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뜻 - gomahaela mai mutta aiga tteus

영화 ‘친구’ 속 명대사다. 무언가 도가 지나친 행동을 보일 때, 소환되곤 한다. 요즘은 대동소이한 추리 음악 예능에 딱 들어 맞는 표현이다. 여전히 추리 음악 예능은 방송가에서 성행 중이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다. 그럼에도 제작진들은 수시로 만든다. 왜일까?

#음악+추리, 그 뻔한 공식

음악 예능의 중심은 물론 ‘음악’이다.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른다. 

이는 일선 음악 순위 프로그램과는 달리 봐야 한다. 음악 순위 프로그램은 가수들의 자신의 최신 발표곡을 부른다. 이런 무대는 ‘아이돌’이라 불리는 K-팝 가수들의 독무대가 된 지 오래고, 시청률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음악 예능’에는 유명 가수 외에도 무명 가수, 가창력만으로도 프로에도 뒤지지 않는 비(非) 연예인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들은 통상 이미 발표된 명곡들을 부른다. 대중 입장에서는 기억 한 켠에 자리하고 있던 주옥같은 노래들을 다시 듣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재미가 더해진다. 바로 추리다. 노래를 부르는 이의 정체를 맞히는 식이다. 그 계보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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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JTBC

지난 2012년 말 론칭된 JTBC ‘히든싱어’는 추리 음악 예능의 원조 격이다. 원조 가수와 모창 가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고, 패널과 방청객들은 정체를 맞히는 식이다. 박정현, 김경호, 이문세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고, 영탁처럼 모창 가수로 등장(휘성 편)한 후 시간이 흘러 스타덤에 오르는 경우도 생겼다. 신승훈, 조성모, 송가인 편처럼 원조 가수로 탈락하고 모창 가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방청객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추리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경악했다. 그 사이 ‘히든싱어’의 인기는 급상승했고 현재 7번째 시즌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 시작된 MBC ‘복면가왕’은 추리 예능 시장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겼다. 유명 가수들이 복면을 쓴 채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정체를 숨기고 오직 가창력만으로 평가를 받으니, 정체를 공개했을 때 "그 가수가 그렇게 노래를 잘 불렀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초대 우승자인 걸그룹 EXID 출신 솔지는 "아이돌은 노래를 못한다"는편견을 깼으며, ‘쉬즈 곤’을 부른 밀젠코 마티예비치와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가 깜짝 참여하기도 했다. 역시 2015년 시작돼 9번째 시즌까지 진행된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역시 여러 단서를 두고 실력자와 음치를 가려내는 추리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롱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비슷한 결의 음악 예능들에서는 더 이상 차별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재 방송 중인 MBN ‘아바티 싱어’가 대표적이다. 참여 가수의 아바타가 대신 노래를 부른다는 콘셉트인데, 가수들이 정체를 숨긴 채 노래를 부른다는 건 ‘복면가왕’와 판박이다. 게다가 회당 10억 원을 들였다는 이 프로그램 속 아바타의 그래픽 수준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다. 결국 1.4%로 시작한 시청률은 현재 0.5%까지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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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MBN '아바타싱어'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가수가 듀엣을 부른 후 서로를 확인하는 설정의 MBN ‘미스터리 듀엣’ 역시 반응이 미지근하다. 2.1%로 준수한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1%대 시청률을 전전하고 있다. 기대감을 갖고 유입된 시청자들이 별다른 차별화는 느끼지 못하고 이탈했다는 의미다.

지난 9월 종영한 SBS ‘DNA 싱어-판타스틱 패밀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명 가수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나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뽐내고, 그 가족이 누구인지 맞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음악 예능의 시청률은 이미 하향 평준화됐다. 한 때 1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히든싱어’의 이번 시즌 시청률은 2∼6%를 오간다. 국카스텐의 하현우가 장기 가왕 자리를 누리던 시기, 14%가 넘는 시청률을 구가하던 ‘복면가왕’ 역시 현재 시청률은 5% 문턱을 넘기 버겁다. "그 사이 OTT 등 볼거리가 많아졌다"고 변명하기에는, 화제성 역시 크게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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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MBN '미스터리 듀엣' 방송 영상 화면 캡처

#왜 추리 음악 예능에 집착하나?

음악 예능이 자주 제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예능인이라 분류되는 대부분이 ‘가수’들이다. 배우들에 비해 가수들이 예능 참여가 월등히 높다. 그러니 음악적으로 활용도가 높을밖에. 

