족하고요. 그래도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모든 물량에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장의 아들’은 안면도의 작은 섬, 황도에서 나는 자연산 해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다. 바지락, 대하, 꽃게, 소라, 낙지, 굴 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바다 밥도둑’들을 일일이 채취하고 선별, 세척하여 발송. 그날 잡은 해산물을 깨끗이 포장하여 안전하게 배송하기 때문에 전국 어디서든 싱싱한 서해바다의 참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섬 속의 섬 황도는 천수만 바다 가운데에 있어요. 육지와 바다가 인접한 기수지역으로 민물과 바다가 교차하는 곳이기에 갯벌도 많고 영양분도 풍부하죠. 맛이 좋고 품질이 뛰어나 다른 곳의 해산물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선장의 아들’에서 판매하는 모든 해산물은 대부분 황도(바지락의 경우 인근 고남리의 ‘옷점 마을’산도 있다)에서 나는 해산물로, 천수만 바다의 ‘제철’ ‘자연산’ 해산물만을 취급하기 때문에 싱싱하고 그 맛이 뛰어나다. 5월부터 6월, 7월 중순까지 제철 해산물은 바로 ‘바지락’. 통통히 살이 차오른 바지락은 어느 것 하나 씨를 뿌려 인공으로 키운 것이 아닌 순수 자연산이기 때문에 단맛이 나고 씹는 맛도 일품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제철이 아니면 의미가 없죠. 지금 최고조로 살이 차오른 바지락을 먹어보신 분들은 가을 바지락을 못 드셔요. 과일도 그렇잖아요. 설익은 사과 떨떠름하고 쓰고 맛이 없죠. 때문에 최고 맛이 좋은 봄 바지락을 10키로 20키로 주문해 냉동시켰다가 일 년 양식으로 드시는 분들이 많아요.” 

천연 조미료라고도 불리는 ‘바지락’을 최고 맛있게 먹는 방법은 제철 바지락을 사다가 소분하여 냉동 보관하는 것. 바지락 중에서도 그 맛이 뛰어난 ‘황도’바지락 맛을 아는 똑똑한 미식가들은 지금 이 시기, 바지락을 대량 주문하여 일 년치 양식을 준비해놓기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이것만은 꼭 지키자 했던 철칙이 있어요. ‘언제나 좋은 물건을 보내야만 한다.’라는 것이지요. 바지락, 조개류가 그렇잖아요. 아무리 깨끗하고 맛있는 거라도 모래를 씹으면 맛이 딱 떨어져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좋은 것만 선별, 해감 후 세척을 해서 보내드리자.’였어요. 선별을 하다보면 깨진 조개, 모래가 찬 조개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요. 바지락 하 나 하 나 두들겨가며 확인을 하고 색과 냄새로 선별을 하여 6시간에서 24시간 해감, 이물질 세척까지 마쳐야 발송을 하죠. ‘고객께 만족이 아닌, 감동을 드리자’라는 것을 목표로 일하고 있어요.” 

그의 진심을 아는 고객들은 ‘이제 서야 진정한 게 맛을 알았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평생 함께 하고 싶다.’등의 감사의 메시지와 함께 때때로 간식거리, 양주 등의 깜짝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손님 중 약사이신 분도 있는데, 비타민도 챙겨주시고 선별작업에 허리가 아픈 저를 위해 근육통 완화 약을 보내주시기도 하셔요. 제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 것뿐인데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힘이 납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정직한 바다인의 성실과 정성, 그리고 그 진심을 알아봐주는 평생지기 이웃들이 함께 하는 ‘선장의 아들’. 싱싱하고 깨끗한 바다의 참맛과 더불어 피어나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봄철 황도의 살 오른 바지락처럼 참 맛나다!

※ 안면도‘선장의 아들’-  각종 제철 자연산 해산물 직거래(바지락, 생합, 모시조개, 소라, 대하

쭈꾸미, 문어, 낙지, 갑오징어 등등)

※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1267-29번지T.010-9966-8251

※ http://blog.naver.com/mygury1

<김경아 기자> 

  •  
  •  
  •  

894 다모아바보수산 최창만 박보배 부부

바보온달과 보배공주의 사랑

바보 온달이 살았다. 꼬박 30년을 배만 탔다. 한국의 섬이란 섬에는 독도만 빼고 다 가보았다. 파도와 싸우며 갈매기와 벗했고, 물고기들의 길을 따라 인생을 달렸다. 바다사나이로 굵은 손, 뼈도 굵고, 삶도 굵었다. 수십 년 떠돌기만 한 인생, 배에서 내려 수산물 경매도 하고, 동부시장에서 고파도라는 이름의 횟집도 차렸다. 바다가 그리워 다시 창리 바닷가로 옮겨온 삶, 홍어도 잡고 대구도 잡아 팔며 항아리에서 홍어를 삭혔다. 그 어디에 있건 부인이 있어 날마다 흥이 났고, 그런 나날들은 잘 삭힌 홍어같은 맛이 났다. 스스로를 바보온달이라고 하는 최창만씨. 그 곁에는 늘 아내 박보배씨가 있다. 남편이 진짜 공주처럼 떠받들고 사는 ‘보배공주’는 바다건, 시장이건 바보온달과 함께 라면 좋았다. 생선을 다듬느라 온 몸에 비린내가 배어나는 삶도 장미꽃 향처럼 감미로웠고, 고운 손 물마를 날 없이 거칠게 패여도 그저 함께여서 언제나 웃을 수 있었다. 

