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너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지 아빠 이제 어떻게 해야 - eoneunal neoneun naleul balabomyeo mul-eossji appa ije eotteohge haeya

첫 번째 꽃 - 해바라기

  나는 존재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내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나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내 자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은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 그것을 애타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나 자신을 느끼는 순간,

  나는 태어났다.

  지나가던 바람이 이야기해 준, 개체는 사유(思惟)함으로써 존재를 갖는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지금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이렇게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랴. 바람 역시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왜 바람이고, 왜 이렇게 날고 있으며, 또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는지는 알 필요 없어. 이미 그렇게 행하는 내가 있는데, 그런 것 알아서 뭐해. 나는 그것을 행하는 나이며, 그런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이미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전부일 뿐이야.’ 그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난 바람이 아니며, 또한 날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바람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만큼은 이해한다. ‘나는 내 자신을 부정해 본 적이 있었어. 그런데 사유할 수 없는 무생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사유할 수 있지. 즉, 그렇게 내 존재에 대한 부정마저도 이미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이기에 가능한 일이야.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지. 이미 나는 있는데, 그래서 부정할 수도 있는데, 그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는 사고의 폭이 좁다는 이야기밖엔 되질 않아. 언젠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깨달았어. 나는 바람으로서 존재하는구나, 하고.’

  그랬다. 나는 이미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것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내 자신이 존재함을 가장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로 내가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사유하는 나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곧 앞으로 언제가 되었든 세상 속에 내가 존재하게 될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난 태어났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위쪽 어디선가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려왔을 뿐이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해바라기라는 꽃이며, 하나의 존재로서 ‘해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이곳 해바라기 꽃밭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 또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난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고, 내가 했던 생각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 순간 이만큼 자라나 동시에 꽃봉오리까지 터뜨릴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속삭임들도 처음에만 잠깐 뿐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내게서 관심을 걷어가 버렸다. 완전한 어둠뿐인 세상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왔다가는 바람마저 없었다면 난 벌써 의미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게 오지 않는 그. 내가 눈을 뜨기 전부터,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게 해 준 그를 볼 수 없는데 더 이상 내 존재를 이어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바람은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언제나 날 바라보고 있다고. 비록 내가 그를 보진 못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날 바라보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를 향한 내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난 바람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 자신을 격려했다. 내가 그를 이렇게 바라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 날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너무도 힘겨운 시간 끝에서, 결국 바람의 이야기마저 희미해져 가는 길목에서, 그는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다.

  사실 이제와 고백하지만 난 이때까지만 해도 내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그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막연히 '그'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를 통해서 내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만들고자 했던, 단순한 내 고집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떠했든 난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그것이 그라는 사실을 그 순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작았다. 나보다도 훨씬 작아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흘려지나갈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난 그것이 그라는 사실을 느꼈으며, 온 몸을 휘감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온 몸이 설렘으로 떨려오고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엄청난 감격! 비록 그가 내가 존재할 때부터 기다려온 그것이 맞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난 그것을 내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로밖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오답이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날 떠나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는 너무나도 작았지만 나에게 있어선 세상 모든 것보다도 큰, 빛이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바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지만 난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날 바라보고 말을 건넨 다던가 내 주위를 이끄는 행동을 했다면 난 그것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날 지금 있을 수 있게 해 준 바람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난 그를 본 순간부터, 빛님을 본 순간부터 완벽한 그의 포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 땐 아무나라도 좋으니 이런 내게 관심을 보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나의 전부인 빛을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나의 존재 의미는 이미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빛님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물겹도록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난 결심했다. 이제부터 빛님에게 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나와 빛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때는 이미 빛님의 성격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영원할 줄로만 믿었던 빛님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절망하기도 했지만, 하루라는 날짜 개념을 형들로부터 들어 알게 된 후부터는 보다 편안하게 빛님을 기다릴 수 있었다. 비록 슬픈 시간이긴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툭

