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만화 - ingan silgyeog manhwa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二]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본명 대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5년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단편 「역행」이 올랐지만 차석에 그쳤고, 1936년에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한다. 복막염 치료에 사용된 진통제 주사로 인해 약물 중독에 빠지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지만,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1939년에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한 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1947년에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 사회의 혼란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인 「사양(斜陽)」을 발표한다. 전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 작가가 된다. 그의 작가적 위상은 1948년에 발표된, 작가 개인의 체험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수차례 자살 기도를 거듭했던 대표작은 『만년(晩年)』, 『사양(斜陽)』, 「달려라 메로스」, 『쓰기루(津?)』, 「여학생」, 「비용의 아내」, 등. 그는 1948년 6월 13일, 폐 질환이 악화되자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人間失格)』을 남기고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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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만화 - ingan silgyeog manhwa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다자이 오사무의 원작이든 이토 준지 만화든 우울하신 분들께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다. 우울하지 않은 사람도 영향을 받을 수 있겠지만. 원래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라는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파헤치고 들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다. 야한 장면이 많아서, 19금이라고 써 있다. 원작에서는 대충 넘어갔다고 한다.

얼마전 어떤 환자분이 내가 책을 편식하지 않는 것 같아 신기하다고 하셨다. 아니다. 나도 편식을 한다. 책 말고 음식도 편식하는데, 물론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다. 채소 같은걸 싫어하는게 아니라 팝콘, 떡, 수정과, 식혜 같은 것을 싫어하니까 편식이 눈에 띄지 않을뿐이다. 책도 똑같다. 철학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정신의학과 철학은 비슷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나는 인간이 왜 사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왜 사는지를 물고 늘어지다 보면 인간이 불행해진다는 것만 확실하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며 사느냐에는 엄청 관심이 많다.

철학책을 읽는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도 그렇다. [인간실격] 민음사판을 시도했다가 읽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인간의 밑바닥까지를 들여다 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화라면 좀 낫지 않을까? 원래 이토 준지 공포만화를 좋아했고. 결국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와 달리 지금 잘 살고 계시는 이토 준지에게는 공포 속에 재치와 해학도 있고, 긍정적인 생각 같은게 느껴져서 (저만 그런가요). 이토 준지가 그린 [인간실격]은 좀 낫겠지 싶어서 좀 용기를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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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필드고양 '책으로 가는 문'에서 봤음

나도 아래와 같은 고민은 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불안과 남들이 가진 불안이 동일한 것일까. [사고의 본질]에도 나오듯, 우리가 언어로 소통하는 각자의 감정은 과연 동일한 것일까. 그게 궁금했다. 똑같이 '불안하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훨씬 괴로울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슬픔이나 억울함이 사실은 남들보다 훨씬 적은 고통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실은 내가 엄살부리는 것이 아닐까. 감정은 원래 측정하기 어려운데 이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불신이다.

서로 달라 보이는 우리는 사실 굉장히 비슷하다. 우리의 서로 비슷한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다. 물론 인간은 편하고 싶고, 남을 위로하기에 앞서 위로를 받고 싶다. 전혀 상관없는 때에 과거의 불안을 다시금 느낀다. 사람들은 서로 비슷하다.

길에서 아이가 혼자 울고 있으면 엄마를 찾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급해도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느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오고 계시면 열림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추구하며 살지 못해도,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실격 당하지 않기 충분하다.

이 그림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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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참 재미있는게, 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꼈고 다소 감동을 받은 부분이 사실은 다자이 오사무의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결국은 이 만화를 다 읽고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관심은 커녕 역시 이토준지 대단해 라고 생각했다는 것.

어떻게 보면 원작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각색했기에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인간실격] 이야기를 짝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원에서 주인공과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가 만나는 장면은 정말 놀라웠다. 작가는 자기와 비슷한 배경과 성격을 지닌 화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화자가 좀 더 건강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남의 삶처럼 객관적으로 대면하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야기 속 다자이 오사무는 맞은편에서 보고 있는 요조의 자녀로 추정되는 인물을 계속 손으로 가리키며 주인공이 창문 밖을 쳐다보도록 돕는다. 그것은 삶의 진실을 대면하기 위한 용기를 얻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봤다. (그런데 원작에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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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10대 시절 '...부러 그랬지?'라고 말하는 친구는 결국 주인공 요조의 거짓말에 크게 실망하여 죽고 만다. 원작에서는 그 친구가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의 존재 역시 요조가 어릿광대처럼 거짓으로 사는 것에 대항해서 진실을 보고, 솔직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ego의 어떤 부분이라고 여겼다. 요조는 철저하게 그것을(또는 그 친구를) 추하다 여기고 무시한다. 그리고 일부러 그러는 삶을 이어간다. 나는 그 친구의 자살이 지니는 상징성에 주목했는데, 역시 다자이 오사무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토 준지^^

요조는 왜 불안한가? 어린 시절의 가해자들 때문에? 엄격하고 능력있는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그 불안을 마침내 마약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아내도 불안하고 요조도 불안한데 대처하는 방식은 다르다. 아내가 나오는 부분이 참 마음이 아팠다. 순수한 신뢰에 대해서 누군가 죄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진료실에서 조언을 할 때도 누군가를 믿으라는 조언보다도 누군가를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할 때가 더 많다.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죄라는 것은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줄 때 죄악 아닌가? 그래. 죄는 아니지만 그로 인해 실망과 고통을 겪는 몫이 '아직 남아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겪었다'는 어떤 면에서 '아직 남아있다' 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을 믿다가 배신 당하고 가슴 쓰라리고 이런 경험을 우리는 삶에 필요한 절차였다고 합리화 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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