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 패션 - 1930nyeondae hangug paesyeon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의 육체, 몸은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옷의 흐름을 대변하는 단어인 패션은 변화라는 뜻으로, 이 단어 자체에 이미 옷의 변화, 창조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변화를 거부하는 안티 패션도 있다. 이는 전통사회의 정해진 복장이기도 하고, 변화를 통해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입는 것으로 승복이나 수도사의 옷, 영국 여왕의 대관식복, 유니폼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 패션사는 이런 안티 패션보다는 빠르게 변화하는 여성 패션이 중심이다. 한국 여성 패션의 역사는 생산 시스템과 더불어, 매혹적인 옷을 통해 더 멋진 식탁에 앉고자 하는 여성들의 조바심, 그리고 안티 패션의 검열적 시각이 개입하여 벌이는 ‘치장과 노출, 검열’의 삼중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의 강요와 검열의 변주들

조선시대 복식은 그 화려함이나 장식과는 별도로 몸을 감추는 디자인이었다. 여염집 여인들은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다. 이런 감춤에서 드러냄, 즉 신체 노출의 역사가 한국 현대여성 패션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서양복식을 의미하는 양장(洋裝)은 신여성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면서, 1920~30년대에 확산되었다. 주로 여학생이나 예술가들이었던 신여성들은 단발을 주로 했기에 모단(毛短·modern)걸로 불리며 전통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곤 했다. ‘별건곤’ 등 1930년대 잡지나 신문에는 여우 목도리, 양산, 구두, 모자, 장갑 등과 더불어 100가지가 넘었다는 이들의 패션에 대해 비평과 풍자가 끊임없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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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0년대 일제 강요로 ‘몸뻬’를 입은 여학생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생산증진을 위한 작업복이 강조돼 여성들은 ‘왜 바지’(몸뻬)를 입어야 했다. 헐렁한 바지 밑단을 묶어서 만든 디자인으로, 친일잡지 ‘춘추’에 ‘몸뻬를 생각한다’(1943년 9월)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 논객은 ‘거리의 잘못 입은 몸뻬 괴물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후, 성전을 위한 작업복에 팔이 드러나는 발랄한 상의를 입거나, 혹은 비싼 천으로 만들어 입기도 하는 여성들을 ‘악질의 양풍환자’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은 남성이 여성들에게 줄기차게 해 온 ‘아름다워라’라는 주문의 부메랑 효과 아닐까?

해방이 되어서는 미군 담요를 이용한 코트, 낙하산의 나일론 천을 이용한 블라우스 등이 등장했는데, 레이스가 달린 얇은 이 옷은 속이 비치는 선정성으로 당연히 구설에 올랐다. 또 파마가 등장해 거의 모든 중년 여성이 한복에 짧은 파마머리를 했다. 당시 언론에는 ‘괴상한 두발화장을 하는(…) 이런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라고 격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파마머리는 확산되었다. 1961년 들어선 군사정권은 유니폼식의 재건복 입기 운동을 벌여 농촌 면서기들은 모두 입었고, 이 옷을 입고 결혼하는 커플들이 생기는 등 전 국민에게 안티 패션을 제안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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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왼쪽)과 1980년대초 ‘홈드레스’ 패션 광고

한국 패션사에서 최고의 사건은 역시 미니스커트가 불러왔다. 1967년부터 가수 윤복희가 유행시킨 이 디자인은 무릎 위 30㎝까지 올라간 마이크로 미니가 등장하면서 정부가 개입했고, 무슨 기준인지 무릎 위 15㎝까지만 허용한다는 규제가 나왔다. 거리에는 자를 들고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를 재는 경찰이 나타났고, ‘남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아가씨가 있다면 그야말로 민족반역자’라는 언론의 분노에 찬 외침이 또 터져 나왔다. 사실 이런 분노의 소리는 연원이 깊다. ‘우리나라 여자의 저고리란 것은 소매뿐이오 길이가 없어서 붉은 살이 드러나지 않지는 못한즉 사람의 모양 같지 아니한지라’라는 한탄(1905년 제국신문)을 넘어 성호 이익(1681~1763)의 ‘짧은 적삼은 요사스러운 것이니, 마땅히 못 입도록 금하여 아주 없애야 한다’는 호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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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언니들의 ‘잇 아이템’ 판탈롱과 원피스

이 같은 검열의 시각은 20여년이 지난 1990년 중반 인기그룹 룰라 멤버가 입으면서 퍼져나간 배꼽티, 2010년대의 하의실종 패션에도 똑같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사람 같지 않다거나 반역자까지 불려 나오지는 않았지만, ‘쳐다보다가 교통사고 날 뻔했다’ ‘성범죄를 조장한다’ 등의 갖가지 불평이 제기됐다. 하지만 현재 이 디자인을 스타들은 줄기차게 입고, 언론들은 ‘아찔하다’ 등의 기사로 오히려 대 놓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어떤 여성이 이 상찬의 디자인을 포기할 것인가.