  무엇인가 내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느끼는 순간, 빛님이 쏟아져 내렸다. 이제껏 나보다도 낮은 곳에서 조용히 날 지켜보던 빛님이었다. 그 빛님이 지면 이 곳 저 곳에 번지기 시작한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전부 빛님으로 물들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부담스러웠다. 빛님이 이렇게 컸으리라곤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저 내 아래에서 나만을 위한,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빛님은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존재였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빛님은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와 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거부할 수 없는 빛의 향연! 작은 점에서 시작해 주위로 번져가던 빛님은 어느 순간부터 저 멀리 하늘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까지는 아빠, 엄마 그리고 형들에 의해 가려져 있던 공간이 탁 트여져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런 날 향해 형들 중 한 명이 이야기해 주었다. 조금 전 내 옆으로 쓰러져버린 그것이 바로 아빠였다는 이야기. 하지만 신기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나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 형의 목소리 역시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쁜 내색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직 빛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바람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 일단 나라는 한 존재를 놓고 봤을 때, 나를 낳아준 존재가 바로 부모이고, 부모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자식을 낳아. 부모의 입장에선 '나'라는 존재가 수없이 많은 거지. 그리고 이렇게 낳아준 존재와 또 그 부모를 낳아준 존재, 더 위로 올라가서 그 존재를 또 낳아준 존재가 모두 한 가족이 되는 거야. 해라, 너의 기준에선 너와 네 형들,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가족인 거지.' 그리고 바람은 덧붙였다. '가족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데 있어 가족만큼 진한 존재는 없거든. 걱정이 있으면 터놓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을 듣고 풀어내 주는 가족은 세상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존재니까.' 하지만 바람의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바람이 이야기한 가족은 나의 가족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어주지 않고, 단지 내게 이름을 주었으며 내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그런 가족의 일부인 아빠가 죽었다는데 심지어 나조차도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으니까. 나 역시 오히려 아빠가 죽음으로 해서 빛님이 이렇게 커졌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족의 개념을 이해했을 때, 그때는 빛님을 몰랐으며 단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기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에겐 오직 빛님이 전부다. 그래서

  "아빠가 죽었는데, 형들은 어떻게 그렇게 기쁠 수가 있는 거야?"

  물었다. 하지만 형들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형들은 내가 쏟아지는 빛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엄마조차도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마침 바람이 불었다.

  "바람아, 네가 생각하는 가족은 어떤 거지?"

  "가족이 뭔데?"

  다른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아, 네가 생각하는 가족은 어떤 거야?"

  "나는 가족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또 다른 바람이 대답했다.

  "너를 있게끔 해준 존재와 너."

  "나는 빛님 덕분에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을 수 있는데? 그럼 내 가족은 빛님이야?"

  바람은 내 말을 들을 새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다시 다른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아, 네가 생각하는 가족은 어떤 거니?"

  "네 아빠와 엄마와 형제."

  "그럼 빛님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날아가려던 바람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게 왔다.

  "그래, 너는 식물이니까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식물?"

  바람이 천천히 날 감싸며 대답했다.

  "세상엔 너처럼 한 곳에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있고,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서로를 잡아먹는 동물이 있어. 동물들에게 있어서 가족은 생존 수단이야. 어려서는 부모의 힘으로 살아가고, 늙어서는 자식들의 힘으로 살아가거든. 가족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단다."

  "그럼 우리 식물은?"

  바람의 움직임에 내 팔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식물의 경우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뭐가 다른지는."

  내가 잠시 생각하는 동안 바람은 떠나버렸다.

  살아간다는 것. 나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부모에 의해 살아가고, 자식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동물. 그렇다면 동물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가족은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엄마와 형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전에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조차 난 알 수가 없다. 그냥 빛님을 바라보는 '나'가 존재할 뿐, 그 뿐이다. 그렇다면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말했다. 나는 식물이니까 동물과는 다를 것이라고. 그렇다면 가족에 대해 생각할 때 살아가는 것과 연관 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식물에게 있어서의 가족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쓰러진 아빠와 그런 아빠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엄마와 형들, 그리고 나?