창리에서 간월도 방향으로 난 길을 달리다가 버드랜드를 지나쳐 바로 만나는 식당 하나. 오갈 데 없는 화물차 기사들의 마음 편한 주차장이 되기도 하고, 낚시꾼들에게는 국수 한가락 후루룩 말아 먹고 가는 쉼터가 되는 이곳이 바보온달 최창만씨와 보배공주 박보배씨의 일터이자 삶터이다. 이름 하여 ‘소문난 낙지칼국수’다. 글자 한 자 한 자 직접 그려 내건 투박한 간판, 바람에 펄럭이는 만국기들, 그리고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흔들릴 듯한 낮고 낡은 건물. 부부는 그 안에 깃들어 칼국수도 삶아 팔고, 라면도 판다. 초고추장도 팔고 담배도 판다. 식당과 작은 구멍가게를 더해 오가는 손님을 맞는 이곳은 하루 24시간 중 22시간동안 문을 연다. 

“암수술한 9월25일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에요. 항암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마다하고 내려왔는데, 살아서 베풀자 하는 마음으로 포장마차에서 2천 원짜리 국수를 팔았어요. 인건비 없이 재료비만 따져도 1700원 원가에도 못미치는 2천 원짜리 국수를 한 그릇만 팔아도, 주는 기쁨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부인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껏 다려준 자연치유 음식요법으로 어느덧 3년째의 길에 접어든 그는 이렇게 간월도 가는 길목을 지키며 ‘길카페’를 냈다. 사람이 끊긴 날은 바닷바람이 찾아들고, 바다 바람조차 잠든 날은 갈매기들이 쉬어간다. 당신은 바보야 62947, 사랑이 뭐길래 1565, 유일한 사랑 6430, 동반자 9744............화이트보드에 빼곡하게 적힌 보배공주가 좋아하는 노래는 언제나 사랑의 세레나데가 되어 식당 안을 채운다. 

“꽃띠! 이제 시작이여. 이게 다 우리 식구 때문이에요. 우리 식구 업어주려고 요즘 허리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냥 이렇게 국수 한 그릇 파는 재미로다가 살아가려고 해요. 받는 기쁨도 좋은데, 주는 기쁨은 더 좋더라고요. 돈 욕심 안내고 최대한 노력해서 거짓되지 않게 살아갈 겁니다.”

사진을 찍는 중에도,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부인 얼굴만 바라보는 최창만씨. 아픈 남편 곁을 지키며 정성의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낸 박보배씨. 바보온달과 보배공주가 써가는 사랑이야기다. 

<배영금 기자>

  •  
  •  
  •  

893 서산필색소폰앙상블

브라보! 마이라이프~

#퇴근시간. 사무실 문을 나서는 김부장의 발걸음이 가볍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한 이곳은 동문동 소재 상가건물 2층. 길게 뻗은 계단을 쏜살같이 오르는 그에게 50대 중년이란 나이는, 이미 숫자에 불과하다. 

#해 떨어진 저녁. 농장 일을 마친 이씨는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빗고 멋쟁이 신사 모자를 눌러썼다. 깔끔한 조끼에 빨간 나비넥타이, 그리고 검은 모자에 반짝이는 구두까지. 영국신사 저리가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에게 청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상쾌한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서둘러 연습실에 온 주부 강씨는 신바람이 난다. 오늘은 어제 못다 한 ‘여행을 떠나요(조용필)’의 후렴구를 연습하는 날. 신나는 노래에 맞춰 어깨가 들썩거리는 그녀에게 일상의 스트레스는,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인 먼지 같은 존재이다. 각기 다른 모습의 그들이 한 곳에 모인 이곳은 ‘서산 필 색소폰 앙상블’ 연습실. 농부, 회사원, 사업가, 주부, 농원 대표, 방앗간 사장, 전기 기술자, 인테리어 전문가, 등등 다양한 이들이 모두 모였다!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떤 이는 하루가 더디고 어떤 이는 하루가 쏜살같다. 행복역시 각자가 느끼기 마련. 수표 몇 장의 고급 한정식을 먹더라도 그저 그런 한 끼라 여기는 이가 있는 반면, 오천 원 밥상 앞에서도 최고의 식사를 한 듯 뱃속 가득 든든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이가 있다. 일상의 행복은 어떠한가.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 저녁 퇴근 길 풍경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업무에 지쳐 어깨가 축 늘어진 직장인, 오늘 매상이 좋지 않아 짜증스레 셔터 문을 내리는 자영업자, 누구나 어느 날이고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이러한 시름들은 평범한 우리네 인생사이지만 이 역시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어쩔 수 있겠냐며 신세 한탄으로 덮어두지만, 어떤 이는 취미생활, 자기개발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하루를 행복으로 마무리한다. 반짝거리는 금빛 색소폰에 고된 하루를 실어, 길게 내쉬는 ‘숨’과 함께 ‘시름’도 ‘걱정’도 떠나보내는 ‘서산필색소폰앙상블’은 후자. 색소폰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하루를 기쁨으로 채워가는 그들에게 색소폰이란, 또 다른 내일을 살아 갈 ‘힘’이요 인생의 짜릿한 ‘행복’이다. 

