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네 시안 뜻 - polli ne sian tteus

태평양의 바이킹

· · · · Polynesian

글,편집:묵은지

폴리 네 시안 뜻 - polli ne sian tteus

묵은지가 얼마전 태평양의 낙원, 天惠의 휴양지로 잘 알려진 '하와이'로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다 보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데 이번 여행에서의 큰 수확은 좋은 풍경과 음식을 맛 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 현지 원주민인 '폴리네시안'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을 알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묵은지나 대개의 사람들은 흔히 이들을 춤과 음악을 즐기고 아름다운 낙원의 風景을 배경으로 낙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는 여러가지 모습과 현지에서의 폴리네시안들의 생활상을 직접 돌아보니 그동안 묵은지가 막연하게 여겼던 이들의 모습에는 여러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옛날 유럽의 바다를 주름잡던 '바이킹'이 있었다면 태평양에는 바로 이들 '폴리네시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과 용맹스러움으로 광활한 大洋인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오가며 그들의 삶을 도모해 왔습니다. 지금의 태평양에 트라이앵글로 형성된 '폴리네시아'라는 말 뜻을 그대로 직역하면 Poly(많다)와 Nesia(섬) 즉, 섬이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넓은 태평양에서 1,000여개가 넘는 여러 섬에 분포된 폴리네시안은 섬의 숫자에 비해 그리 많은 인구 수는 아니지만 꾸준히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언어와 풍습,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폴리네시안의 역사는 멀리 B.C.3000년 정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넓게 분포된 탓으로 이들의 원래 민족을 분석해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폴리네시안의 이동로

연대별 이동 경로

이들의 경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정확한 학설로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다수가 동남아시아로 정착하기도 하고 그중 일부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이주, 태평양 곳곳으로 東進해 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만의 원주민인 고산족은 폴리네시안들과 같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쓰고 있었으며 관련된 유물의 출토와 학설로 확인된 바도 있습니다. 

폴리네시안은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스스로 개척민의 기질과 습성을 익히며 특히 이들의 뛰어난 항해술은 태평양으로 널리 퍼져서 여러 섬에 정착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A.D1300년대에 트라이앵글 지역의 안팎으로 이들의 정착은 어느정도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일본 지역까지 진출, 일부 일본인들의 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폴리네시안들이 넓은 태평양을 누비고 다닐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뛰어난 항해술과 용맹성도 있었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배의 구조가 있어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들의 배는 안정성이 뛰어난 날개식 받침대로 덧붙여 만들어진 아웃리거(Outrigger)형으로 비록 작은 배지만 그 크기에 비해 안정성이 매우 우수한 카누형 배입니다.

              

이 덕분에 작은 카누로도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가능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이들이 항해에 쓰인 항해 도구로 중심이 배를 나타내고 사방의 곡선과 직선은 파도와 해류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들은 별다른 항해도구 없이도 뛰어난 천체 관측 능력과 심지어는 바다에 손을 넣어 물결의 흐름만으로도 섬의 방위와 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소형 아웃리거식 카누의 모습.

이처럼 태평양에서 광범위하게 영역을 넓혀간 폴리네시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도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일부는 정착했던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이 밝혀진 것은 유럽인들이 당도하기전 원주민들은 폴리네시안들이 전파한 고구마를 식용으로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폴리네시안들은 정착을 위해 카누에 여러 작물과 가축을 싣고 다녔습니다.


지구 전체 해양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태평양의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흩어진 크고 작은 섬에서 씨족사회를 형성하며 살고 있던 폴리네시안들은 그들의 거친 삶의 역사 만큼이나 그동안 수많은 외세의 간섭과 침략을 받아 왔으며 부족간에 생존과 이권으로 치열하고 끔찍한 전쟁을 수없이 겪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곳의 섬에 이주한 폴리네시안은 서로간 교역활동 등으로 연락을 주고 받기도 하였으나 어떤 지역은 아예 모든 것이 단절되기도 하였으며 어떤 부족은 아예 바다를 멀리하고 풍요한 숲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서로간의 왕래하던 사이는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각 부족들의 세력 확장과 자신들의 이권다툼으로 부족간에 치열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부족들간에 1807년부터 1842년 사이 벌였던 '머스켓 전쟁'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35년간 무려 500회 이상의 전투를 벌여 서로 많은 희생자를 내는 아주 치열한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때 서구에서 들여온 총기를 사용하였는데 서양의 무기상들은 라이벌 종족간에 분쟁을 부추겨 머스켓 총기를 팔아 이득을 취하며 이들의 통치에 까지 관여 하였습니다. 

머스켓 전쟁(Musket Wars)에 사용된 총기류.  

통가섬의 부족은 무려 700여㎞나 떨어져있는 피지섬을 공격해 정복하기도 하였으며 하와이는 '카메하메하1세'가 섬 전체를 통일할 때까지 부족들간의 끊임없는 내전이 이어졌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부족간의 다툼을 벌였던 폴리네시안은 차츰 정치적인 문제와 삶의 안정을 찾으면서 서구의 자치령이 되거나 스스로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서구의 외세는 여러 형태로 이들을 괴롭히거나 돈벌이를 위한 상업적 수단으로 이용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뉴질랜드에서는 '토이 모코'라는 문신한 사람의 머리 미라를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유럽인들에게 기념품 성격의 소장품으로 판매하여 인기리에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토이 모코는 마오리족의 문신된 머리 미라입니다. 그들 사이에 위대한 사람이 죽게되면 문신한 머리를 잘라 미라로 보존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 보존된 두상 미라는 이들 사이에 살아있는 조상이요 숭배의 대상인 것입니다. 목각공예 기술이 뛰어났던 이들은 높은 신분과 지위에 따라 상징적으로 얼굴과 몸에 세밀한 문신을 그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문신한 사람은 그들 사이에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각각의 문양이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졌습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숭배하는 조상마저 자신들의 여행 수집품으로 팔고사는 상품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게다가 수요가 부족하게 되자 살아있는 원주민에게 문신을 하여 죽여서 두상을 거둬가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태평양의 가장 동쪽 끝, '이스터섬'의 정착은 폴리네시안의 지혜와 용맹성에 놀랍고 불가사의한 면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무리 아웃리거형의 배라고 하지만 그 작은 카누배를 가지고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겪으며 머나먼 항로를 따라 그곳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은 다시한번 그들의 지혜와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이스터섬에 있는 그들의 수호신인 '모아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규모에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모아이는 화산에서 생긴 커다란 돌을 사람의 형태로 조각한 석상입니다. 이런 커다란 석상이 해안을 따라 쭉 둘러서 세워졌는데 조각도 조각이지만 그 수많은 커다란 석상을 어떻게 해안까지 옮길 수가 있었는지 그들의 지혜로움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폴리네시안들의 역사는 험난한 바다의 모습처럼 해양의 개척사와 함께한 파란만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가히 이들을 태평양의 바이킹이라 불리워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들만이 이겨낸 고난과 역경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도 비교적 체격이 크고 굵으며 힘이 엄청나게 좋은 것은 아마도 이들의 험난한 개척의 역사를 헤쳐가기 위한 맞춰진 체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와이제도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가장 우수한 만물의 영장임을 절감한 묵은지의 이번 여행은 나름대로 무언가 또 하나를 얻은 뜻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을 해야만 했던 폴리네시안들의 개척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왜 지구상에서 만물을 주도하면서 사는지를 잘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들의 이권에 놀아나 비극을 맛보아야 했던 폴리네시안의 고통과 설움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과거 우리에게도 엄연하게 있었다는 사실들을 새삼 일깨워준 산 교육의 현장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