  그래. 가족은 결국 어떤 집단을 규정하기 위해 정해진 하나의 분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그저 지금 이곳, 이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하나의 생명에 불과하니까. 나에게 있어 가족은 단지 하나의 집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지나가던 바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 바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아가 버렸다.

  나에게는 오직 빛님만 있을 뿐이다. 내가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준 바람에게 감사하고, 빛님을 듬뿍 볼 수 있게 해 준 아빠에게 감사한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왜 아빠가 쓰러진 것에 대해 엄마나 형들이 기뻐했으며 나 또한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툭

  이번엔 형들이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빛님이 더 많이 날 찾아왔으니까.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굳이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기뻤다. 엄마의 죽음은 더 많은 빛님을 내게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엄마가 쓰러진 그 순간 날 향한 빛님의 관심이 더 커졌다. 이젠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하루의 반씩 찾아오는 어둠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빛님은 결코 날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나 빛님만을 바라보는데 빛님이 날 싫어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투둑 …툭 …투두두두

  비라고 했다. 형들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쩐지 형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를 기다리며 느낀 그 감정. 슬프다고 하는 걸까? 형들의 목소리가 그랬다. 언제나 기쁘게 고개를 들고 있던 형들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빛님이 나타날 텐데 왜 저렇게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그저 조금 후에 찾아올 빛님만 기다리면 되니까.

  -쏴아아아…

  불현듯 불안감이 들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비라는 존재가 온 몸을 적시고, 다리에 스며드는 느낌은 좋다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느낌과는 다르게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형들도 이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 것일까. 하지만 난 알 수가 없었다. 이 막연한 불안감이 어째서 생긴 것이며, 왜 이 느낌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지. 그리고 빛님이 나타날 시간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난 알게 되었다. 형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면, …빛님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빨리 이 비가 그치게 해주세요. 비가 빛님을 막고 있어요. 전 빛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비를 멈춰주세요. 빛님이 보고 싶어요.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누군지 모를 이에게 기도하는 것밖엔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기에는 너무 슬프고 괴로웠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빛님뿐인데 왜 이 비는 멈추지도 않고 계속해서 내리는지. 엄마가 죽은 후 빛님이 내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래,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의 죽음은 오히려 내게서 빛님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것도 이렇게나 오래. …어쩌면 영원히.

  너무 슬펐다.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기분 좋았던 빗방울들이 이제는 온 몸을 할퀴며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추웠고, 아팠고, 괴로웠고, 슬펐다. 앞으로도 이렇게 영원히 빛님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도 끔찍해졌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직 빛님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빛님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연히, 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빛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 빛님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존재하게 되었고, 빛님이 사라짐으로 해서 나 역시 없어지는 것. 슬퍼할 일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도 난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일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르겠다. 간간이 멈추는 비를 보며 바보처럼 빛님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혼자 기대하기를 오래. 이젠 확실하게 알았다. 쏟아지고 있는 이 비가 또 한 차례 멈춘다고 해도 빛님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혹시나 다시 찾아올까, 들었던 고개가 숙여지고 등마저 심하게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빛님이 사라졌는데도 용케 오랫동안 버텼다고 생각했다. 난 왜 아직도 이렇게 존재하는가. 왜 아직도 난 빛님을 생각하고 있는가. 내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한 이 공간, 어느 순간부터 빛님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내가 처음 존재하게 되었을 때는 그래도 막연한 기다림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이미 빛님을 봐버린 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고작 마음속에서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빛님 따위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그 존재를 지속해서 유지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라져 버릴 거면서 왜 날 존재하게 했으며 혼자서 떠나버린 것이냐고, 난 이 때 처음으로 빛님을 원망했다. 그리고 정신마저도 희미하게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나쁜 빛님.

  …….

  …….

  …….

  …….

  …….