“희망의 소리, 힘을 주는 소리이지요.”(서산필색소폰앙상블 회장. 임종해)

 7년 전, 색소폰을 배워보고자 했던 그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에 다녔다. 군 시절 장애를 입은 손가락이 불편했지만 묵직하고도 감미로운 색소폰 소리가 좋아 배우고 연습하기를 반복. 지금은 흘러간 가요를 자유롭게 연주하니 좋은 음악에 정신도, 복식호흡에 육체도 건강 이상 무!이다. 

“대부분 회원들이 5년 이상 경력이 있어요. 학원에서 배워 오신 분들도 있고, 현재 학원을 다니는 분도 있죠. 다들 열정적으로 하시니 실력들도 대단하십니다.”(사무국장. 한동수) 

동호회라 하여 실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웬만한 실력자도 오디션 봐야 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서산필색소폰앙상블’은 실력도 경력도 만만치 않다. 일단 동호회 입단을 희망하는 이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3개월 동안 함께 연습을 하고 활동을 하다 3개월이 되는 시점에 전 회원의 투표로 협회가 결정된다. 실력이며 인성이며 함께 할 만하다 만장일치로 인증된 이들만 회원이 될 수 있으니 그들의 공연이 전문가 못지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린 밥 먹으러 가도 신발 끈 안 매요. 서로 대접하고 싶어서 안달이죠. 회원들 각자가 동호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추가로 필요한 경비가 있거나 물품이 있어도 자발적으로 채워 넣고 회장님과 임원진의 통솔에 따라 한 몸으로 움직이죠.” 

40대부터 60대. 다양한 모습의 이들이 함께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는 그만큼 투명하게 운영하고 모든 일을 투표로 결정하는 지혜로운 리더십 때문. 각종 공연과 행사를 앞둘 때마다 완벽하게 프로그램을 짜고, 무대, 조명, 음향, 객석, 각종 시설을 총체적으로 진두지휘 협력하는 임원진과 회원들은 서로가 리더이고 서로가 동역자이다. 

“엔터테인먼트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셔요. 일단 공연이 있으면 모든 걸 다 책임지니까요. 한 시간을 하든, 두 시간을 하든, 음악을 아는 분들이든, 모르는 분들이든, 모두가 함께 호흡하며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죠.” 

‘서산필색소폰동호회’의 또 다른 특별함은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 엔터테인먼트를 방불케 하는 사무국장의 인맥과 기질은 동호회의 위상을 한 층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가수, 댄서, 민요 예술단 등 다양한 이들을 어느 때라도 동원 할 수 있기에 그들의 공연은 흥미진진 신바람나기 마련. 색소폰 연주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공연을 감상 할 수 있으니 ‘서산 필’이 하는 공연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감상평이 허다하다. 

“연주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어요. 연주가 끝난 후, 고맙다 손을 잡으시며 눈시울을 붉히는 어르신들을 뵐 때 저희들 역시 감사하고 행복해지지요.” 

공연 뿐 아니라 봉사에도 열심인 그들은 지난 10주년 콘서트에는 공연 수익금 모두를 봉사단체에 전달해 자리에 함께 한 이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색소폰, 그 빛나는 악기로 내 인생의 행복도 이웃의 행복도 맘껏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는 멋쟁이들의 동호회, ‘서산필색소폰앙상블’. 그들이 불러내는 감미로운 노래가 참 멋지다!

<김경아 기자>

  •  
  •  
  •  

892 해미초등학교 가족캠프

학부모, 학생, 교사 3주체의 행복을 담아낸 가족캠프

2016년 6월 10일 금요일 오후 해미초등학교 교정이 들썩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1박 2일 가족캠프가 열리는 첫날, 각자 가져온 텐트를 치고 학부모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갖고 아이들은 뛰어 노느라 이곳은 공부시간이 아닌 캠프장의 풍경으로 잠시 공부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학교가 많이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어 2시간 정도 행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해미초등학교 가족캠프를 진행하기 위하여 학교는 학부모들과 3차에 걸친 논의를 진행하고 학부모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하여 2번의 설문 조사를 거쳐서 준비되었는데, 학교행사에 대해 학부모들이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가족 캠프는 37가족 130여명이 참여했다. 학교 곳곳에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텐트를 설치하고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먹했던 분위기는 차츰 사라지고 교육가족임을 서로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날 행사의 프로그램은 가족 요리 왕, 레크리에이션, 가족의 발 모양 그리고 글쓰기, 당산 등반하기 등으로 진행이 되었고 학부모들과 교사들 간의 소통의 경로가 되었던 의미 있는 행사였다. 특히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전문 강사를 초빙하여 진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요즘의 현실이 부모는 맞벌이로 바쁘고, 학생들은 방과 후에 학원에 다니느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이 지내는 날들이 많은데,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도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6학년 김기현 어머니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준 캠프라서 저녁식사도 준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갔어요. 아이들과 고기도 구워서 맛있게 먹고 재미있는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오랜만에 땀 흘리며 아이들과 재밌게 놀다보니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구요. 매일 일한다는 핑계로 힘들다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놀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학교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웃으며 놀아보았어요. 다 큰 아들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업어 볼까요. 한 뼘은 훌쩍 커버린 아들이 무겁긴 해도 가슴에 뭔가 뭉클함이 있었어요. 올 한 해 만이 아닌 앞으로도 이런 캠프 한 번씩 해주시면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네요.” 라는

가슴 찡한 소감을 표현했다. 또한 아들인 김기현 학생은 “가족캠프를 통하여 친구들, 친구들의 부모님들과도 정을 쌓고 몰랐던 부모님을 알게 되어 좋았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하룻밤이었지만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라고 말했다. 3학년 1반 김주리, 2학년 1반 김미리 아빠(김동수)는 “학교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니까 아이들하고도 친해졌고 학부모와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얼굴도 익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게 되어 너무 좋은 기회였습니다.” 라는 소감을 남겼는데, 행사가 끝나는 시간까지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도 훈훈했다. 행사를 진행하는 김용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행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모두가 행복한 1박 2일의 여정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해미초등학교는 학생, 교사, 학부모들의 교육의 3주체가 학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필자의 모교이기도 한 해미초등학교가 자랑스럽고 흐뭇했다.

