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해미 전화 - beoning haemi jeonhwa

버닝 해미 전화 - beoning haemi jeonhwa

영화 '버닝' 한 장면. [사진 CGV 아트하우스]

“‘버닝’은 시간을 들여 곱씹어봐야 하는 영화다.” 올해 ‘버닝’(감독 이창동)이 초청된 제7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말이다. 영화 곳곳에 숨은 메타포 때문일까. 17일 개봉한 국내 관객 사이에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설득력 있게 회자되는 다섯 코드를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이창동 감독의 힌트와 함께 소개한다.

17일 개봉 '버닝' 해석 분분 #태극기부터 동성애까지

※ 주의! ‘버닝’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포크너와 하루키의 대립
‘버닝’의 토대가 된 원작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헛간을 태우다(Barn Burning)』이지만 영화에선 앞서 1939년 동명 소설을 발표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자주 언급된다. 무라카미의 원작은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유부남 소설가(영화에선 가난한 20대 작가지망생 종수(유아인 분)로 각색됐다)가 가깝게 지내던 젊은 여성을 통해 알게 된 남자에게서 위험한 취미를 고백받는 얘기다. 반면, 국내 『헛간 타오르다』란 제목으로 출간된 포크너 소설에선 세상의 고통에 분노한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가 남의 헛간을 태운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하루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젊은 포크너의 이야기”라 요약했다. “저도 작가 출신으로서 포크너와 하루키의 대립이 흥미로웠어요. 세상은 점점 더 하루키 소설처럼 돼가는 것 같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취하죠. 하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에겐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옮겨가는 포크너 소설의 얘기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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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에 종수(유아인 분)의 아버지 역으로 깜짝 출연한 최승호 MBC 사장. 사장 취임 전 이뤄진 캐스팅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어딘가 종수 아버지 같았다"고 이유를 말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2. 용산참사 그림
‘박하사탕’(1999)의 5.18 민주화운동, ‘시’(2010)의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등 이창동 감독은 연출작마다 사회적 비극이 낳은 파장을 이야기해왔다. ‘버닝’에도 그런 암시가 있다. 해미(전종서 분)의 실종에 연루된 정체불명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미행하던 종수가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그림은 바로 용산참사를 담은 임옥상 화가의 ‘삼계화택-불’이다. 임 화가는 이 작품을 선보인 개인전에서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을 그린 ‘상선약수-물’도 함께 전시했다. 벤은 그림의 의미 따윈 아랑곳 않고 갤러리 안 식당에서 지인과 우아하게 식사를 이어간다. “벤은 남들에게 쓸데없을 만큼 선의를 베풀면서 누릴 것은 누립니다. 현실을 고발하는 그림조차 문화적으로 소비하죠. 이게 요즘 삶의 방식 같아요. 그가 즐겁게 식사하는 공간의 다른 한쪽엔 참사와 물대포가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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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에서 종수가 임옥상 화가의 그림 '삼계화택-불'을 바라보는 장면. [사진 CGV아트하우스]

3. 태극기 아래 자유의 춤
벤과 함께 경기도 파주 분단선에 인접한 종수의 시골집을 찾은 해미는 노을을 배경으로 자유로이 춤을 춘다. 이때 화면 한쪽에서 휘날리는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이창동 감독은 “요즘은 태극기가 정치화‧이데올로기화됐다”고 운을 떼며 “거부할 수 없는 질서, 심지어 아버지 세대의 분노까지 태극기가 가진 코드를 정서적‧상징적으로 담았다”고 했다. 해미가 웃통을 벗는 것도 “프랑스 68혁명 등 깃발 아래서 웃통을 벗는 건 하나의 운동이고 맥락이었다”고. 다만, “이 장면에서 중요했던 건 두 남자 사이에서 해미만 홀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이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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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에서 종수의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 종수의 시골집에 놀러 간 해미(전종서 분) [사진 CGV아트하우스]

4. 영화 후반부는 종수가 쓴 소설?
‘버닝’을 둘러싼 해석 중엔 종수가 영화에서 처음 소설을 쓰는 후반부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결말부 내용이 모두 종수의 극중 소설이란 것도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던 작가지망생 종수가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영화 전체를 읽을 경우 제법 설득력이 있다. 이에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실종된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무엇인가 쓰기 시작할 때 카메라가 방 밖으로 빠져나가 창틀(프레임) 속 종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전까진 종수의 시선으로 방안에서 창밖을 보던 카메라 시점이 이 순간 갑자기 바뀐다. 그는 “영화 속에 또 다른 프레임을 보여주는 미쟝센은 ‘액자구조’ 즉 이야기 속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드러낼 때 흔히 쓰인다”고 귀띔했다.

