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이 추구하는 가치 - yugwansun-i chuguhaneun gachi

Obituaries|더는 간과하지 않겠습니다:유관순, 일제 통치에 저항한 한국 독립운동가

https://www.nytimes.com/2018/04/02/obituaries/overlooked-yu-gwan-sun-korean-translation.html

더는 간과하지 않겠습니다:유관순, 일제 통치에 저항한 한국 독립운동가

1919년 봄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평화 시위에 동참하라는 요구가 있었을 때 한 여학생은 자유를 염원하는 민족 전체의 갈망을 상징하는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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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추구하는 가치 - yugwansun-i chuguhaneun gachi

1851년 이래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면은 백인 남성들에 관한 기사가 지배적으로 많았습니다. ‘우리가 간과한 사람들’ 면을 통해 뉴욕타임스는 주목할 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한국 서울 — 1919년 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평화 시위 동참에 대해 부름을 받았을 때 유관순이라는 이름의 한 16세 여학생은 자유를 염원하는 민족의 집단적 갈망을 상징하는 얼굴이 되었다.

유관순은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한국 여성을 위한 첫 현대 교육기관인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과 4명의 급우들은 거리에 나가 일제 식민통치에 항의하기 위한 최초 시위 중 하나였던 만세운동 현장에서 시위에 참여한 다른 이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출판인 최남선이 작성하고 33명의 한국 문화 및 종교 지도자들이 공동발의한 3.1 독립선언서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낭독되었다.

다음날 시위 주도자들은 이화학당에 찾아와 유관순과 그녀의 이화학당 학우들이 사흘 후에 진행될 학생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3월 5일, 유관순과 그녀의 급우들은 서울 남대문에서 행진했다. 이들은 일본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지만,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이 학생들의 석방을 협상해 풀려났다.

재빨리 보복에 나선 일제강점기 한반도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유관순은 몰래 입수한 3.1 독립선언문 사본을 들고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85km (53마일) 떨어진 충청남도 천안으로 돌아갔다. 유관순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말 그대로 3월 1일에 진행된 독립운동 시위를 의미하는 ‘3.1 운동’을 전파하며 주민들을 결집하여 자체적으로 항의 시위를 주도할 것을 독려했다.

독립운동은 빠른 속도로 확산하였다.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 3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관순도 그 현장에 있었다. 집에서 제작한 한국 국기인 태극기를 나눠주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일제 헌병대가 도착해 모인 사람들을 겨냥해 총을 쏘았고 19명이 사망했다. 유관순의 부모도 사망했다.

몇 주 후 일제 당국이 독립 시위운동을 진압했을 때까지 2천만여 인구 중 약 2백만 명이 1542개의 독립운동을 위한 거리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한국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 저자 김준길은 추산했다. 7000명 이상이 죽임을 당해 목숨을 잃었고 유관순을 포함해 약 4만6000명은 투옥되었다. 선동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후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은 다른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한민국 독립을 촉구한다는 자신의 변치 않는 입장을 계속 표명했다. 자신을 수감시킨 일제 교도관들을 향해 소리쳤고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그녀는 투옥 중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으깨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써놓았다. 또한 “내 나라에 내 목숨을 바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회한입니다”라는 발언도 남겼다.

결국, 지하 독방으로 이송된 후 유관순은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는 이유로 반복적으로 구타 및 고문을 당했다. 1920년 9월 28일 17세 나이에 부상으로 사망하기 얼마 전 그녀는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에 한반도가 분단된 후에는 남한에 속하게 된 천안 근처에서 기독교 신자인 부모의 5명 자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자신에게 기독교에 대해 가르치고 전통적 유교 가치관인 민족주의와 시민의식을 심어주었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3세대에 걸친 유관순 가족 9명이 일제로부터의 한국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똑똑한 아이였던 유관순은 집 근처 감리교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을 쉽게 외웠다고 서울 소재 이화박물관 큐레이터들은 말했다. 미국 선교사 앨리스 해먼드 샤프는 유관순에게 교육을 더 받기 위해 이화학당에 다닐 것을 권장했는데 당시 그렇게 하는 한국 여성은 거의 없었다.

유관순이 태어나고 3년이 지난 후 일본군이 한반도를 장악했다. 한국은 공식적으로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되었고 이때부터 35년 동안 이어진 한국 독립 투쟁은 시작되었다. 유관순에게는 자유로운 한국에 대한 기억이 없었을 것이고 그녀는 1945년 8월 한국이 독립을 회복하기 훨씬 전에 사망했다.