  …….

  …….

  …….

  …….

  …….

  …….

  …….

  …….

  …….

  …….

  …….

  …….

  …….

  …….

  …….

  ……, …?

  ……?

  덥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다. 나는 또 다시 태어난 것일까? 주위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

  …….

  왠지 힘이 나는 것 같다. 몸이 심하게 굽어 있었던 듯 했고, 머리도 잔뜩 숙여져 있었던 듯싶다. 등과 머리를 들어올렸다.

  …….

  눈이 따가웠다.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자꾸 눈을 찌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조금씩 흰 점이 되어 눈 속에서 번져오기 시작했다.

  차마,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에 온통 젖어버렸던 때가 생각났다. 난 힘을 잃어가면서 빛님을, 원망했었다. 난 빛님을 다시 볼 수 없다. 이런 나를 빛님 역시 싫어할 것이었다. 난 빛님을 기다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빛님은 끈질기게도 내 눈 속에 번져왔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죄송해서 난 빛님을 볼 자격도 없는데, 그런데도 빛님은 다시 날 찾아왔다. …빛님. 죄송해요.

  다시 눈을 뜨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빛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는 절대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자 빛님은 보다 환한 모습으로 내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다시 눈을 뜬 세상은 너무도 환했다. 깨끗했고 그래서 더욱 확실하게 빛님을 볼 수 있었다. 빛님은 언젠가 부터 다시 내려와 세상을 보듬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것도 모르고 빛님을 원망하기나 하고 혼자 죽으려고까지 했었다. 너무 부끄럽고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참기로 했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빛님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데 난 그런 빛님을 절대로 외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역시 빛님을 바라보는 것이 내 존재의 이유니까. …하지만 이것도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다.

  빛님에 대해서 다시 실망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런 내게 다시 찾아와 준 빛님에겐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니까. 하지만 나보다도 형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빛님을 바라보는 것은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이전에 내가 빛님에게서 눈을 돌린 벌이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형들은 그 사이 빛님의 관심 속에 더 크게 자랐으며, 그래서 난 그 아래에서 빛님을 향해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 같은 존재에게 이 정도의 관심이라도 보여주는 빛님이 감사할 뿐이라고 애써 스스로 위안했다. 형들이 너무 부러웠고 원망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빛님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냥 감사할 뿐. 언젠가 이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저를 좀 봐주세요, 해라님."

  분명히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난 아무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를 좀, 저를 봐주세요."

  그 존재는 끈질기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난 형들 사이에서 내게 쏟아지는 빛님을 바라보기에도 너무 바빴다.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또 얼마나 큰 벌이 내려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난 그 존재에게 미안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빛님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제발…, 전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발…. 당신이 해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아니 그러니까 단 한 번만 바라봐 달라는 거예요. 부탁이에요."

  미안해요, 라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내가 바라보는 건 해님-해님이 무엇인지는 난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이 아니라 빛님이라고 말해주고도 싶었다. 미안해요. 난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는 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내 눈이, 내 마음이 빛님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가 않는데. 이런 내 생각이 그 존재에게 전달된 탓인지 언젠가 부터 그 존재는 내게 보이던 관심을 거두어가 버렸다. 그렇게 똑같은 일상이 또 다시 반복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조금씩 숙여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이래선 안 된다고 굳게 마음을 먹으며 다시 고개를 들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마다 내가 보는 것은 빛님의 관심을 듬뿍 받으며 꼿꼿하게 서 있는 형들이었다. 눈에서 무엇인가가 자꾸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던 어느 날이었다.

  "안녕?"

  아마도 이 땐 너무 힘들고 지쳐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넌 누구니?"

  처음 보는 작고 까만 존재가 내 바로 앞에 있는 형의 줄기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존재가 대답했다.

  "와, 해바라기가 내 말에 대답을 해 주다니! 영광이야. 이제까지 많은 해바라기에게 말을 걸었지만 이렇게 대답을 들은 건 네가 처음이야."