5. 종수를 향한 벤의 감정  
벤이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은 영화에 또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단서를 던진 건 배우들이다. 스티븐 연은 해미가 실종된 뒤 종수가 혼자 벤의 집에 왔던 장면이 “가장 흥미로웠다”고 했다. “‘고양이 좋아하세요?’란 벤의 대사에 뭔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뭔가 끌어당기는 것, 미끼도 있죠. 그때 뒷모습만 보이는데 눈빛이 보였다면 아마 관객도 느낄 수 있겠죠.”
전종서는 이 장면에서 “벤이 종수를 쫓아와 ‘베이스를 느끼라’며 훅 들어오는 뉘앙스가 예사롭지 않았다”면서 “벤의 동성애 성향”을 제기했다. “결말에서도 벤이 종수를 끌어안는 듯했다”고 했다. 이에 스티븐 연은 다소 모호하지만 의미심장한 힌트를 던졌다.
“제 생각에 ‘버닝’의 진실은 인간애에 있어요. 외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죠. 종수를 만나려 홀로 외딴 교외까지 가는 벤의 모습은 쓸쓸해요. 이창동 감독님이 그래서 대단한 분인 것 같아요. 사회가 이해하지 못할 벤 같은 사람에게 ‘사랑’을 찾으려면 인간을 아주 깊이 들여다봐야 하잖아요.”

버닝 해미 전화 - beoning haemi jeonhwa

영화 '버닝'에서 아파트 욕실은 벤의 여러 비밀이 감춰진 공간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나원정 기자

※ 이 글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닝>의 이야기는 모호하다. 있어 보이게 표현하자면 열린 결말이고, 싸게 말하자면 떡밥이 널려있다. 받으면 끊어지는 전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물은 존재하는 걸까? 정말 벤이 해미를 죽였을까? 고양이는 정말 보일이일까? 벤의 두 번째 여인은 어떻게 됐을까? 모임 멤버들은 벤의 정체를 알까? 그리고 종수는 정말로 벤을 죽였을까? 이야기는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사실 이렇게 열린 이야기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각자의 감상이 있고 각자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게 싫었다면 감독이 친절하게 서술했어야 맞다. 그럴싸한 단서만 뿌리며 떡밥 놀음하는 게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모호한 이야기는 모호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 모호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는 게 제대로 된 '해석'의 시작일 것이다. 

  <곡성>과 달리 <버닝>은 이야기만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 같다. <곡성>은 마지막 종구와 무명의 대화를 통해 모호함의 의미를 정리했다. 그러나 <버닝>은 그런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만 본다면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관객은 종수만큼이나 단서가 모자라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하지 않고, 추측과 단정에 머물 뿐이다. 결말에 이르러도 모호함은 여전하다. 모호함의 의미도 모호하다.

  그러나 인물은 명확하다. 모호한 이야기에 비하면 인물은 의식의 흐름 같은 소리가 쏙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명확하다. 그리고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의 모호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고 나면 이 영화가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해미]는 대한민국 청춘의 가장 한심한 모습이다.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꾼다.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면을 가꾸려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외모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성형 수술을 하고 촌스러운 걸 따진다.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아프리카로 여행을 다녀온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녀의 여행 후기는 성장이라기보다는 좌절에 가까웠다. 사라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자신도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비전, 목표, 고민 같은 게 없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고뇌하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 자기 연민에 그칠 뿐이다. 극단적으로 자존감이 바닥인 존재다. 현실에서는 이토록 바닥난 자존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버닝>의 인물은 이토록 명확하다. 

  해미를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눈먼 청년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동기부여', '열정' 같은 소리를 외치면서 으쌰으쌰하지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기업 입사'나 '공무원'이라고 말한다. 뭐 그런 꿈을 품어도 좋다. 하지만 진짜 대기업에 입사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은 열정 같은 소리를 입으로만 떠들거나 SNS에 자랑하지 않는다. 하물며 고시생이라면 인터넷 뒤질 시간도 없을 것이다. 눈먼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를 보며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를 바라지만, 욕망만 있을 뿐 행동이 없다.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주면 뭐하나. 운동해라. 책을 봐라. 이런 말을 들었으면 감동하고 있을 게 아니라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프리카 여행은 허세의 절정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존감만 바닥을 쳤음에도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떠든다. 마치 SNS에 '나 아프리카 다녀옴'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해미는 그런 존재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고, 목표는 없지만, 고민도 없고, 자존감은 바닥이다. 

