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배상 횟수 - ilbon baesang hoes-su

“우리는 과거 일본군이 이 문제에 관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일본 배상 횟수 - ilbon baesang hoes-su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동아일보> 1992년 1월 30일 치.

일본 의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발언이 나왔다. 오늘로부터 26년 전인 1992년 1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발언의 주인공이다. 그는 참의원 연설에서 과거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정부가 주도해 한국 여성들로 하여금 일본 군인들과 성관계를 갖도록 한 사실에 대해 사과했다. 미야자와 총리는 이날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마음 속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미야자와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과에는 배경이 있었다. 일제 때 한국인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에 ‘일본군이 직접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미군의 공식 문서가 처음 발견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서가 공개된 시점에서 약 한 달 뒤인 이듬해 1992년 1월 16일은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이 예정돼 있었다. 그는 방한을 전후로 모두 네 차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가 매번 말을 바꿔가며 후속 조처에는 미온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쪽의 이런 행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는 꼴이 되고 있다. 미야자와의 사과 역시 점점 무의미한 기록이 되어가고 있다.

미군 공식 문서의 내용은?

1944년 8월13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 4명은 포로로 잡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20명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조선인 위안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희귀한 사진이다. <미국립문서보관소>, <한겨레>자료사진.

일본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발언이 나오기 한 달여 전쯤인 1991년 12월 21일, 한국 정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제공받은 ‘일본군 위안부 직접 동원’ 문서를 공개했다.

문서는 1944년 8월과 9월 인도와 버마 주둔 미군 심리전 부대가 작성한 것이었다. 문서에는 위안부의 충원 방식과 운영현황, 일본군과의 관계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문서의 근거는 위안부에 강제 동원됐던 한인 여성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소 운영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군 쪽의 심문 기록이었다. 문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안부 모집에 일본군의 허가가 필요했고 △위안부들의 국외 이동을 위해 일본군이 배를 제공했으며 △일본군이 동남아시아 각지의 주둔 일본군 사령부에 위안부들의 교통·식량·의료 등의 편의 제공을 요청하는 통행증을 발급했다 △ 위안소는 일본군의 부대별 계급별로 자체 작성한 시간표에 따라 운영했으며 일본군의 엄격한 감독 아래 성병 검진 등이 이루어졌다.

(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으로)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10여명으로 처음 시작한 수요시위. 1992년 1월8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 1백여명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미야자와 수상은 방한에 앞서 공식사죄, 희생자명단 공개, 유해발굴송환 등 전후처리대책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1991년 1월 11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하루 앞둔 1992년 1월 15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네개 단체 회원 3백여명이 미야자와의 방한 반대시위를 벌이며 대사관 건물에 달걀을 던지고 있다. 1992년 1월 17일 오후 미야자와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연설하는동안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1백여명이 의사당 앞에서 '백배사죄 즉각보상'등을 요구하며 일장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상 <한겨레>자료 사진.

문서가 공개되자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한국민들 사이에서 일본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물론, 미야자와 일본 총리의 방한에 반대하는 반일 시위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말뿐인 네 차례의 사과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일본 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일본 내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미 국립기록보관소와 해군 역사센터 등에서 공식 문서가 발견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더 이상의 발뺌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1992년 1월 15일 치.

미야자와 총리는 방한 이틀 전인 1992년 1월 14일 총리 관저에서 한국 특파원들을 대상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위안부로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데 대해 충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가의 관여를 인정, 사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토 관방 장관도 이날 서기장 등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시사하는 발언을 밝히기도 했다.

<경향신문> 1992년 1월 17일 치.

1월 16일 방한한 미야자와 총리와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의 청와대 만찬 자리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죄의 뜻을 거듭 밝혔다. 마야자와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 다시 한 번 귀국 국민께 반성과 사과의 뜻을 말씀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일본 국민은 무엇보다도 먼저 과거의 한시기에 귀국 국민들께서 일본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셨던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1992년 1월 17일 치.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미야자와 총리의 일본군 위안부 사죄 발언은 다음 날 국회 연설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17일 오후 국회 연설에서 “일본과 귀국 간의 관계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수천 년에 걸친 교류 속에서 역사상 한 시기에 우리나라가 가해자이고 귀국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라면서 “우리 세대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 역사를 바르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미야자와 총리의 국회 연설은 위안부, 무역 역조 시정, 재일한국인 지위 등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에 대한 언급보다는 일본의 국제적 역할에 비중을 두는 분위기를 강하게 풍겼다. 이는 미야자와 총리 국회 연설의 관심사가 전혀 다른 데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국제 문제-지역 문제-한반도 문제-양국 관계로 잡은 연설순서가 이를 뒷받침했다.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으로 돌아간 미야자와 총리는 앞서 언급한 데로 일본 의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한다. 하지만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의 뜻은 거듭 밝히면서도 일본 정부의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문서가 또 발견됐다

일본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몇 차례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데 그쳤을 뿐 일본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국인 위안부들이 일본군들에 의해 집단 학살돼 매장당하는 처참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는 사이 이번에는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서가 또 발견됐다. 일본 정부는 1992년 2월 3일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는 위안부 및 위안소에 관한 일본군 자료 50점을 발견했다. 3일 뒤인 6일과 7일에도 일본과 한국에서 위안부 동원·관리에 총리를 포함한 옛 일본 정부 수뇌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가 잇따라 발견됐다.

특히 6일 일본 방위청에서 발견된 47종의 위안부 관련 문서에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전해졌던 중국인과 필리핀인 등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국 외의 다른 국가에 대한 사과 등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국가 간 배상은 물론 개인 보상까지 법적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게다가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 당시 식민지배 피해 유가족들이 벌인 반한 시위를 문제 삼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미완으로 남은’ 일본 정부의 첫 공식 사과

<경향신문> 1993년 8월 5일 치.

일본 정부는 1992년 7월 6일 마침내 일제 말기의 위안부 문제에 당시 정부가 관련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카토 고이치 관방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작년 12월부터 올해 6월까지 6개 관계 부처에 보관 중인 한반도 출신 위안부 관련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4개 부처에서 총 127건의 자료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가토 장관은 “이들 자료를 토대로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의 관여가 있었음이 인정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우리의 사죄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각계의 의견을 들어 성의를 갖고 대처하겠다”고 덧붙여 보상 등 후속 조처를 취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토 장관은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징집’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자체 조사 결과 발표를 마쳤다.

일본 정부는 그 후 26년이 지난 2018년 현재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은 하지 않고 있다. 2018년 1월 28일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31명이다.

강민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