  ……?

  "아, 이런 이런.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봐. 해바라기랑 대화하는 건 처음이거든. 난 개미야. 곤충이지. 내 이름은 기리라고 해. 나는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 존재는 자신을 기리라는 이름의 개미라는 곤충이라고 했다.

  "내 이름은 해라야…."

  이제껏 어느 누구도-심지어 바람조차도-개미라는 곤충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관심이 갔다.

  "그런데, 해라.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

  기리가 물었다. 난 이 때 태어나서 두 번째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빛님이 이젠 나에게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 그래, 내가 잘못한 건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형들이 저렇게 빛님의 관심을 받는 걸 보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여기 이렇게 빛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내가 있는데, 그런데 왜 빛님은 형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거지? 너무 슬퍼…."

  그리고 개미가 이야기해 주었다. 예전에 어떤 존재가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하면서 이야기한 그 해님이라는 것에 대해.

  "빛님? 빛님이라는 건 없어. 빛님은 고작해야 해님의 일부일 뿐이야. 아니, 해님의 모든 것이라고 해야 맞겠지."

  기리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바람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들을 기리는 해주고 있었다. 그것도 나의 모든 것인 빛님에 대해서.

  "네가 바라보고 있는 건 빛이 맞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님이라는 말이야. 해님이 빛을 내보내서 너희와 우리 모두를 이렇게 존재하게 해 주거든. 해님이 없으면 빛도 없어."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바라본 건 빛님이 아니라 해님이 된다. …하지만 빛이라는 것이 결국 해님의 관심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래서 그렇게 슬펐구나. 해님의 관심을 더 받고 싶었구나?"

  "그래…."

  그리고 기리는 뜻밖의 제안을 내게 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널 도와줄까? 네가 바라는 건 해님의 관심을 형들보다 더 많이 받고 싶다는 거지?"

  그래서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난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기리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나에게 대답을 해 준 해바라기는 네가 처음이니까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기리가 지금 날 놀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정말로 그렇게 되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건 나한테 맡겨."

  기리는 나에게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기리가 그렇게 떠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난 또 다시 괜한 기대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해님의 관심은 여전히 형들에게 더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나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존재를 기다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물론 이렇게나 바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과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다고 하는 건 거짓이다. 힘들지만 행복하니까 견딜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다. 그래,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줘서 감사합니다. 해님, 당신이 이 세상에 없었다면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존재가치를 잃어버렸을 테니, 그래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난 이렇게 행복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몰라도, 이런 날 당신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기리가 해준 이야기가 잊혀 갈 때쯤으로 기억한다. 이젠 완전히 다 큰 듯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형들과,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작은 조카들 사이에서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똑같이 해님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리의 이야기를 잊고 있었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들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도 난 기리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데려오느라 조금 오래 걸렸어. 설마 벌써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쓰러진 형이 있던 공간으로, 항상 기웃거리기만 했던 그곳에서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환하게 해님이 나타났다. 왜, 무엇이 형을 쓰러지게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가 쓰러졌을 때처럼 그렇게 형도 단지 해님을 향한 날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일 뿐, 그뿐이다. 그리고 잠시 뒤에야 난 오래 전에 들었던 기리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기리는 이미 이곳을 떠난 후였다. 기리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해서 미안한 감정을 갖기도 전에 내 마음속엔 다시 해님이 들어왔다. 아니, 마음속에 있던 해님이 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고 해야 옳겠다. 해님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그렇게 다시 찾은 해님의 관심 속에서 마냥 행복해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존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도…, 인가요?"

  그때 너무도 행복해서, 해님에게서 받은 벌이 끝났다고 믿은 내 자만심에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난 지금 해님을 바라보느라 당신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미안하지만 말해 줄래요?"

  그 존재가 대답했다.

  "이제야 겨우 대답해 주시는군요. 저는 달맞이 꽃이랍니다. 다온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듣지 말았어야 했다.