  [벤]은 그런 해미를 착취하고 유린하는 기득권이다. 사실 벤의 배역을 문성근 씨가 맡았어도 위화감이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벤은 젊었고 늙은 꼰대보다 훨씬 영악했다. 변호사는 종수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훈계를 늘어놓지만, 벤은 훈계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대신 위로한다. '해미는 특별한 사람이야.' 같은 말을 하며 바닥난 자존감을 치켜세워준다. 상대를 힐링한다. 여기에 자존감이 떨어진 청년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에 발린 소리일 뿐 실제로는 상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품만 할 뿐이다. 게다가 도덕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 아예 도덕을 제멋대로 정의하기도 한다. 상처 입은 상대에게 입김 한 번 호... 불어주고 영혼까지 빼먹으려 하는 잔악한 존재다. 

  벤을 보며 어느 정치인이 떠오른다면 과한 해석일까? 한때 힐링 열풍을 몰고 다녔고, 입으로는 혁신을 외쳤으나, 실상 구태의 끝판왕이었던 어느 정치인 말이다. 

  이런 벤을 생각하고 있으니 해미가 가엽게 다가온다. 세상의 어른 중에는 선의를 가지고 해미의 자존감을 치켜세워줄 사람이 없는 걸까?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외침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이 없는 걸까? 어째서 벤 같은 승냥이만 존재하는가? 

  [종수]는 청춘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 말하지만, 작가라는 꿈은 간직하고 있다. 물론 내세울 것도 없고, 완성한 작품도 없고, 작가가 맞는지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종수에게서도 위축된 청춘의 현실을 볼 수 있다. 그는 벤의 으리으리한 집과 포르셰를 보며 움츠러든다. 그러나 자존심은 바닥일지언정 자존감은 굳건했다. 사실 자존심이란 게 있을 수가 없다. 남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휘둘리지 않는 뚝심이 있다. 개떡 같은 입사 면접에서 쿨하게 뛰쳐나올 줄 안다. 벤은 그런 종수에게도 해미에게 하듯 거짓 힐링을 시도한다. '가슴을 울리는 베이스' 같은 사탕발림을 날리지만, 종수는 이에 넘어가지 않는다.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 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대신 명확한 욕망이 있다. '나는 시발 해미를 사랑한다고'라고 말할 줄 안다. 

  다만 어리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해미가 실종되었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만, 그런 상식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자기가 다 해결하려 한다. 해미의 어머니까지 찾아가서는 실종 사실을 논의하지 않는다. 마치 빵꾸 내고는 혼자 처리하려고 버둥대다 일을 더 크게 만드는 신입사원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만의 해답을 찾는다. 받자마자 끊기던 전화는 마지막에 집 나간 어머니와 연결된다. 16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염치없게도 500만 원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말한다. 이걸 보면 아마 그동안 걸려온 전화는 어머니였거나 어머니를 쫓는 빚쟁이였을 듯하다. 종수는 시계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고양이로부터 해미 실종의 답도 얻는다. 범인이 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실상 냉철한 추리라기보다는 성급한 단정에 가깝다. 만약 종수가 셜록 홈스였다면 이리 지저분하게 떡밥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평범한 청춘이었다. 어리다. 어설프다. 하지만 어설프더라도 종수는 행동하는 사람이 됐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복수를 감행한다. 종수에게 뜬구름은 없다. 행동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창동이 <버닝>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끔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들먹거리며 훈계하는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간절하게 다가온다. '제발 정신 차리고 종수처럼 벤을 무찔러줘!'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처음 영화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 '청춘을 위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꼰대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꼰대짓 하는 영화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왔다. 진심으로 걱정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주변에도 해미 같은 애들이 있었다. 열정 같은 소리를 하며 행동은 않고 뜬구름 쫓는 청춘들. <버닝>은 그들에게 날리는 진심어린 죽간 스매싱 같은 영화가 아닐까? 

Written by 충달 https://www.youtube.com/channel/UCAxaLsT_FkWqr-3SfxQTj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