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긋는 이유 - seongho geusneun iyu


미사 중 복음을 낭독하기 전 작은 십자성호를 긋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십자 성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큰 십자 성호와 작은 십자 성호입니다.

큰 십자 성호는 우리들 천주교 신자들이면 누구나 다

기도나 예식을 전후해서 긋고 있습니다.

먼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 끝을 모아 붙인 다음
이마와가슴과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에 대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는 것이지요.

이 동작을 하므로써 사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진리들인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하셨다는

구원의 신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십자 성호는 미사 때 복음을 듣기 전에 사용됩니다.

이때 작은 십자가를 이마, 입술 그리고 가슴에 긋는 것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머리로 받아들여 간직하며

또 이를 입술로써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더욱이 가슴에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마음으로 이해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미사 때 복음을 듣기 전에

이 작은 십자 성호를 그으면서 우리의 복음전파 사명을 다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부산주보 1998. 8. 16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상대방을 개의치 않고 정식으로 기도를 한 적이 드문 것 같아요. 간혹 상대방이 신자여서 성호를 긋는 경우, 대충 성호만을 따라 긋고 아니면 아예 기도를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김진국(대건 안드레아ㆍ32세)씨는 얼마 전 대학동기 모임에서 4명의 신자 친구 중 식사 때 기도를 하는 친구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봤지만 단 한 사람도 식사 전 기도를 하는 이가 없어 무척 놀랐다고 설명한다.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갈 때는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동으로 식사 전 기도를 바치거나 아니면 개별적으로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 친구를 만났을 때는 기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김진국씨.

실제로 많은 신자들 중에는 김진국씨처럼 식당이나 기타 모임 장소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바치는 신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 가톨릭 신자가 가장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말로써 하는 기도가 아닌 성호를 긋는 기도조차 제대로 바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일선 사목자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심지어 어떤 신자들은 어느 모임에서 식사 전 기도를 주송하라고 지명당하자 식사 전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경험을 했다고 전한다. 거창한 기도를 하라는 주문도 아니고 간단한 식사 전 기도만을 하라는 요청에도 이처럼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신자들의 모습이 기도생활에 익숙치 않은 한국교회 많은 신자들의 현주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천 간석동본당의 이지민(안젤라ㆍ27)씨의 경우 「어떤 모임에서든 의식적으로 성호를 긋고 마음속으로나마 간단한 기도를 빼놓지 않고 바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기도를 통해 스스로 신앙인임을 밝힐 수 있어 좋고,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친구들을 가톨릭에 호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보란듯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런 이지민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매사를 살아가는 신자수는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며 기도한다는 것은 신자의 표시라고 배워왔다. 더욱이 성호경은 입과 손과 마음, 즉 자신의 온 존재로서 신앙의 근원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고백하고 구원의 도구인 십자가를 표시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은총을 비는 기도라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믿음의 표현으로서 믿는 사람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할 이 기도가 잘 행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이유가 없이 남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선 사목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신자들 중에도 간혹 개신교 신자들이 식당에서도 열심히, 그리고 진지한 기도모습에 놀라울 때가 많았다고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의 기도 모습에서 그들과 같은 진지함을 찾아보지는 못했다고 전한다.

가톨릭 신자들의 이러한 기도습관과 태도가 생활화 돼 있지 못한 원인에 대해 일선 사목자들은 우선 기도하는 습관의 부족과 공식적인 틀에 얽매인 신앙생활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로 고착화된 신자의식이 제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며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심을 알리는 표징」인 이십자성호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올바르게 그을 수 있을 때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신자로서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어릴 적부터 기도가 생활화돼야 하는데도 많은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춤이나 노래는 열심히 가르칠려고 온갖 애를 기울이면서도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일선 사목자들은 지적했다.

또한 신자들이 성호긋기를 두려워하는 원인으로는 신앙생활에 대한 자신이 없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결과로도 지적된다.

