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커피 역사 - hangug keopi yeogsa

한국 커피 역사 - hangug keopi yeogsa

한국 커피의 역사

Korea Coffee History

한국 커피 역사 - hangug keopi yeogsa

양반 귀족 커피시대

(19세기 후반 ~ 1920년대)

가배에서 양탕국이라 불리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도입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대략 19세기 후반 개화와 근대의 바람을 함께 실려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커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 미국 유생인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1895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유길준은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 사람들도 커피를 마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 최초의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의 커피 사랑도 유명한 이야기이며 고종에게 자주 커피를 대접했던 독일 여인 손탁이 1902년 손탁호텔 안에 세운 ‘정동구락부’라는 곳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만 해도 커피는 지체 높으신 양반이나 외국인이나 즐길 수 있는 특수한 기호 식품이었으며 한자음을 따서 ‘가배(가배)’라고 하였는데 어쩌다 맛을 본 일반 사람들은 쓰디쓴 첫 맛에 서양에서 들어온 탕국이라 하여 ‘양탕(洋湯)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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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보급화시대

(1930년대 ~ 1960년대)

인스턴트 커피의 전성시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다방문화가 유입되면서 인텔리층과 다방을 중심으로 커피가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해방 후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의 군용 야전 식량인 ‘C 레이션’에 들어있던 ‘인스턴트커피’가 미군들을 통해 소개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인스턴트커피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 되면서 점차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인텔리들의 아지트였던 다방은 전쟁 후 점차 대중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잡고 선을 보고 음악을 들으려는 다양한 목적의 장소가 되었고 심지어는 사무실 대용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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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대중화시대

(1970년대 ~ 1980년대)

커피, 생활속에 녹아들다.

1968년 동서 커피가 설립된 이후 커피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곧 대중들의 대표 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76년 한국 커피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동서식품의 커피믹스와 1978년 커피 자판기가 개발 보급되면서 커피 시장은 대학생과 직장인을 중심으로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7년 커피 수입 자율화 이후 백화점에는 수입된 원두커피가 진열되었고, 거리 곳곳에는 ‘자뎅’, ‘난다랑’, ‘도토루’ 같은 원두커피 전문점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커피는 생활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급속한 경제 발전 속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온 직장인들에게는 휴식으로, 공부를 하는 수험생에게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피로회복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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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에서 에스프레소로

1990년대 들어와 냉온정수기와 실용적인 커피 자판기의 보급으로 인스턴트커피 시장은 더욱 확대되었고 가정과 사무실, 일반 음식점에서도 간편하게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9년 스타벅스의 국내 진출을 통해 바리스타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 문화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인스턴트커피 문화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고급 커피를 즐기는 카페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현재는 수 천 개의 에스프레소 커피전문점과 로스터리 카페들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어 인스턴트커피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커피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커피는 이제 과거와 달리 단순 기호식품이 아닌 이 시대의 대표 아이콘으로서 문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커피는 현재도 계속해서 전자동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 캡슐커피 머신 등의 기술 발전을 통해 새로운 커피문화를 창조해내고 있으며 원두커피와 인스턴트커피 등의 고급화, 실용화를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국 커피 역사 - hangug keopi yeogsa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도 어느새 100년을 넘기고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은 고종임금 이다. 임금이 마셨기에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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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건양 1년) 2월 11일.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콧속까지 얼어붙는 차가운 겨울 새벽.

초라한 궁녀용 교자(가마)에 몸을 의지한 고종은 변변한 호위도 없이 세자와 함께 황급히 경복궁의 영추문을 빠져나간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고종순종실록에서는 "이어아관"이라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폭 2m도 안되는 비탈진 좁은 길은 그 당시의 다급하고도 황망했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세계사를 통털어 단일 왕조로서 최장수하였던 이씨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야속하게도 이 비극의 역사에서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는 시작된다.

 일년간의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통해 고종은 커피 애호가가 된다.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karl lvanovich veber)가 고종에게 커피를 소개한 것이다.

 고종께서는 이 쓰고도 달콤한 커피에 상당히 매료되었던 것 같다. 이 당시에 소개된 커피는 각설탕 속에 커피가루를 넣은 것으로, 그대로 뜨거운 물에 넣고 저어 마셨다. 일종의 초기 인스턴트 커피인 것이다.

어쩌면 이 쓰고도 달콤한 한잔의 커피에서 고종은 자신의 삶의 모습을 씁쓸히 즐겼을지도 모른다.  

궁으로 돌아온 후, 광무4년(1900)에 고종은 덕수궁 내의 동북쪽 경치 좋은곳에 "정관헌"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관"을 짓게 한다. 이 때에는 원두커피가 도입되어 주로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적 분위기가 나는 로마네스크풍의 이 건물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라고 할수 있는 곳이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신들과 함께 서양 고전음악을 들으며 커피와 다과를 즐겼다. 궁중카페인 것이다.