게다가 음악은 불과 3분 안팎의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강점을 가진 콘텐츠다. 임팩트를 주며 짧은 호흡을 이어가니, 지루함을 배제해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진 입장에서는 선호하는 콘텐츠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또한 수익성이 높다. 음악 예능을 통해 화제를 모은 음원은 전문 음원업체를 통해 유통된다. 물론 원곡자에게도 적잖은 몫이 돌아가지만, 이를 리메이크하고 새 숨을 불어넣은 방송사에 큰 수익을 안긴다. 예를 들어 ‘미스터트롯’의 경우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강진의 ‘막걸리 한잔’, 이성우의 ‘진또배기’, 조항조의 ‘고맙소’를 각각 임영웅, 영탁, 이찬원, 김호중의 곡으로 아는 이들도 적잖다.

여기에 ‘추리’라는 MSG를 추가하는 이유는, 시청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더없이 좋은 도구다.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과 더불어, 대중은 쌍방향 소통에 익숙해졌고 이를 원한다. 추리 예능은 대중도 함께 고민하고 답을 맞혀간다는 측면에서 참여를 독려하고, 채널에 머무는 시간을 높인다. 이는 결국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진다. 

  착각은 자유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입니다.

  착각은 쉽게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생각 속으로 계속 파고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토닥토닥해줍니다. 그런거 아닐거야, 너무 걱정하지마라고 표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혹은 고마해라 마이 무따아이가 그런거 아이그든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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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チカ : 気にしないで、多分そちじゃないから。「키니시나이데, 타분 소찌쟈 나이까라.」

신경 쓰지 마, 아마도 그런 거 아닐 거야!

  그런거 아닐거야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多分そちじゃないから。「타분 소찌쟈 나이까라.」

아마도 그런 거 아닐 거야!

  여기서 소찌そち는 네가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위는 탐정이 너무 빨라, 探偵が早すぎる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적정선과 결핍, 과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웠던 ‘미만’과 ‘이하’, ‘초과’와 ‘이상’은 명확한 수치가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게 계량할 수 없다. 이쯤에서 요리 초보들을 소환해보자. ‘소금 적당량, 고추장 적당량, 후추 적당량, 설탕 적당량이면…참 쉽죠?’라는 레시피에 속아 음식물 쓰레기를 연성해본 자라면 그 적당량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모호한지 절절하게 느낄 것이다. 한 그릇의 음식을 만드는데도 그럴 지언데 이 세계에서는 어떨까. ‘적당한 ~’라는 표현은 편리하다. 그만큼 자주 쓰인다. 그 전방위적인 사용은 가히 단어계의 게보*, 혹은 시골 어르신들의 한 사발 가득 탄 믹스커피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수십 가지의 증상을 한 방에 뭉뚱그리는 힘이 있다고.


천안함 침몰 사고 당시 일부 정치인은 유가족을 짐승 같다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이 슬픔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마구 울부짖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적절한 슬픔의 표현은 어느 정도였을까. 슬픔도 영상물 등급심의처럼 강도가 정해져 있다면, 아무 잘못도 없이 죽어가는 가족을 목도할 때 인간은 어떤 포즈를 선택해야 했을까.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유가족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눈에 미개인으로 비쳤다. 화내고, 소리 지르고, 물세례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고가 난 지 10개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배가 왜 가라앉았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그만하면 됐다’. 역시 적정 한도를 초과했다는 이유지만 이번에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당사자, 즉 유가족이나 피해자가 아니다. 의대생 성추행 사건 때 피해자는 ‘동기에게 너무 과한 대응을 한다’는 비난에 직면했고, 반도체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받으려는 시도는 ‘적당히’ 합의하지 않는 데는 더 큰 꿍꿍이(예를 들면 더 큰 금액의 보상금)가 있다는 의혹을 견뎌야 했다. 학교 폭력 피해자나 내부 고발자는 ‘문제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적정선에서’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로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이렇듯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적정선을 책정하고 강요한다. 따르지 않으면 손쉽게 과잉이나 결핍으로 낙인 찍고, 비난한다. 참 쉽다. 최근 논란이 된 김태훈 칼럼니스트의 소위 ‘무뇌아 페미니즘’ 발언도 같은 맥락의 문제이다.


