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 른 오메가 - usi leun omega

Publish to anyone 1533views 4 8798

오메가버스au , 삼각 주의, 후타쿠치 시라부가 소꿉친구로 동거하는 설정부터 시작합니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한 번도 지금까지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받은 눈길은 오로지 동정에 가득 차 흘러넘쳤다. 알파인 아버지, 알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유일한 오메가였다. 사회구조상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특별한 차별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뼈대 있는 알파 집안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라며 늘 혀를 차셨고, 그와 반대되게 어머니는 그런 나를 걱정하셨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괜찮은 점이 있다면 히트 사이클 때마다 먹는 약의 효과가 잘 받았다. 약으로 해결이 안 되면 주사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알파인 줄만 알았고, 알파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야 부모님 두 분다 알파셨으니깐. 그 사이에서 오메가란 정말 희박한 변수였다. 첫 번째 검사에서는 알파로 발현되었지만, 곧 그 결과는 깨져버렸다. 고등학교 때, 다시 말해 두 번째 검사에서는 형질이 변했다, 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 것일까. 알파가 아닌 오메가로 변해있었다. 믿기지 않는 결과에 큰 병원까지 찾아가 재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믿기는 싫었지만 종래에는 무더졌다. 포기했다,라는 말에 가까웠다. 가끔 멍하니 생각을 해보면 알파와 오메가는 다를 게 없었다.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맞는 히트 사이클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오메가로서 불편한 것도, 그야 장기가 다른 이들보다 하나 더 많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견딜 수 없는 것은 끔찍한 히트 사이클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싫다고 스스로 발버둥 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순리와도 같았다. 약을 꼬박꼬박 먹는 것도 넌덜머리가 났고, 집안에만 꼼짝없이 갇혀있는 일도 모두 토할 것만 같았다. 심지어 기댈수 있는 사람을 못 본다는 사실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늘 죽을 사들고 오는 후타쿠치를 문턱을 넘어서 방 안에서 반겨야 하는 마음을,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도, 모두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일부였다.
후타쿠치 켄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버팀목이었다. 오메가로 낙인찍히듯 짙은 잉크로 종이에 인쇄된 날, 후타쿠치를 잡고 엉엉 울었다. 빨개진 코를 보고선 가볍게 웃어 보이던 후타쿠치는 그저 자신의 코를 한번 잡아당길 뿐이었다. 켄지, 그리고 켄지로. 비슷한 이름이었다. 자신은 그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실 발음하기에, 윗 입천장에 혀가 진득하게 닿아 떨어질 때, 그 기분이란 괜히 간질거렸다. 후타쿠치가 베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히트 사이클이 오면 굳이 멀리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런 존재였다. 후타쿠치가 시라부에게 그렇듯이, 시라부가 후타쿠치에게 그랬다.
날이 날인지라 온 학교가 시끄러웠다. 연말이니, 뭐니 분위기는 늘 축제 분위기였고, 다른 과와 합심해 술자리를 만들기 일쑤였다. 시라부는 그런 시끌하고도 북적한 자리를 늘 피해 다녔다. 한 번만 참석하라는 선배의 요구도 거절하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도대체 어떠한 의미로 화학과와 컴퓨터가 접점이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오늘도 안 올 거지, 시라부? 은근하게 묻는 선배의 물음에 대답 대신에 고개를 젓자, 눈이 튀어나올듯한 반응이었다.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크게 웃으며 사라지는 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곧 드리우는 그림자로 인해 그늘이 졌다.

“켄지로.”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눈앞에 서렸다. 목에 둘러주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빨개진 코와 얼얼한 귀가, 온도를 점차 찾아가면서 욱신 욱신거렸다. 시린 손은 주머니에 파묻은 지 오래였고, 가방이 흘러내리지 않게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어, 목이 뻐근했다.

“집 들렀다 갈까?”

아니. 뻑뻑한 코를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동시에 김이 안개처럼 뿌옇다 사라졌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뭐 할건데. 딱히 할 것도 없었지만, 시간이 애매했다. 집을 가서 쉬고 나오기는커녕 가방만 내려두고 바로 나와야 할 정도의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생각 외로 시간이 널널했다. 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자. 잠시 생각하던 시라부의 결론이었다. 밖에서 생각하기엔 추워서 이가 달달 떨리기 직전이었다.

“켄지로. 오늘 진짜 괜찮겠어?”
“너, 과보호야.”

작게 웃은 후타쿠치는 의자에 몸을 더 파묻었다. 시라부 보다는 오히려 후타쿠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크서클은 눈 밑은 물론이고 턱까지 닿을 기세였고, 입술은 거칠게 메말라있었다. 공기가 답답한지 목도리를 풀던 시라부는, 그런 후타쿠치의 안색을 살핀 뒤 주머니를 뒤졌다.