 고종순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광무 2년(1898) 9월 11일

 대신들에게 특별하사품으로 커피를 내리셨다.

 손탁 호텔(Sontag hotel)

 1902년 10월 서울 중구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들어선 서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구한말 역사를 보면 명성왕후와도 가깝게 지냈던, 4개국어를 능숙히 구사했던 손탁이라는 독일계 러시아인 여성이 등장한다.

한국 커피 역사 - hangug keopi yeogsa
<한국 최초의 커피숍인 손탁호텔 테라스에서 본 한양의 풍경.>

손탁은 오늘날의 로비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1885년 10월,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가 서울로 부임되어 올 때 함께 온 인물이다. 베베르의 소개로 구한말의 궁중에 뛰어든 그녀는 타고난 처세술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며 (아간파천시에는 고종의 음식과 개인용품등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받게 된다.

 이 건물은 외교관들의 사교와 로비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특히 미국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반일 성향의 외교관 사교 클럽인 "정동구락부" 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다. 당시 극동 아시아 외교의 중심지였다.

 이후 이 건물을 헐어내고 현대식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손탁 호텔이다. 이 호텔의 1층에 "정동구락부"라고 불려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이 등장하게된다.우리나라의 커피 문화는 호텔 커피숍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왕실의 커피가 드디어 백성들에게 소개된것이다. 비록 외교관과 특권층들만이 드나들었던 곳이지만, 그래도 백성들은 입소문을 통해 "가배차"(커피)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국권피탈(한일합방)을 거치면서 손탁호텔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되며 1918년 문을 닫는다.

 커피로 고종을 독살하려하다.

 1898년 9월,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에 의해 독이 넣어진 커피를 고종이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사건이 있었다.

 김홍륙은 아관파천시 고종의 통역을 맡으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게된다. 고종의 총애를 믿고 온갖 부정을 일삼던 그는 1898년 8월에 러시아와의 통상거래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발각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게된다.

 흑산도로 더나기 직전, 당시 황제의 음식을 담당햇던 김종화로 하여금 황제의 커피에 독을 넣게한다. 커피를 좋아했던 고종은 커피를 마시기 전에 커피향을 먼저 즐기고는 했는데,(이 대목이 원두커피를 주로 즐겼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 커피의 향이 평소와 다른것을 느낀 고종은 이상하다 생각하며 반 모금정도만 커피맛을 보게 된다. 덕분에 다행이 목숨은 건졋으나 치아를 무려 18개나 잃게 된다.

 이 사건은 유배를 가게 된 김홍륙이 개인적 앙심을 품고 고종을 독살하려 했다는 것으로 단순, 간단, 명료, 조속하게 종료된다.  

* 그 이후의 커피 확산 *

1930년대 (서울의 다방)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은 다방은 「날개」의 작가 이상이 다방 제비를 개설하므로 써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다.

1950년대 (미군PX에서 나온 인스턴트 커피)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으로 비상시에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인스턴트 커피는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암거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인스턴트 커피가 국내에 퍼지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고, 간편함과 인력절감의 장점은 순식간에 커피시장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이러한 결과는 커피하면 인스턴트로 인식되는 커피 본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계층에서는 원두커피가 여전히 애용되었다.

1960년대 다방문화는 명동의 통기타와 청바지 문화로 주도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거의 15년 동안 인스턴트 커피와 국산차류를 주로 한 다방(茶房)이라이라는 이름으로 지하실이나 건물의 2층 등, 커피의 맛과 향을 음미하며 즐긴다는 차원보다는 고객에게 단순하게 공간을 이용하게 한다는 안일한 운영과 단순한 서비스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커피가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초반 동서식품에 의해서였다. 미국 제너럴 후드社와 기술제휴한 동서식품은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국내에서 생산했고 미원음료, 한국 네슬레 등이 뒤를 이어 커피 생산에 나섰다. 이후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 왕국이 된다. 외국에선 원두 커피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한국에선 인스턴트 커피가 편의성과 마케팅에 의해 커피 시장을 장악, 세계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가 됐다.

1980년대 세계화되어 가는 문화의 전환점인 시대에는 다방이 지하나 어두운 조명과 단순한 인스턴트 커피의 메뉴라는 점에 식상해 있던 사람들에게 테이블마다 커피 설명서를 붙여 놓고 손님들에게 원두커피에 대한 지식을 알리며 고객이 원한다면 원두커피 메뉴는 무엇이든 제공한다는 경영방침에 전문 커피점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어둡고 고전적인 지하의 다방에서 밝고 공개적이며 좀더 대중적인 커피전문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다방의 감소추세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본격적인 커피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접어든다. 이 시기 원두커피는 향커피(헤즐넛.바닐라등)를 위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