이렇게 여성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매력을 노출하는 현상은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 현상일 뿐이다.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는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미성숙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배꼽티와 하의실종 디자인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한국 패션의 한 흐름은 여성의 전시 욕망과 그에 대한 안티 패션적 검열이 만들어 내는 화음 아닌 화음의 장이기도 하다.

■치장으로써의 디자인 변천사

이런 노출과 검열의 한편에서는 색채와 형태 디자인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1957년에는 노라노가 한국 최초로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는데 남성들이 더 많이 관람했고, 오드리 헵번이 영화를 통해 유행시킨 플레어스커트, 맘보바지가 유행했다. 한국성에 대한 추구도 당연히 일어나서, 1959년에는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를 비롯해 노라노의 양단 드레스 ‘아리랑’, 72년에는 앙드레 김도 양단 조끼를 디자인했다. 또한 남자 양복에서도 청자선(靑磁線)이 제시되는 등 전통 옷과 양장의 결합이 시도됐다. 하지만 이 시도는 거리 패션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사라지고 한복은 예복으로만 정착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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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의 양단 조끼(왼쪽)와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 패션디자인에 한국적 미를 접하려는 시도였다

1970년대는 가히 패션의 춘추전국시대로 일컬어진다. 명동 거리는 미니스커트, 핫팬츠, 고고바지, 롱부츠, 각종 길이의 스커트가 휩쓸었고, 히피문화의 영향으로 청바지와 장발, 판탈롱이 활보하면서 ‘명동 바닥에는 청소부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또 1970년대 중반 창립된 반도패션, 논노, 에스에스패션 등 기성복 회사는 각자의 브랜드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색깔도 다양하고 화려했으며, 홈드레스라고 하는 주부 전용 디자인이 등장해 혼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70년대식의 짙은 화장을 한 주부가 발목까지 덮는 홈드레스를 입고 과일이나 커피를 내가는 사진은 그 당시 여성지의 빠지지 않는 광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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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깅스(2014년·왼쪽)와 스키니 바지(2013년)

88올림픽 이후에는 스포츠 웨어가 자리 잡았고, 1990년대 후반 기성복 브랜드가 외환금융위기 여파로 사양길로 접어들 즈음 동대문의 밀레오레, 두타 등이 등장해 다양한 취향의 디자인이 선보였다. 2010년 이후에는 레깅스와 스키니 바지로 하체 곡선을 다 드러내면서, 레이어드 룩이나 기하학적 커팅의 상의로 상체를 감추는 패션이 공존했다.

■유행의 하향이론과 창조성

이런 패션의 흐름, 즉 유행은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지속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최근까지 4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 중 근대 초기 게오르그 짐멜이 제시한 유행의 ‘하향이론’을 바탕으로 인류학자 다니엘 밀러는 이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를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밀러의 ‘모방의 과정’(The process of emulation)을 보면, 처음 1단계에서는 상부 계층(가장 오른쪽)이 손잡이가 하나 달린 항아리를 혼자서만 갖고 그 희소성으로 즐거워한다. 손잡이가 없는 항아리의 나머지 사람들은 입술이 삐죽한 채 시무룩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점차 2단계, 3단계로 확산되고 사람들도 즐거워한다. 하지만 맨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제 상부 계층에서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항아리가 나타나 혼자 웃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도식이 보여주는 것은 스타일은 결국 차별 짓기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짧은 저고리를 유행시킨 조선의 기생으로부터, 오드리 헵번, 윤복희, 룰라 등 수많은 스타들이 이러한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고, 현재는 명품룩, ‘청담동 며느리 룩’까지 가세해 있다. 이것이 패션 디자인의 유행을 결정짓는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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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밀러의 ‘모방의 과정’

하지만 창조라는 관점에서 패션계 지존들에게 옷은 다른 의미이다. 요절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은 “나는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이 직면하기 싫어하는 전쟁, 죽음, 마약, 섹스 등을 디자인을 통해 말하고 싶다”고 했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사회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다. 나는 패션으로 영국 사회를 공격하고 싶다”면서 부자유, 금기와 관습을 깨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철학이 전쟁 후 크리스천 디올이 창안한 뉴룩의 곡선미, 샤넬의 우아미를 지나 현대 여성의 욕망과 맞아 떨어졌고, 그들만의 패션 갈라를 창출하고 있다. 현재 젊은 소비자들 역시 더 이상 패션에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움직이는 기호인 패션을 통해 자기 선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소비자들을 탄생시킨 한국의 현대 패션 100년의 역사는 이제 패션 디자인에 감각은 물론 철학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