패션잡지 <그라치아>에 실린 칼럼에서 김태훈은 어떠한 근거나 논증 없이 ‘21세기는 온전히 페미니즘의 시대’라고 단언한다. 현 정부가 툭하면 과잉 복지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을 내세우지만, 국민 중 누구도 과잉 복지를 누린 적 없다는 점에서 ‘온전한 페미니즘의 시대’는 신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겠다. 존재한다고 하는데 정작 본 사람은 없는? 글에서 ‘온전히’라는 표현은 한 번 더 등장한다. 피임약의 발명으로 여성은 ‘온전히’ 자신의 성적 자율권을 갖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여성의 온전한 성적 자율권’이라는 말은 역설법과 같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여성의 몸을 하고 12시간만 살아본다면 왜 이 표현을 역설법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안에는 여성의 순결 이데올로기부터 시작해서 성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구도, 처방전 없이는 사후 피임약도 구할 수 없는  의료권력 등 층위가 다양한 문제들이 정교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글 전체에서 ‘과잉’ 페미니즘은 결국 각종 여성 혐오 범죄와, 한 소년의 이슬람 테러 단체 가입의 원인으로 지목 당한다. 사과문이 공개된 뒤에도 논지는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이미 적정선을 넘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편 가르기가 횡행하고, 장사꾼들이 그것으로 돈을 번단다.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마이 묵기는커녕 대체 온전한 페미니즘이라는 게 뭔지 맛도 못 본 당사자들은 어리둥절하다 못해 혈압이 오를 수밖에. 페미니즘이 편의점에 존재하는 물티슈 같은 존재라는 표현은 수사적으로 꽤 괜찮은 은유이다. 여성혐오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에서, 페미니즘은 ‘더러운(혹은 기가 쎈)’ 여성을 쓱 닦아(너 페미니스트지?) 집어던지는 간편한 1회 용품 정도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페미니즘은 단 한 번도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몫을 찾으려는 시도가 ‘무뇌아적’ 탈취와 밥그릇 뺏기로 보였다면 인사해, 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수억 개의 여성혐오 크리스탈…☆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흔히 정치라고 하면 선거에서 표를 끌어와 정당 몇 개를 차지하고,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며 거부감을 느끼기 쉬운데 본고에서 사용하는 ‘정치’는 랑시에르의 용어를 따른다. 자크 랑시에르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이라는 두 가지 번역 용례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두 종류의 정치를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통념적 정치활동은 후자, 즉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치안의 정치이다. 민주주의와 같은 특정 정치 체제와, 그것을 유지하려는 시도―통상적인 정치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이러한 치안의 논리를 넘어서는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분배)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셈,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자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내가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 2008년 홍익대학교 강연문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투쟁이란 본래 복합적 이익 사이의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정당한 상대자의 목소리로 인정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의 세계는 치안과 정치,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굴러간다. 특정한 정치 체제는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발화만을 인간의 언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정치적 자리와 몫을 할당하는 반면, 그 집단 외부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동물이 내는 소음으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어떤 몫도 할당하지 않으려 한다. - 『시대와 철학』 20호, 2009, p. 404~405

이것은 정치체제가 존재의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분배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정치는 이에 대항하여 특정 분배의 형식 속에서 제 몫을 전혀 갖지 못한 이들이 이견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폄하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정치적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다. 도대체 무슨 고상한 것을 위해서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가? 목소리를 내고, 지워졌던 정체성을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치적 투쟁이고 밥그릇 싸움이다. 마치 집요정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청소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례나, 아동 및 성소수자 인권 개념도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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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를 특정 정치체제 안에서 권력을 소유하는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몫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몫을 부여하는 새로운 분배 형식을 찾아가는 활동을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다른 정치체제로의 이행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의 특징이 나타난다. 정치는 ‘일치(consensus)’를 넘어선 ‘불일치(dissensus)’의 분배활동이라는 것이다. -

『시대와 철학』 20호, 2009, p. 404~405

이 불일치는 개인적 이익 또는 의견들에 관한 반목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주체와 대면시킴으로써 감각 질서 내부에의 균열을 창조하고 사법 상의 소송에 저항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2008, p. 122

겉으로 보기에 조화롭고 안정적인 공동체라고 해도, 그 치안의 질서 안에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착취하여 가능한 질서가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가 만족하고 합의하는 ‘적정선’ 혹은 ‘적정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맞닥뜨린 이들은 그 사태를 은폐하려는 구조와 충돌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이 발생한다. 치안의 논리는 이 불편함을 무기 삼아,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려는 이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킨다. “그만하면 됐다”는 말은 단순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서적 결핍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투쟁을 봉쇄하고 무마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