“켄지, 립밤 좀 발라.”
“무슨.....맞다, 저번에 사준 거 다 썼어.”

쓴지 오래야. 시라부의 립밤을 익숙하게 받아든 후타쿠치는 입술에 쓱하고 문질렀다. 매번 말로는 싫다는 후타쿠치에, 시라부는 립밤을 사 후타쿠치의 점퍼 주머니에 넣어두는 편이였다. 손에 잡히면 한 번씩 바르는 후타쿠치를 시라부는 알고 있었다. 후타쿠치에게서 립밤을 받아든 시라부는 작게 웃었다. 어느새 곤히 눈을 감은 후타쿠치와 손목에 알맞게 자리 잡은 시계로 시간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시라부는 괜히 카페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실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늘 학교와 집, 이 반복적인 루트 속에서 편안함을 유지했던 시라부였기에, 오늘 같은 일은 연속적으로 불안감이 밀려왔다. 혹시나 누구와 마주칠까 싶어 입고 있던 옷에 얼굴을 더 파묻었다. 아, 지루해. 이 시간이면 집에 도착해, 저녁밥을 먹고 뒷정리까지 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후타쿠치!”

카페를 작게 울리는 소리에 되려 놀란 시라부는 옆에 놓인 가방끈을 꾹 쥐었다. 후타쿠치가 옆에 있었더라면, 옷자락이라도 손에 쥘 텐데, 지금의 후타쿠치는 꽤나 멀었다. 자연스레 후타쿠치의 옆자리를 꿰찬 남자는 선 잠에서 이제 깬 후타쿠치의 표정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여기 왜 있어.”
“지나가다 보여서 들렸지, 이따 올 거야?”
“어, 위에서 존나 뭐라 하니깐.”

잠긴 목소리가 신경 쓰이는지 후타쿠치는 말하는 중간에 계속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말을 하던 중간중간 혀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금속을 앞니로 건드렸다. 후타쿠치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시라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을 단박에 알아차린 시라부는 쥐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들어 자리를 벗어났다. 카페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시라부를 반겼다. 시라부는 사람을 만나는데 서툴렀다. 휴대폰을 뒤져봐도 어디 연락할 사람은 후타쿠치, 단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북적하게 지나다니는 교차로에 서있던 시라부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나간 사람 친구 아니야? 같이 앉아있었잖아.”
“아...쟤가 좀 예민해서, 이따 보자.”

손을 크게 흔들거리는 테루시마를 뒤로 한 후타쿠치를 급하게 시라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길게 이어지다 결국 성질을 못 이겨 먼저 끊은 후타쿠치는 평소의 시라부를 생각했다. 아마도 조용한 어디가에 가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후타쿠치는 교차로를 벗어났다. 매번 시라부는 자신을 과보호를 한다며 불만이 잔뜩 섞인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말이었다. 후타쿠치는 바람 빠지는 풍선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 멀리 시라부와 비슷한 체구와 옷을 입은 인영이 눈에 띄어 좀 더 속도를 빨리했다.

“켄지로....너..진짜..”
“너 친구는?”
“과보호하지 말라며, 어떻게 내가 안 할 수 있어.”
“그게 나한테는 과보호야.”

켄지, 뛴 거야? 겨울인데도 식은땀에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정리해주던 시라부는 괜히 억울한 마음에 후타쿠치의 눈썹 뼈를 꾹 눌렀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후타쿠치는 시라부의 머리를 조금은 과격하게 쓰다듬었다. 그런 후타쿠치에 괜히 울컥한 시라부는 그저 땅을 쳐다보고 걸었다.

*

시라부의 안색이 점차 썩어들어갔다. 술자리의 장소는 같았지만 학과별로 테이블을 나눠 앉았기에, 옆자리에는 말 한마디도 안 나눠본 낯선이었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시라부의 도움이 가득한 눈빛에 후타쿠치의 입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분명 집에 가는 길에 맞을게 뻔했지만, 저런 표정을 한 시라부는 몇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하기도 힘들었다. 인파에 묻혀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몰랐다. 싱글벙글 즐거워 보이는 후타쿠치의 표정에 갸웃거린 테루시마는 후타쿠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쳐다보았다. 테루시마와 눈이 마주친 시라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굳은 표정과 짜증을 잔뜩 품은 눈을 하고선 테루시마와 눈을 마주치는 시라부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발, 저 새끼는 뭐야...매번 후타쿠치 옆에 붙어있는 테루시마의 존재에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 시라부는 눈 앞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곧 밀려오는 쓴맛에 얼굴을 찌푸린 시라부는 옷 소매로 입을 닦았다. 왁자지껄한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간 시라부는 골목에 들어가 쭈그려앉았다. 눈을 밝히는 번쩍번쩍한 네온사인에 두통이 일었다.

“추운데 뭐해.”
“집 갈려고.”