이병준 교장선생님은 “획일적인 교육을 탈피해서 창의성도 길러주고 바른 인성을 길러주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약속을 실현 하는 거죠. 조급하게 안하고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여유를 갖고 내실을 기하는 차별화된 교육으로 경쟁심보다는 묵묵히 갈 길을 간다는 생각으로 자체적으로 부모님과 하는 활동을 통해 행복한 가정,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라는 소신을 밝혀주었다.

<김영주 기자>

---------------------------------------------------------------------------

해미초등학교는 2015년 행복 나눔 학교 공모에 응모하여 선정되었는데 충남 지역 초등학교 중 15개 학교만 뽑혔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연구학교가 선정되어 교육의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노력하였지만 교육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을 살펴보며 교사들은 사람의 변화에 대해 주목했다. 2015년은 관성화 되어 있던 학교 문화와 수동적인 학생들이 참여하는 수업활동, 단절과 경직되어 있던 교사 문화를 과감하게 혁신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해미초등학교의 다양한 모습을 진단하면서 덜어낼 것과 꼭 해야만할 것과 최우선 중심으로 두어야 할 것을 전체 토론을 통해 정리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교육과 관련 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또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배움을 일으킬 수 있는 배움 중심공동체 수업활동을 진행하고 학부모들과의 다양한 소통을 위해 차분하게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6년에는 학생들의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배움 중심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진행하면서 수업 임상연구를 직접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여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를 일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쳐가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교실 안에 머무르기 보다는 직접적인 체험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목재과학 올림픽, 판소리 체험, 숲길 체험 등 학생들의 피부에 와 닿는 활동을 진행하였고 일주일 동안 진행된 봄 계절학교는 분산되어 있던 체험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여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꾀하며 3월부터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힘들어 하던 학생들에게 쉼표를 주어 학교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학생들의 참여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운동회에 준비 위원회에 전교 어린이 회장단이 참여하여 학부모, 교사, 학생들이 모여 학교의 행사를 논의하는 민주적인 과정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  
  •  
  •  

891 오주화 작가

꿈을 꾸는 그녀,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 되고 길이 되다

오주화 작가. 긴 생머리에 활짝 웃는 미소가 매력적인 멋진 그녀가 떴다. 그녀의 조근 조근 친절한 설명은 모두의 귀를 쫑긋 살아있게 만든다. 붓을 움직이는 그녀의 손끝은 모두의 두 눈을 반짝이게 하며 집중 시킨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지켜보던 수강생들은 잠시 고민하다 싶더니 곧 바른 자세로 검은 먹물에 붓을 살짝 담그고 과감하게 손끝을 움직인다. 붓을 잡은 모든 이의 눈빛은 진지하게 살아있다. 같은 주제지만 각자의 화선지에는 다른 모습으로 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직 4주차 수업이지만 전문가처럼 멋진 작품이 뚝딱 화선지에 나타난다. 붓이 멈출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이의 호기심과 감탄을 자아낸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대산읍의 ‘카페 안나’ 이 작은 공간에는 캘리그라피와 사랑에 빠진 그녀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묵묵히 이끄는 오주화 작가. 전직 방송국 작가였던 그녀는 독학으로 열심히 배운 캘리그라피를 필요로 하는 지역 주민에게 재능기부 하고 있다. 남을 위해 나누고 있는 무료 강습 시간이 오히려 본인에게 큰 감동과 활력소가 된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방송작가를 하면서 자막이나 폰트가 꽤 다양하다는 것을 접하게 되었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폰트는 캘리그라피였습니다. 처음에는 캘리그라피에 대해서 잘 몰라 막연히 신기하고 예쁘다고만 생각을 했죠. 결혼하고 일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오면서 조금 느긋해진 시간을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캘리그라피 독학으로 채워나갔죠. 혼자서도 충분히 배우면서 자격증을 따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을 저를 통해서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카페 안나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을 보러 오면서 오주화 작가는 뜻하지 않은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대산읍에 사는 많은 주민들이 멀리 나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또한 그녀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무료 강좌의 재능기부를 다른 분야로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저는 캘리테라피(callitherapy)라고도 부르고 싶어요. 글씨를 쓰는 과정을 통해서 내면의 나의 감정들이 나오고, 심리적인 부분들이 나도 모르게 충분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글씨를 아무리 못써도 나의 감정과 느낌들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캘리그라피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같은 주제여도 각자의 생각과 감정들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다른 결과는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수강생 모두는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조용하게 내면의 또 다른 나의 모습과 마주 할 수 있어 마음 수양이 된다고 한다. 늘 똑같던 수요일이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해지고 이곳에 꼭 와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생긴 것 또한 큰 변화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바른 자세로 글씨를 쓰다 보니 자세도 많이 교정되었다고.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 뿌듯함과 성취감은‘참 잘했다’라고 나에게 덤으로 주는 칭찬이다. 그 칭찬이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 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보답을 하며 가족들 모두 달라진 아내와 엄마의 모습에 고마워한다. 또 많은 응원을 보내준다고.