  "저는 낮에만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당신이 해님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에만 당신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전 용기를 낼 수 없었어요. 저는 밤이면 언제나 달님을 바라보기에, 당신이 해님을 바라보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거든요."

  듣지 않았으면 내가 잠깐이라도 자신을 다온이라고 밝힌 달맞이꽃을 바라볼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은 해님에게서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전 밤이면 밤마다 달님을 바라봐도, 아무리 바라봐도 달님은 제게 관심을 주시지 않아요. 전 너무 외로웠어요. 그래서 낮에도 전 잠을 이룰 수가 없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제 눈에 왜 하필 당신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제가 태어난 후로 지금까지 낮이면 언제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언제나 해님만 바라보는 당신을요."

  듣지 않았으면 가슴이 저릴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 다온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당신에겐 해님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해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달님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지만, 해님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가니까요. 저는 비록 달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낮이 되면 존재의 이유가 사라져 버려요. 이런 제게 존재의 이유를 주고, 그 덕분에 다시 밤엔 달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당신이 너무나 절실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다시 찾았답니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다. 한동안 해님이 내게 준 관심을 걷어가 버렸을 때, 잠깐이지만 다른 무엇인가가 너무나 절실한 적이 있었다. 내게 존재의 이유를 준 존재가 사라졌을 때, 나는 왜 아직도 존재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잠시지만 또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생각했었다. 또 다른 존재는 과연 무엇이기에 해님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는데도 난 아직 존재하는 것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었다. 다시 해님의 관심을 받았을 때, 난 그 때야 비로소 해님이라는 존재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마음속에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처음 해님이 사라졌을 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록 그 때는 그것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 보건데 내가 그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금 다온은 마음속에 달님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그러니 제발 절 단 한 번만 봐주세요. 단 한 번이면 된답니다.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전 평생 당신을 모습을 잊지 않고, 이렇게 또 다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다온을 봤다. 미처 알지 못했는데, 다온은 내 줄기 바로 옆에서 작게 자라있었으며, 나를 올려다보느라 잔뜩 꺾어진 고개가 아플 정도였다. 한없이 작고 슬픈 다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그만 툭 하고 터져 버렸다. 다온의 이론 모습이 애처로워서 그런 건 아니다. 나를 바라보는 다온에게 미안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다온의 모습 속에서 내가 해님을 바라보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다온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난 왜 해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가.

  "고마워요. 지금 날 바라봐 준 모습, 절대로 잊지 않을 게요. 달님을 바라보며 힘들 때마다, 낮이 되면 언제나 당신의 지금 모습 떠올리며 견뎌 볼게요. 정말, 고마워요…."

  왜 나 같은 걸 바라보느라 힘들어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어리석은 질문임은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당신을 다시는 바라보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바라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난 지금 적어도 해님의 관심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내가 다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마치 다온에게 그만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온은 그토록 바라보는 달님을 마음속에도 넣지 못하고 있으니까.

  다온에겐 정말 미안하게도, 난 그이후로 더욱 해님만을 바라봤으며 해님만을 생각했고 해님만을 마음속에 넣었다. 그 사이 많은 바람이 지나갔고 기리도 찾아왔으며, 이름 모를 온갖 존재가 지나갔지만 난 오로지 해님만을 향했다. 그 때 다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다온을 바라보면서, 이러는 것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에게 확립시키는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다온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다온 덕분에 난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함을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람과 기리 이후로 세 번째로 다온, 당신에게 감사한다.

