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드디어 당신도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상대는 같은 과 선배. 연애하는 건 너무 좋은데, 같은 과라서 좀 걱정된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이럴 바엔 비밀로 하는 게 낫겠다 싶어진다.

자, 이럴 때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집단 내 비밀 연애란 장거리 연애만큼이나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이다. 당장의 귀찮은 일들을 피하기 위해 시작했다간, 뒷감당이 힘들어질 수 있다.

비밀 연애를 하면서 당신이 겪게 될 일들을 정리해 봤다. 아래의 시나리오를 보고, 조금이라도 걱정된다면 지금이라도 애인과 다시 상의해 보길 권한다.

1. 비밀 연애 시작하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한 사람이 비밀 연애를 제안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거절하기가 어려워진다. 설사 비밀 연애가 내키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강력하게 주장하면, 연애 초 분홍분홍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승낙하게 된다.

어영부영 승낙은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거다. 왜 비밀로 하자고 할까. 진심이 아닌가? 내가 부끄러운가? 혹시 숨겨 놓은 다른 애인이 있나? 마음이 복잡해 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괴롭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2. 데이트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비밀 연애 중에는 데이트 한 번 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가 힘들다. “끝나고 다 같이 치맥 하자”는데 둘만 쏙 빠지면 커플인 게 티가 날 것 같아서 억지로 참석하는 술 자리가 일주일에 두어 번. “10분 뒤에 만나”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척 따로 나섰다가, 약속 장소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 싸우기 일쑤다.

간신히 만나 데이트를 하려고 해도, 혹여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끊임없이 두렵다. 스릴있다고 좋게 생각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죄 지은 사람마냥 숨어다니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3. 의도치 않은 싸움이 계속된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당신의 친구들은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숨기고 또 숨겨도 눈빛에서 행동에서 다 티가 날 것이다. “니네 둘이 사귀냐”고 의심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게 되면 괜히 오버를 하게 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되려 큰 소리를 내며 헛소리를 하겠지. “쟤는 이성으로 느껴지지도 않아”

그 개소리를 들은 당신의 애인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상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툴툴대다 다투게 될 거다.

4. 다른 이성이 접근한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공개 연애를 하면 다른 이성들로부터 내 애인을 보호하기 편하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임자 있는 사람에겐 침 흘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비밀 연애를 하면 다른 놈이 내 애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을 보고 어떤 조치도 취할 수가 없어진다. 여우 같은 게 내 애인한테 꼬리 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릴 수가 없다.

누군가 내 애인을 좋아한다고 공개 발표라도 한다면? 친구들 모두를 기만하고 뒤에서 호박씨 깐 나쁜 놈들이 되는거다.

5.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친구에게 연애 상대를 감춘다는 건, 일상의 거의 모든 일을 감추는 것과 같다. 하다못해 “어제 뭐 했어?”하는 간단한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모두 알다시피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다. 날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6. 적은 내부에 있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비밀 연애를 하겠다던 굳은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다른 놈이 내 애인에게 접근하려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낀 사람이 혹은 비밀 연애에 지친 사람이,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티를 폴폴 내는 것이다. 친구들 다 있는데 일부러 내 옆에 슬쩍 와서 서 있다거나, 술 마시고 내가 좋다고 폭로해 버린다거나.

팀킬까지 당했다면 당신의 비밀 연애는 거의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제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7. 발각 되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드디어 비밀 연애가 끝이 났다. 자의에 의해서 끝났건, 타의에 의해서 끝났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뒷감당이다.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해명하고 싹싹 빌어야 한다.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사과하고 다니다 보면 현자 타임이 올거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처음부터 말할걸…”

illustrator liz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4월 기획] 해외 장거리 연애 3년차, 관계 불안을 극복하는 법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사소한사람들2021. 4. 25. 22:24

“1년 반 동안 남자친구를 못 만났다고?”

아끼는 동생 봄이와의 대화 중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장애물이 차고 넘치는데, 거기다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전 세계적 재난까지 극복하고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버거워하는 나와 달리 무던한 동생에게서 어딘가 모를 굳건함이 느껴졌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보다 소중한 사람과의 유대를 지속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즘. 수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pinterest

INTRO

봄아 안녕!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스스로를 한 마디로 표현 부탁해.

언어와 다른 나라와의 교류에 관심이 많은 ‘변덕쟁이’이야. 내년 졸업을 앞두고 관련 활동을 다양하게 이어왔어.

그럼 반대로 남자친구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호수’ 같은 사람. 다닐은 어떤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늘 잔잔해. 나는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라 변덕쟁이에 가깝고. 다닐은 이런 나의 성향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반응하는 내가 신기하고 재밌나 봐.

변덕쟁이라면 어떤 식의 변덕을 말하는 거야?

나는 항상 내 안에 파도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일기장 이름도 파도야. 어릴 때는 그 파도를 타며 즐겁게 놀았다면, 크면서는 그 파도에 내가 잡아먹히는 느낌이라 힘들 때가 많았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닐과 함께 하다 보면 금세 잠잠해지더라고. 덕분에 나의 감정적인 굴곡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게 돼.