쭈구리고 앉아있는 시라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후타쿠치는 술기운으로 상기된 시라부의 볼을 손으로 문질렀다.

“너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처웃어.”
“아니..그게 아니라..”

째려보는 시라부의 눈빛에도 웃으며 대답하는 후타쿠치의 무릎을 발로 찬 시라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따뜻한 나의 집, 나의 안락처. 집에 가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잠이 들고 싶었다.

“근데, 자꾸 너 옆에 붙어있는 새끼는 누구야.”
“아..테루시마?”
“시발, 쳐다보지 좀 말라 그래.”

존나 짜증 나게. 불쾌하다는 표정을 잔뜩 지은 시라부는 후타쿠치를 노려봤다. 집에 안갈 거야. 피곤함이 잔뜩 묻은 시라부를 눈치챈 후타쿠치는 괜히 시라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좀 있다가. 시라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후타쿠치는 말꼬리를 늘이며 크게 웃었다.

“들어가기 싫어.”
“그럼 내 옆에 앉으면 되지.”
“걔가 또 쳐다볼 거 아냐.”

일단 들어가자. 시라부의 팔목을 잡아 끈 후타쿠치는 자신의 옆자리에 시라부를 앉혔다. 사실 시라부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적어지기는 무슨, 점차 늘어만 갔다. 옆자리에서 신이 난 후타쿠치를 버리고 혼자 집에 갈까 싶었지만, 후타쿠치가 취한다면 챙기러 나올 사람은 시라부 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졸음에 후타쿠치를 방패 삼아 꾸벅꾸벅 졸던 시라부는 어깨를 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화학과, 시라부 켄지로 맞지?”
“맞는데..누구세요..?”
“화학과, 카와니시 타이치.”
“아...무슨 볼일이라도..?”
“사실 친해지고 싶어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말 걸 타이밍을 못 잡아서.”

내가 과했나? 활짝 웃어 보이는 카와니시의 미소에 시라부는 고개를 저었다. 시라부의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은 처음 보는 사람의 유형이었다. 음침하고도 혼자 있는 자신이 뭐가 좋아서 먼저 다가오는 건지. 시라부는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그럴 틈도 없이 연달아 하고 싶었던 질문이라며, 묻는 카와니시의 물음에 답해주기 바빴다.

“켄지로, 가자.”

카와니시와 이야기를 주고받고를 반복하다 보니 꽤나 시간이 흘러있었다. 내일 보자는 가벼운 인사를 건넨 카와니시를 끝으로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시라부는 후타쿠치의 뒤를 따랐다. 평범하고도 조용한 일상에 가벼운 돌을 던져놓은 듯한 파동이 일었다.

*

이불 속에 파묻혀있다,라는 표현이 옳았다. 어제의 옷차림에서 두꺼운 외투만 벗은 채, 이불에 몸을 묻은 시라부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지금의 상황은 시라부가 그토록 원하던 평안과 안락함 그 자체였다. 아침 강의로 후타쿠치는 나간 지 오래였고, 시라부는 오늘 하루 자체 휴강을 때리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은 자고로 쉬어야 해. 홀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던 시라부는 온몸에 이불을 돌돌 말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러다니기에 바빴다. 밥도 먹지 않은 채, 온 집안을 어지르던 시라부는 발끝이 아리는 느낌에, 기분이 쎄했다. 설마..라는 의구심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당장 협탁으로 달려가 약의 개수를 살폈다. 옆에 세워진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는 오늘과 멀었다. 단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는 주기였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오늘은 불안감이 최고조였다.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켄지, 오면서 약 좀 사 와줘.」

메일을 입력한지 몇 분도 지나지 않은 채, 전화가 걸려왔다. 웅웅대는 소리를 애써 눈을 감은 채 무시했다. 고구마를 먹은 듯 가슴이 퍽퍽했다.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손바닥에 약을 털었다. 늘 시라부는 적은 양부터 서서히 많은 양으로 늘려가는 방식을 고집했다. 새하얀 알약을 물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에 깊숙이 박히는 약의 쌉싸름한 맛이 꼭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은 역겨움이 목까지 울컥 차올랐다.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주사기가 떠올랐다. 분명 쓴다면 후타쿠치에게 욕은 물론이고 크게 싸울게 뻔했다. 어떠한 부작용이 일어나는지 시라부조차도 몰랐다. 얼마 남지 않은 약통을 가방에 쑤셔 넣은 시라부는 볼캡을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꽤나 쌀쌀했다. 이 날씨가 지속되면 밤에는 얼음장같을게 분명했다. 막상 나왔는데도 갈 곳이 없었다. 학교에 죽치고 있는 것도 좋았지만 후타쿠치에게 들킬 위험이 컸기에 굳이 가지 않았다. 빨개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거리를 나돌았다.