  많은 시간이 해님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 속에서 지나갔다. 몇몇 곤충들이 다녀가면서 내 자식이 이제 막 깨어났다고 알려주었고, 그 자식에게 해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또 다른 자식들에게 각각 해바, 바기, 바라, 라해 등의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난 그러면서도 언제나 해님을 향했다. 해님 또한 언제나 나에게 많은 관심을 내려주었고, 그 속에서 난 너무나 행복했다.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깨닫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그것이 비록 한없이 슬프고 말, 살아가는 내내 괴롭게 힘들 그런 존재라고 해도,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 즉 존재의 이유를 깨닫는다면 이 모든 것들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 할지라도 이것을 깨닫는다면 죽음조차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 언젠가 가족에 대해 바람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이젠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간다는 의미 자체는 모두 같을 것이다. 단지 그 방식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을 뿐, 살아간다는 건 즉 자신이 존재함을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존재의 이유가 바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니까.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해님이 숨어버린 밤도 아니었고 비가 내리던 날도 아니었다. 오히려 해님이 보다 강렬하게 내게 관심을 보여주던 어느 낮, 그 벅찬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문득, 생각했다.

  바람은 세상 모든 것은 죽는다고 했다. 영원할 것 같은 저 해님 역시 언젠가는 그 찬란한 빛을 거두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 또한 언젠가는 움직임을 멈추고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바람은 말했다. 이미 엄마 아빠 역시 쓰러짐으로 해서 죽은지 오래였고, 형들 역시 모두 사라져버렸다. 해님이 아직 이렇게 환한데도. 아직 해님은 저렇게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과연 죽을 수가 있을까. 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에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형들이 죽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님이 사라지는 그 순간, 그 때를 제외하곤 내가 죽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해님에 의해 태어났고 해님을 바라보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존재하기 전에도 해님은 존재했을까?

  ……

  생각해선 안 될 것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바로 이곳이지 과거는 이미 손 델 수 없는 지나간 것이며 미래 역시 건드릴 수 없는 꿈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나 미래는 절대로 생각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결국 지나가 버린 과거이며 조금 후, 혹은 먼 미래에 다가올 시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결국 지금이라는 시간이 보다 확실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전환점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해님이 존재했으므로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내가 해님의 관심 속에서 자식을 만들었듯이 엄마와 아빠 역시 그런 세상에서 내가 태어날 수 있게 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역시 내가 죽는다고 해도 해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생각.

  언젠가부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해님이 막 떠오르기 시작할 때, 그 때 잠깐의 시간에만 겨우 해님을 볼 수 있었다. 해님이 하늘 정상을 향해 오르는 모습을 따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처음엔 이런 현상이 그저 잠깐일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고는 해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난 아무런 힘도 낼 수가 없었다. 해님에게서 눈을 돌린 상태 그대로. 해님, 당신은 왜 이런 내게 아직도 관심을 보여주시나요. …왜.

  언젠가부터 해님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내 허리는 고개가 숙여진만큼이나 굽어질 대로 휘어져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 볼 가능성조차 없애버렸다. 이제야 겨우 내 자식들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이들은 그저 해님을 따라서 시선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말을 꺼낼 힘도 이미 내겐 없었다. 새삼 이제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한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해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기는 하지만 담담할 수 있는 이유도 그 탓일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해님이 사라지기 전까진 나 역시 사라지지 않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난 해님을 바라보기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 그래서 난 해님을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해님 역시 날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내가 없으면 해님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 생각, 행동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난 여전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내 존재의 이유를 준 해님에게 감사하고, 내가 존재하는 동안 함께 있어줘서 행복했으니까. 그래서 난 이제 내가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행복하다. 비록 해님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몸에 남은 힘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난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무성히 자란 풀들과 내 자식들 사이로 해님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작은 틈으로 어떻게 해님을 볼 수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난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평생 해님을 바라본 대가일까. 어떤 경위든 간에 해님,

  "감사합ㄴ……."

  해님. 전 다음엔 새가 되고 싶어요. 그것도 해님이 좋아하는 파란 하늘을 닮은 파란 새가 되고 싶어요. 새들은 날 수 있잖아요. 해님과 더 가깝게 날아오를 수 있고, 해님을 따라서 언제든 날아갈 수 있으니까요. 이게 제가 지금 바라는 작은 소원이에요. …들어주실 수 있죠? 파란 새가 될게요.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란, …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