“어릴 때부터 꿈이던 방송작가가 되어 너무 기뻤고 일중독이라고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일에 매진을 다했어요. 결혼과 동시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기란 정말 쉽지 않았죠. 상실감도 무척 컸고, 작가의 일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저와의 대화 시간도 많이 가졌습니다. 지금 캘리그라피 무료강습도 나를 위해서 시작 했어요. 수강생 에게 알려드리며 저 역시도 학생의 입장으로 늘 배우고 있답니다. 또한 편안해지고 치유가 되고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그리고 드라마 집필도 하는 것이 또 다른 꿈이자 목표 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배우고 노력하며 꿈꾸는 오주화 작가.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수강생들 역시 그녀를 통해 또 다른 꿈을 꿈꾼다. 알록달록 단풍이 무르익을 때쯤 멋지게 작품 전시회를 하며 모두 하나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많은 이에게 꿈을 꾸게 하며 희망을 전하는 오주화 작가. 그녀의 꿈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용기를 얻길 응원한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12시. 캘리그라피 무료강습

✽서산시 대산읍 구진로 47. 카페안나 (☎041-664-4689) 

<이지희 기자>

  •  
  •  
  •  

890 부성초 동문화합대회를 치르고 나서

동문화합 대회 속 빛나는 50회동창회장

지난 11일 서산시 지곡면 부성초 교정에서는 부성·대성(초) 동문 400여명이 모인가운데 동문화합대회(회장 김영철/권혁민)가 개최 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많은 지역인사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400여 동문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해마다  자리만 지켰던 원로 기수를 위한 새끼줄 꼬기와 장기·바둑대회의 병행은 폭넓은 참여 기회를 마련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올해로 3년째 화합대회를 합동 개최하고 있는 부성·대성(초) 동문회는 ‘함께 하는 동문, 화합하는 지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출신학교를 떠나 지역 선·후배간의 소통과 화합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불경기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내실 있게 치러졌다는게 참석한 동문들의 하나같은 목소리였다.

행사 당일 날씨는 성하를 목전에 둬서 그런지 약간 더웠다. 그나마 한 두 차례 소나기가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 주었다. 시골이다 보니 농번기를 피하고, 지역 행사와 겹치지 않으려 해도 요즘은 워낙 행사가 많아 날짜 잡기가 녹록치 않다. 거기다가 후배 기수로 내려갈수록 저조해지는 참석율도 문제이다. 이농으로 인한 졸업생 감소가 표면적인 문제지만 대부분 타지에 살다 보니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게 참석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동문회에서 필자가 맡은 직책은 홍보부장으로, 주요 업무는 인쇄물 제작과 문서수발, 사진촬영 정도이다. 처음에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대하며 말 그대로 ‘동네욕’ 이나 먹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선배라는 위치가 훨씬 어렵고 불편한 자리라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올해 두 세 명의 후배들을 받아 보니 말이다. 사회에서와 달리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후배만큼 어려운 게 없다.

그리고 처음에 간과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로 졸업 후 30여년에 만나는 친구들의 모습이다. 필자의 기수는 1984년 50회를 50명이 졸업했다. 이중에 안타까운 소식을 듣거나 연락두절 또는 행방이 묘연한 친구들을 빼면 40여명 남짓 된다. 여기서 동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들은 불과 예닐곱에 불과하다. 대부분 자주 보는 얼굴들이다. 간만에 보는 몇몇 친구들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봐도 기억 저편 일 때가 많다. 시시콜콜한 조각들을 갖다 맞춰 봐도 한계에 이르면 그냥‘야’‘너’로 쉽게 갈무리 하고 만다. 길에서 만나면 영락없이 중년도 한참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 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동창처럼 수십 년이 지나도 마음 편하게 대할 친구도 없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건 초등학교 동창은 만나면 항상 함께 했던 6년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학창 시절 때 섭섭했던 일들을 불쑥 던져서 얼굴을 붉히게 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간혹 변한 친구들도 보인다. 어디에 살던 무슨 일을 하던 동창회에 나와 종적 잣대를 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무엇인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자기 입에서 나오면 나올수록 남에게는 받기 어려운 법이다. 나이를 먹다 보니 다들 웃어넘길 여유는 생겼지만 솔직히 두 번 듣기는 민망하다. 이유야 어쨌든 초등학교 동창회는 어느 곳에서 하던 주위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늘 시끄럽기만 하다.

이번 행사를 치르는 동안 씀씀이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평소에도 건실한 친구로 알았지만 작년 동창회장을 맡은 후로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종철 회장이다. 지난해에는 학교대항 계주에서 ‘실신투혼’을 보여준 적이 있다. 다행히 별 탈은 없었지만, 올해에도 달리다가 또 쓰러져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 친구여서 적당히 하라는 동창들의 만류가 빗발쳐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참여율이 높아 진다고 웃어 넘긴다. 또 간만에 만나는 동창 한명 한명을 챙기며, 고기를 굽고, 반찬을 내는 모습이 마치 고향을 찾은 귀한 손님을 대하는 듯 하다. 30여년 만에 찾은 교정에서 이런 멋진 친구와 첫 대면을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먼 거리를 찾아온 보람이 들지 않을까? 그리 넉넉하게 살진 못해도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풍요로워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내세울 일도,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다음날 정말 고생 많았다는 안부전화까지 받으니 가슴 한켠이 뭉클해진다. 주위에 자수성가해서 찾아온 친구들의 영웅담을 들으며 느끼는 대리만족도 좋지만, 나에게는 이런 친구가 우리 50회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는 게 더 없이 행복하기만 한 하루였다.