「시라부, 오늘 왜 안 온 거야?」
「오늘은 자체 휴강.」
「그럼 우리 놀까? 오늘.」

카와니시의 답장을 읽고 나서야 무슨 답장을 해야 할지 시라부의 손은 한참 머뭇거렸다. 이렇게 저렇게 쓰다 곧장 지워버리기를 반복하던 시라부는 답장 대신 전화 버튼을 눌렀다.

“너 강의는 어쩌고?”
“나도 너 따라서 휴강.”
“무슨 소리야, 정말.”
“그래서 놀 거야 말 거야.”
“뭐........”

놀자. 시라부의 작은 대답에 휴대폰 너머로 분주하게 가방을 챙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와니시의 옆에서 들리는 학교 특유의 웅성거림이 말끔히 사라졌다. 학교 앞으로 갈게. 어딘지 묻는 카와니시의 물음에 걷고 있던 방향과는 완전한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후타쿠치가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라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루쯤은, 후타쿠치 없이 괜찮을 거라 믿었다.

*

카와니시와 만난 시라부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괜히 나섰나,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머릿속이 각종 자책으로 가득 찼다. 불편하지 않다,라면 거짓말이었다. 모자 챙 아래의 시라부의 얼굴은 잔뜩 그늘져 있었다. 연달아 후타쿠치에게 오는 메일들을 바로바로 확인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순간 밀려오는 지루함에 하품이 나와 입을 벌리던 도중에 카와니시와 눈을 마주쳐 어색한 웃음을 지어냈다.

“혹시 배구 좋아해?”
“배구?”
“동아리로 배구하는데 보러 갈래?”
“지금?”
“뭔가 심심하게 만든 거 같아서.”

그래. 고개를 작게 주억거린 후 카와니시가 이끄는 골목기로 빠졌다. 새삼 처음 보는 길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게 시라부의 루트는 언제나 집 학교를 반복했다. 그나마 외출의 8할을 학교가 차지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육관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곰팡이 냄새는 덤이었다. 응원석에 앉아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카와니시는 탈의실로 사라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시라부의 손끝이 플라스틱 의자를 두어 번 치며 형성하던 리듬감이 체육관을 장악하려던 때, 누군가의 기척과 대화에 의해 뒤덮였다.

“와카토시~ 느리다고~?”
“텐도, 조심해라.”

문이 열림과 동시에 새빨간 머리를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 시라부는 작게 욕을 뱉었다. 물론 속으로. 여기 누가 있는데, 라는 말을 시작으로 시라부에게 향하는 눈의 개수가 점차 늘어났다. 순식간에 몰린 많은 시선에 부담을 느낀 시라부는 쓰고 온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가방을 어깨에 확실히 걸쳤다. 위축될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시라부는 불편했다.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 일면식 없는 무리까지, 혹여나 하는 마음에 후타쿠치의 번호가 입력된 휴대폰 액정이 깜빡거렸다. 웬 남자와 눈이 마주친 시라부는 순간 코를 찌르는 시원한 시트러스 향에 눈을 찌푸렸다.

“아, 먼저 와서 준비한다는 연락을 깜빡했네요.”
“그나저나 카와니시, 저게 누구야?”
“같은 과 친구인데 구경 왔어요.”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한 시라부는 어색한 미소를 작게 내비쳤다. 아, 벌써부터 감이 안 좋았다. 네트 사이로 공을 주고받고 하는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시라부는 계속해서 아까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의도된 건지, 우연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마주친 횟수는 벌써 열손가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냄새가 코밑을 맴돌고 떠돌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쉰 시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있는 것도 지루하고 답답했다.

“시라부! 내일은 학교 나올 거지?”

이름을 크게 부르며 묻는 카와니시의 물음에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잘 가라며 긴 팔을 휘청거리는 모습이 꽤나 우습기도 해 살짝 웃음이 터지려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체육관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켄지로! 연락이 왜 이렇게 늦어.”
“미안, 너 지금 어디야.”
“그나저나, 너 오늘 왜 학교 안 왔어.”
“그냥 안 갔어.”
“오늘은 괜찮아?”
“내가 너... 진짜... 과보호라 했지.”

조용히 한숨을 쉬던 시라부를 발견한 후타쿠치는 조심스레 걸어가 시라부의 가방끈을 잡아끌었다. 개구지게 웃는 후타쿠치에 작게 웃은 시라부는 바짝 들이밀며 다가오는 팔의 종착지는 어깨였다. 제 옆에 시라부를 두른 후타쿠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타쿠치에게 타박하려는 순간 또, 그 남자였다. 저 멀리서 시라부를 힐끔힐끔도 아닌 완전한 직진이었다. 아, 불쾌한 기분이 발을 타고 스물스물 올라올려는 찰나였다. 와카토시! 저 멀리서 부르는 큰 목소리에 그제야 남자의 시선은 시라부를 빗겨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