다닐을 만난 이후 자신의 마음을 담은 것 같아서 좋아한다는 노래

# 1. 러시아에서 시작된 인연

남자친구를 러시아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는데 러시아는 어쩌다 가게 된 거야?

1년간 러시아로 교환 학생을 다녀왔어. 어릴 때부터 나의 강약점을 고려하기 보다 사회가 인정하는 모범 답안의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해왔거든. 그런데 정작 성인이 되고 난 뒤 이제서야 ‘너의 길을 가라’고 하니까 혼란스럽더라고. 그래서 러시아에 갈 때 ‘최대한 많은 경험과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오자’고 스스로 다짐했어. 한국어 교육, 문화 교류 행사 기획 등의 국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지.

이전까지 연애에 관심 없던 너라서 처음 남자친구를 소개할 때 신기하고 반가웠던 기억이 나. 언제 처음 만났어?

한국 문화 체험 행사에서 처음 만났어. 나는 통역 봉사자였고, 한국 문화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다닐은 친구들과 참여한 거지. 그 지역 분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컸는데, 그간 한국인을 직접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더라고. 그러다 보니 참여자분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이 쏟아질 정도였어. 그 인파를 뚫고 질문하던 다닐이 지금도 기억이 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리포터처럼 전문적인 질문들을 했거든.

그 행사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했던 거야?

다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인터뷰의 연장선처럼 혹시 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냐면서 번호를 물어봤어. 정신없던 와중에 셀카까지 같이 찍었어.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 나를 처음 본 게 아니었대. 오전 행사 때 어린이들한테 윷놀이를 가르쳐주던 나를 봤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서 놓쳤던 거야. 너무 슬프고 우울한 상태로 집을 가던 중에 다시 나를 발견하고 급하게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더라고.

그렇게 극적으로 첫 연애를 국제 연애로 시작하게 된 거구나. 성인이 된 후 2년간 다수의 연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었잖아. 이유가 있었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컸던 것 같아. 나는 ‘상대가 나와 맞는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성향이거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도 괜찮을 만큼 믿을만한 사람인지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가 필요해. 살아가는 태도와 대화가 통하는 정도에 따라 상대에 대한 신뢰가 커지는데 당시 그럴만한 사람을 못 만났어. 재수 후 대학 생활에 충실하느라 그만큼 연애에 시간을 투자할 여력도 없었고.

그래서 다닐의 첫인상은 어땠어? 처음부터 호감이었어?

우유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훈남이었어. (웃음) 그런데 정작 당일에는 다닐한테 연락이 없는 거야. 하루 지나고 연락이 왔는데 러시아어와 영어 중에 어떤 게 더 편한지 물어보는 등 나를 배려하는 태도가 느껴졌어. 만나면서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예의가 몸에 깃든 사람인 게 내게 중요한 신뢰 구축의 요인이었던 것 같아.

그래도 첫 연애라 더 조심스러웠을 것 같아. 어떤 게 가장 걱정이었어?

나는 불확실성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관계는 존재 자체가 불확실성이잖아. 그래서 다닐한테도 직설적으로 나랑 진지하게 만나려고 하는 건지 먼저 물어봤어. 너무 당연하게 ‘응’이라고 대답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친구 이상의 관계는 어려울 것 같다고 먼저 선을 그었지. 몇 번 만나면서 다닐이 좋은 사람인 건 느꼈지만, 1년 뒤에 엮여있는 것 없이 후련하게 러시아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

다닐 입장에서도 큰 용기를 냈던 것 같은데 서운했겠다.

맞아. 절망적인 표정으로 ‘이미 너에 대한 마음이 커져서 친구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서 내가 더 당황했던 기억이 나. 그제야 나도 호감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지만, 진지한 관계로 발전시킬 자신이 없다고 말했어. 그러자 다닐이 내가 생각하는 진지한 관계는 어떤 건지 묻더라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생기고,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어. 그 말을 듣고 다닐은 연인 관계에 대해 그런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그건 충분히 두 사람이 조율할 수 있는 문제라고 설득하더라고.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두 사람이 자주 만났던 카페

그렇게 계속 만나게 된 거야?

만나기는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1년 내내 내 마음을 부정했어. 만나면서도 계속 다닐한테 이 불안함에 대해 말했고, 마음이 더 커지지 않도록 일부러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나기도 했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과 행동으로 계속 부정한 거야. 나도 고치고 싶은 습관이지만 난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편이라 그게 연애에도 적용된 거지. 마음이 식지 않았음에도 현실적인 이유로 충분히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너무 마음이 괴롭고 슬펐을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듣는 상대도 상처였을 것 같아.