<박홍식 기자>

  •  
  •  
  •  

889 백제의 가악,다시 살아나다

백제의 가악, 다시 살아나다

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이보다 더 빠를 수 있을까. 구성진 ‘시조’ 한 소절에, 화려했던 ‘백제의 숨결’이 되살아난다. 누군가는 노래를 세상에서 가장 빠른 타임머신이라 했다. 시조에 가락을 얹어 자유롭게 고저장단을 어우르니, 그 농익은 음색에 두근거렸던 가슴이 녹아내리고 그 옛날 선조의 푸르른 기상은 다시 꽃을 피운다. 찬란하고도 아름다웠던 백제의 가악, 그를 세상에 불러낸 건 일흔이 넘은 ‘젊은 명창’, 박선웅 옹. ‘내포제 시조’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였다.

“아차.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왜 남의 것을 따라 뜬구름 잡고 있나. 무릎을 탁 쳤지. 그 때, ‘내포제 시조’가 떠오른 거야. 내 것을 살리자. 우리 지역 시조를 다시 살려내자 해서 책을 찾기 시작했지.” 

2005년, 이미 명창의 반열에 올랐던 박선웅(인규) 옹은 절정의 자리에서 ‘내포제(內浦制) 시조’를 떠올린다. 종이도 책도 마땅치 않았던 옛 시절, 스승에게 받았던 가르침을 되새기며 책을 수소문 하던 중, 눈에 띈 것은 국기함. 국기와 함께 들어 있던 낡은 종이 뭉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포제 시조’ 5선보 시조집 1집이었다. 

“그 옛날, 종이가 있었간디. 지도였지. 지도를 오려서 적은 게 악보였어. 그걸 찾아 공부하고 연습하고, 그렇게 해서 ‘내포제 시조’를 다시 불러낸 겨.” 

1962년 유병익, 유흥복 선생으로부터 ‘내포제 시조’를 사사 받아 입문한 박선웅 옹은 이후 탁월한 음색과 끈질긴 노력, 끊임없는 연구를 거듭해 1984년 ‘전국 시조경창대회 문공부장관상’.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 장원’, ‘백제 문화제 시조경창대회 대통령상’을 휩쓰는 영예를 안는다. 이후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더 명확하게 시조를 읊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개구리호흡법’, ‘모음자음법’, ‘음계상조법’을 개발한 그는, 이후 1986년 카세트와 CD를 제작, 보급하며 전국적인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다. 

“‘내포제 시조’는 백제의 가악으로 성행했던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여. 그 당시 일본까지 전파되어 애창되었던 만큼 그 인기가 대단혔지. 그랬던 것이 이후 편곡시조의 유행에 점점 시들어지게 된 겨. 내포제 시조를 지도하던 사범들도 하나 둘 등을 돌리고 나도 석암제 시조를 배우기 시작 했은 게, 오랫동안 우리 것이 빛을 잃었었지.”

1943년 이전, 내포지역의 방언으로 기록되었던 ‘내포제 시조’는 서산, 당진, 예산, 홍성을 포함한 내포지역(충남 서북부지역)에서 불려오던 시조의 한 갈래로 우리지역 대표 전통음악이다. 선율선보 5선보로 가야금의 음계와 변경하지 않은 충청도 사투리를 시로 그대로 표현하여 부르기에 아기자기하고 슬픔이 덜하며 통성을 사용해 우렁차고 구수한 시조로 특색이 있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우리 지역 대표 전통음악이었으나 이후, 편곡시조의 부흥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2014년, 박선웅 옹이 ‘내포제 시조’로 충남무형문화재 17-2호 보유자가 되면서 다시 부활, ‘서산정가보존회’의 회원들과 함께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옛날에는 주막에 모여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다 같이 시조를 혔어. 두어 시간 자다 다시 일어나서 시조를 하고 그렇게 재미가 났지. 모여 밥먹고 술도 사먹고 시조도 하다 이럴게 아니다 단체를 만들자. 해서 9명이 3500원을 모아 등기를 냈어. 지금 돈으로는 2, 3천만 원 정도 될 껴. 그렇게 ‘정악원’이 생기고, ‘시우회’로 이름을 바꿔 지금은 ‘서산정가보존회’가 된 거지.” 

1945년 8월,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서산지역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서산군정악회’는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문화예술단체로 현재 ‘서산정가보존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지역 시조의 계승,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금들은 시도 모르고 가락도 생소하니 찾는 이가 많이 없지. 누구나 배우면 할 수 있는 게 시조여. 우리 것을 배우고 익히고, 전해서 다같이 보존, 계승, 발전시킬라고 노력해야 우리 지역 문화예술, 더 나아가 지역의 발전이 가능하니 더 열심히 가르치고 노력해야지.” 