3.1 만세운동이 즉각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민족단결의식을 공고히 하고 저항의 촉매 역할을 했다. 오늘날 3월 1일은 한국의 공휴일이고 내년에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게 될 것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8월, 이제 국립박물관이 된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 “일본 전 총리로서,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 자리를 찾았습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갔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유관순이 수감되었던 옥사도 방문했다. 전임 일본 총리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유관순은 또한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경의와 칭송을 받았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 위대한 젊은 여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유관순을 잔 다르크에 비유하며 당시 학위수여식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폭력이 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들의 기억과 이상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은 그녀가 인생을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한 위대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취재 과정에서 이준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번역:이수현

1동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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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1919년 3.1의 아이콘이자 식민지의 수난과 저항을 대표하는 여성 영웅이다. 민족의 희생과 저항의 상징인 유관순 표상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 계열, 단독정부 수립파, 이화학원 동문들의 주도로 구성된 것이다. 유관순 기념사업회와 전기간행위원회를 배경으로 하는 1948년의 전영택의 전기,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윤봉춘의 영화 「유관순」(1948)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승되는 유관순 표상의 골격을 결정하고 대중화한 기원의 텍스트들이다. 전영택과 윤봉춘의 1948년 텍스트를 통해 기독교 미션 이화학당 출신 소녀의 희생은 민족주의적, 기독교적 순교로 의미화되었으며, 민족적 정통성의 도덕적 권위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유관순의 정치적 상징성은 남한 단독정권 수립을 주도한 통치엘리트들이 남한 국가에 민족적 정수를 부여하고자 한 문화적 국가 기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1959년 개봉된 윤봉춘의 두 번째 「유관순」 영화에서는 경주 등 38선 이남의 역사적 장소와 결부된 유관순 내러티브를 구성함으로써 ‘남한’ 민족을 균질화된 동일자로 구성하는 장소의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다. 4ㆍ19 이후의 유관순 표상은 국가(정부)와 시민사회가 갈등하고 길항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966년 윤봉춘의 세 번째 「유관순」의 시나리오에는 4ㆍ19 이후 자유, 박애 등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적 자아상과 한일회담 이후 고양된 내셔널리즘의 열망이 결합된 유관순 표상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시기에도 국가(정부)는 여전히 유관순을 국가주의와 냉전 하의 관주도 민족주의를 선전하는 영웅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하에서 제작된 1974년 김기덕 감독 제작의 「유관순」에는 국가주의와 가부장의 권위가 결합된 유신 이데올로기가 투사된 유관순 표상이 구성되고 있다. 이 영화의 유관순은 불의에 저항한 영웅이라기 보다는 당대 청소년에게 유신 이념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던 ‘화랑교육대’의 규율을 내면화한 역할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Gwan-sun Yu was a woman titled Korean national hero as icon of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on Mar. 1, 1919) and as representative of sufferings and resistances in colonial era. Historically, the emblem of Gwan-sun Yu which symbolizes national sacrifice and resistance was formed primarily by Korean nationalist group, independent government faction and Ewha School alumni after the 1945 Liberation of Korea. A heroic life story on Gwan-sun Yu (authored by Yeong-taek Jeon, 1948; against a background of Gwan-sun Yu Memorial Foundation and Korea Bibliography Publishing Committee) and a film titled ‘Gwan-sun Yu’(directed by Bong-chun Yun, 1948) based on her life story become original texts for framework and popularization of Gwan-sun Yu's emblem that has been handed down to this generation of Korean society. In the Year 1948 texts of Jeon and Yun, the sacrifice of a bold Korean girl student from a mission school called Ewha School became construed in a sense of nationalist and Christian martyrdom, and took a position of ethical authority for national legitimacy. This way, her political symbolism complied with cultural state planning where ruling elites who dominated the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regime for South Korea aimed to give Korean national essence to southern state. Yun's 2nd film release titled ‘Gwan-sun Yu’(released in 1959) formed a narrative on Gwan-sun Yu in association with historical memory on areas below the 38th Parallel(including Gyeongju). Here, a political mechanism of location works to identify ‘South Korean’ nation as homogeneous persons. Gwan-sun Yu's emblem after the April Revolution(Apr. 19, 1960) becomes a critical case that demonstrates conflicts and rivalry between state (government) and civil society. Yun's 3rd film release titled ‘Gwan-sun Yu’(1966) suggests an evolution of previous Gwan-sun Yu's emblem, which is a combination of civil self-images(pursuing universal values like freedom and philanthropy after the April Revolution) and enhanced nationalism(after the Korea-Japan Ministerial Meeting). Even in this period, Korean government was still committed to spotlighting Gwan-sun Yu as heroic figure to make propaganda for Korean nationalism and government-led racialism under the influence of the Cold War. In particular, Director Gi-deok Kim's ‘Gwan-sun Yu’(1974), a film produced under the rule of Revitalizing Reforms (Yusin) system and Emergency Measures, forms an emblem of Gwan-sun Yu which projects Yusin ideology in a combination of nationalism and patriarchal authority. In this film, Gwan-sun Yu is presented as a role model that internalizes the rules of ‘the Hwarang School’ established to educate contemporary teenagers in the ideology of Yusin, rather than as a heroine who resisted national in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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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sun Yu, 3ㆍ1, hero, cultural state planning, transmission, narration of women's(national) suffering, nationalism, citi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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