따라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고 그러한 삶의 진실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십자성호를 당당히 긋는 그런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과 무한한 자비의 증거이고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하느님의 힘의 상징을 나타낸다.

이처럼 십자가가 우리 신앙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십자성호를 그을 때의 우리의 마음자세도 보다 신중하고 경건해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진정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주 반복되는 행위는 쉽게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습성에 물들지 않도록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세례 때 고백한 신앙을 새삼 기억하고 새롭게 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십자성호는 그 자체로서 가장 간결하면서도 그리스도 신앙을 대변해 주는 신앙고백문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기도할 때는 물론 모든 일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언제나 손으로
십자(十字) 모양을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외우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둘째,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상기하는것이며
셋째, 이 동작으로 우리가 천주교 신자임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예비신자교리서 발췌

기도가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면, 성호경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기도란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시각에서 봤을 때 “엄마야” “아! 하느님!” “앗, 예수 마리아 요셉” 등이 모두 기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절박함에 부르짖는 소리는 짧고 강합니다. 무슨 일로 인해 깜짝 놀랐던 경험을 기억해 보면, 내가 그 순간 겪게 된 일의 충격과 시급함 때문에 나를 도와줄 누군가를 정확히 부르는 것이 기도의 내용에 앞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내 소리를 들어야 할 상대를 부르지 않고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엄마야”에서 엄마는 내용 설명을 들으셔야 알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긴 설명 없이도 무엇으로 인해 우리가 놀랐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돌리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고,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 하느님께 아뢰는 습관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친밀감을 계속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호경보다 짧은 기도는 급할 때 주로 하게 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속풀이에서는 그런 비정형화된 기도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가장 짧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무리 짧다고 해도 하느님의 세 위격(person, 신학에서 쓰는 어려운 말로는 hypostasis)을 부르는 기도인 만큼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성호경은 입으로 기도문을 외는 것만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 몸에 긋는 행위를 동시에 하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때 성부, 성자, 성령을 부릅니다.

저는 유럽 리그에서 뛰는 적잖은 축구 선수들이 자기 자신에게 십자가를 아주 재빠르게 긋고 나서 그라운드의 잔디를 가볍게 손으로 훑은 다음 경기장으로 달려드는 것을 볼 때마다 궁금해 합니다. ‘저 친구들, 그 몸짓의 내용은 알고 저러는 걸까?’ 어릴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을 보고 자란 선수들이 십자가를 그리며 바치는 이 기도의 의미는 모르고 손짓으로만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호경은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우리가 하는 일의 앞뒤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더욱 더 넓게 이해하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의 신앙 역사의 시작과 끝에 바치는 기도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신앙 여정의 시작 기도로서 성호경을 바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의 마지막에도 이 짧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이고요.

삼위일체로 설명되는 ‘하나이신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당부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우선 나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 존재이고, 그런 내가 하는 기도가 하느님의 것이 되고,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되기를 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끝에 다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내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나의 삶과 기도, 내 일상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되고 수렴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성호를 긋는 게 부끄러워서 속으로만 성호경을 암송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뭐, 저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혹은 눈앞에 있는 먹을거리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아야 성호경을 바치는 매우 허술한 인간이기에 그런 분들이 분명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스링크에 들어서서 자신의 연기를 펼치기 전에 국민 여동생 김연아 스텔라가 보여주는 모습에 감탄만 하실 것이 아니라, 나도 연아처럼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십자가를 고백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짧은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일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에 굴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기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 자신에게 십자가를 그어 줌으로써 스스로를 축복하고 격려해 주고 있다는 것이 새롭고 놀랍지 않나요?

내가 나 자신에게 해 주는 축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마음의 태도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결국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격려해 주는 행위 자체도 매우 의미가 큰 것인데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더욱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과 그들 가족들을 보며 함께 울고 마음 아파하고 우울함에 빠져 있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계속 그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을 기억하고 축복해 달라고 우리가 함께 하느님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짓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성호경이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