창립 당시 400여명이 넘으며 근대 서산 문화의 메카라 불리웠던 ‘서산정가보존회’는 현재 25명의 회원이 함께 하는 등, 어려움이 있지만, 매주 모임과 무료 강습을 이어오며 우리 지역 문화 유산의 계승, 발전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제부터 내려오는 우리 지역의 유구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부흥시켜야지. 소외 되가는 우리 소리를 되찾고 함께 즐겨서 서산의 소리가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도록 모두가 하나가 되야 혀.” 

중요한 문화컨텐츠는 그 가치의 계승, 발전, 활용에 이어 지역의 브랜드화를 이끌어 지역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1500년 전 백제로부터 이어지는 우리 서산의 소중한 지역 문화, 그 귀한 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 아니한가. 우리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 일흔이 넘도록 우리 소리를 노래하는 멋쟁이 명창 박선웅 옹. 그의 행보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우리 지역 문화 발전에 동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서산정가보존회’의 시조무료강습

매주 화요일 오후 6시30분 / 서부 상가 3층

충남무형문화재 제 17-2호 박선웅(010-5450-2414)

충남 내포제 시조 보존회 회장, 충남 정가지도 사범, 서산시 정가 보존회, 서산 종묘 농약사 대표 

 <김경아 리포터>

  •  
  •  
  •  

888 만대 솔향기길염전 정갑훈 대표

만대 솔향기길염전 정갑훈 대표 

40년 소금인생, ‘소금꽃’으로 피어나다

뜨거운 햇볕을 온종일 받은 염 판의 염수가 안으로 고이고 고여 눈물조차 말랐다. 잘박잘박한 가슴위로 차오르던 바람이 다독다독 더 따스한 기운을 보태니 바다를 향한 그리움은 마침내 함수위로 떠올라 소금 알갱이가 되었다. 아주 작은 꽃잎처럼 함수 위를 수놓던 소금알갱이는 바람과 햇볕을 더욱 담뿍 머금고 끝내 소금 꽃이 되었다. 고른 타일위로 하얗게 피어 떠오르는 소금 꽃이 염수 속으로 모조리 낙화를 하면 소금밭은 이내 하얀 눈 같은 소금으로 차오른다.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5월과 6월, 태안의 땅끝 마을인 만대에 자리한 ‘솔향기길 염전’에 소금 꽃이 피어오른다. 소나무들이 온통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솔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염전’으로 불리는 이곳은 5월과 6월 송화 가루가 노랗게 내려  앉는다. 바다와 햇볕, 바람이 만들어 내는 자연의 선물에 솔향기 품은 송화 가루까지 머금어 바다의 작은 금 ‘소금’은 바다의 진짜 ‘황금’이 되었다. 

서른 살부터 염전 일에 뛰어 들어 올해로 40년을 맞는 염전지기 정갑훈(69)씨의 5월과 6월도 매일같이 등에 소금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그 오랜 세월 정성과 노력으로 들인 열정은 날마다 목 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되고, 그 땀은 옷에 하얗게 말라붙어 소금 꽃이 되었다. 40년 세월 소금을 붙든 그의 손 역시 짠 기운으로 매일 같이 절여진 짠 내 나는 손이 되었다. 

“4월 28일 송화가 개화를 했어요. 5월 내내 송화 가루가 날리더니, 6월 8일까지도 염 판 까지 송화 가루가 날렸어요. 소금이 제일 좋은 때가 이때에요. 지기가 올라 지열도 높고, 바람도 순한 바람에 태양도 따스해서 소금이 아주 순해요. 

3월에 생산한 소금은 지열도 안받아주고 바람도 순한 바람이 아니라 식용으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요. 6월이 넘어가 7~8월 장마가 오면 소금 생산량도 뚝 떨어져요. 9월~10월은 지기가 떨어지면서 바람이 강해지는 시기에요. 소금발이 가는 꽃소금이 오는 때죠. 10월~11월 소금도 3월의 소금처럼 식용으로 보내지 않아요. 사료공장이나 제설용으로나 보내요. 

소금이라고 다 같은 소금이 아닌 걸 제가 아니까 돈 몇 푼에 마음을 팔수는 없어요. 그렇게 만들어낸 소금은 1년차부터 6년차까지 보관되고 원심분리기를 사용해서 좋은 소금에 불필요한 요소는 모조리 제거하고 있어요. 자신 있으니까 서울 코엑스에도 가고, 부산 벡스코에도 가고 그러는 거예요. 천일염 하면 신안신안 하니까 아주 미치고 환장해요. 신안의 천일염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정갑훈 대표는 6월 3일에 시작된 영목항의 ‘씨푸드페스티벌’에도 매일같이 왕복 150km를 달려가 ‘솔향기길염전’ 소금을 홍보하고 있다. 개막식 행사에는 통 크게 많은 소금을 관광객 사은품으로 나눠 주었다. 

솔향기길 염전의 소금을 알리는 것이 태안의 웰빙 소금을 알리는 것이고, 또 태안의 자랑거리인 솔향기 길을 홍보하는 것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꽉 찬 그. 평생의 고집이 되고, 신념이 된 40년 소금인생은 하얀 소금 꽃이 되어 날마다 날마다 피어오른다.  

 

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바슬바슬 맑은 소금 인생

40년 소금 인생을 산 정갑훈 대표는 처음부터 소금쟁이가 아니었다. 이원면 사창1구에서 태어나 지도자도 해보고 명예경찰도 해보고 20대에 이장도 해본 그는 공사장 일도 하다가 완도사람의 제안에 해태양식을 시작했다. 

완도 식으로 한 해태농사는 풍랑에 다 휩쓸려 버리고, 다시 시작한 미역양식 마저 태풍이 앗아가 버렸다. 그 사이 배신도 겪고 돈도  날리며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김 농사는 김 반 파래 반 반백이라 판로조차 없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굴뻑도 주워 날라다 팔았지만 더는 나아갈 수 없이 주저앉고만 싶었던 시절, 사창1구의 일곱 마지기 땅을 팔아 염전 2정(6천 평)을 사서 소금 일을 시작했다. 그

리고 그 일은 소금 값이 좋지 않을 때 잠시 한 건축 일을 빼고는 69세 그의 평생 업이 되어왔다. 소금에 관해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소금에 살고 소금 울고 웃는 그는 소금 이야기만 나오면 신나는 청년의 눈빛이 된다. 

“바닷물을 가둔 함수가 1차에서 5차까지의 증발지를 거치며 염도 7%가 되요. 1%씩 올라가서 25% 까지 증발되면 타일판에서 아침 5~6시부터 12시간을 놔둡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는 소금 꽃이 피기 시작해 4시가 되면 확 영글어 버려요. 6시부터 생산을 해서 최고 6년까지 저장을 해요. 황토를 다진 판에서 거둬들이는 토판염이나 5~6월의 송화가루를 머금은 송화염이 우리 솔향기길 염전이 만들어내는 웰빙소금입니다.”

염전은 바닥이 그냥 흙인 토판염과 옹기를 깔아 만든 옹패염, 타일을 깔아서 하는 타일염, PVC장판을 깐 장판염으로 나뉜다. 보통의 많은 염전에서 하는 것이 장판염인데, 이곳 ‘솔향기길 염전’에서는 건강에 좋은 타일염을 기본으로, 황토를 깔아 다져 만든 토판염도 같이 한다. 

소금의 맛과 건강, 위생과 염분까지 늘 고려하는 그인지라 그 어느 소금보다 손이 많아 가고 힘든 토판염 역시 귀찮다 하지 않고 생산한다. 

“토판 염을 할 때는 타일을 걷어내고 황토를 깔아 롤러로 굴려야 해요. 토판염전에 들어갈 때는 장화를 신어서도 안되요. 장화자국이 남으니까 방수가 되는 천으로 발을 싸맨 버선발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 해요.”

그의 염전이 솔향기길 위에 있다 보니, 솔향기 길을 찾은 관광객이 소금밭 체험객이 되기도 한다. 그는 가족단위의 체험 객이 찾을 때마다 소금에 관한 척척박사는 물론 마술사가 된다. 소금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설명하며, 소금을 만드는 과정을 함께 하기도 하고, 지루해하는 아이들에게 빨대 하나로 2홉들이 빈 병을 과학적 원리로 들어 올려 주기도 한다. 

또는 “인생을 살며 세 가지 금을 지녀야 한다”며 “첫째가 소금, 둘째가 황금, 셋째가 지금”이라는 삶의 철학을 전하기도 한다. 

그는 또 우리 지역에 흔치 않는 변검술사이다. 검술을 하며 가면을 바꿔치기 하는 기술이 워낙 특별한지라 무대에 오르면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받는 그는 6년째가 된 변검술을 어린이집이나 특수어린이집, 성봉학교, 서산의료원, 요양원 시설 등을 다니며 재능기부 한다. 

태안의 대표적 공연인 별주부전에도 용왕과 보고책사 등의 고정 배역을 맡으며 그만의 끼를 뽐낸다. 연극단 활동을 하는 있는 그는 어느 광고에서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다’는 문구를 보고 연극배우 지원을 했다. 그런 그의 열정은 소금밭에서도 피어나고, 연극판에서도 피어난다. 

그 틈틈이 서울로, 목포로, 부산으로 다니며 솔향기길 염전의 소금을 홍보하기도 하고, 서구청이나 청계천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여해 태안의 소금을 알린다. 그러다 보니 그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라다. 봉사하는 시간을 충당하며 소금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벽잠을 줄여야 하기에 그의 기상 시간은 새벽 3시다. 

 

너 붕붕 아기집 - neo bungbung agijib

“저는 소금박사도 아니고, 소금쟁이도 아니에요. 개구쟁이고 떠돌이에요. 몸에 더 건강한 소금을 만들어내는 일도 즐겁고, 가면을 쓰고 봉사를 다니는 것도 좋아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우리 태안의 소금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고요. 소금이나 봉사나 연극이나 다 저를 지탱해주는 삶의 버팀목이고, 또 즐거움이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우리네 인생에 소금처럼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배워왔던가. 소금밭에서 살며 스스로의 삶을 소금처럼 꼭 필요한 삶으로 만들어가는 가는 정갑훈 대표. 5~6월에 생산된 소금은 가장 어여쁜 우유 빛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소금도 있고, 황토 빛을 머금은 소금도 있다. 

그의 인생을 소금으로 치면 바슬바슬 맑은 소금이다. 5~6월에 생산되는 우유 빛 소금이다. 나이 69세에도 청년의 열정으로 사는 삶은 그래서 우유 빛 소금 산처럼 아름답다. 

솔향기길 염전-충남 태안군 이원면 내리 182-5(☎041-675-7892/010-8519-7892)

  <배영금 기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