매번 울면서 얘기했지. 내가 결국 떠나야 하는 타지인 인 걸 다닐도 알다 보니 서로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잖아. 그래서 더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운 건, 내가 이 정도로 이 관계에 확신이 없는데도 현재 내 마음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어. 내 걱정을 함께 고민해 주고, 내 마음이 어떤지 계속 물어봐 줬어. 혹여나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내가 이 관계로 피해를 입거나 잃을 것이 없다는 걸 인지시켜주면서 내 불안을 달래주더라고. 해결책을 하나씩 제안해 준 덕분에 나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지.

실제 만나보니까 다닐은 어떤 사람이었어?

정말 호수 같은 사람이었어. 이상형을 물어볼 때마다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다닐을 만나면서 나와 맞는 사람이란 확신이 들어서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남녀 불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더라고.

연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알게 된 너의 모습이나 변화한 점이 있다면?

내가 변덕쟁이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런 나의 모습을 숨겨왔던 것 같아. 친구나 가족 등 그 누구와의 사이에서 이 정도까지 솔직해본 적이 없었거든. 다닐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1순위라면,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우선인 사람이야. 둘이 시스템이 완전히 다른 거지.

그 정도면 아무리 다닐의 성향이 호수 같더라도 힘든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나도 늘 그게 궁금했어. 나는 내 기준에서 이상적인 상황과 어긋날 때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편이거든. 그런데 다닐은 갈등이 생길 때도 차분히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해 설명할 뿐, 단 한 번도 내가 어떤 면에서든 바뀌길 요구한 적이 없어. 다닐은 나를 보면서 생각을 실현하고, 도전하는 태도를 배운대. 나는 그런 다닐을 보며 경청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더라고.

# 2. 알 수 없는 미래, 흔들리는 마음.

처음 목표했던 대로 1년 동안 연애를 포함한 다양한 경험을 했으니 배운 게 참 많았겠다.

맞아. 난 어릴 때부터 언어를 좋아했거든. 나랑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과 언어만 통하면 연결될 수 있는 거잖아. 처음으로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낀 것 같아. 살아있다는 느낌에 벅찰 정도로 행복해서 귀국을 개강 이틀 전까지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펑펑 울 정도로 너무 좋았어. 그러다 보니 적응할 시간 없이 현실에 복귀를 하게 된 거야.

그 정도로 좋았던 기억이 많았다면 한국에 돌아와서도 쉽지 않았겠어.

꿈에서 깬 기분이었지.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 몰라서 문제였다면, 돌아와서는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감 때문에 가장 괴로운 시기였어. 내가 느낀 내적 변화의 크기와 달리 한국에서의 현실은 그대로였거든. 모두가 똑같은 직업과 시험을 준비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제한적이더라고. 무언가 선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커졌어. 유학 생활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겨우 발견했는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막연함과 다시 모범답안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괴리감이 공존했어.

선택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계기가 있었을까?

고등학생 때 러시아어를 배우긴 했지만 절대 대학 전공까지 할 생각은 없었거든. 외국인 남자친구와의 연애 또한 내 인생에 전혀 없던 선택지였어. 한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에 얼마큼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절감하다 보니, 직업 선택은 더욱더 신중해지더라고. 긍정적인 영향만큼이나 부정적인 영향도 동시에 받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삶의 목적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불안이 커져갔어.

그때 다닐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버티기도 했을 텐데 마침 코로나가 터졌던 거네.

맞아.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안 되자마자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 당장 내 삶조차 어떻게 구원할지도 막막하다 보니 이 관계를 유지할 여력이 없는 거야. 누구 하나는 희생이 필요한 관계인데 얼마나 장애물이 많아. 내 삶 자체가 힘들다 보니, 그 외 관계에서 비롯된 어려움까지 고민하고 마음을 쓸 여력이 없더라고. 고작 일 년 만났는데도 이렇게 쌓인 추억이 많고 힘든데. 이 정도 좋은 기억만 남기고 친구로 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함께 자주 걸었던 공원

처음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다닐의 반응은 어땠어?

나는 끝을 바라본다면, 다닐은 늘 나보다 더 멀리를 내다보는 듯했어. 대체 어디서 오는 확신인지 모르겠어. 한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 지금 새롭게 적응하느라 힘든 것 같으니까 같이 문제가 뭔지 이야기해보면서 찾아보자고 먼저 얘기해 주더라고. 순간적인 안정은 되었지만 자연스레 또 헤어짐을 생각하게 된 데는 코로나 영향이 컸어. 안 그래도 난관이 많은 관계였는데 재난 상황까지 닥치면서 더 불확실해진 거잖아. 지금껏 내 인생의 이만큼 큰 변수는 없었어.

아무리 호수 같은 다닐이라도 사람이고, 주변의 평범한 연인들을 보면서 부러워도 할 거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한 순간이 있을 거 아냐.

맞아. 코로나가 터지던 해 겨울, 다닐이 한국에 올 예정이었는데 자연스레 무산됐거든. 잠깐이면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년이 넘게 지속되더라고. 그때 다닐도 마음처럼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게 많이 힘들다고 처음으로 말하곤 했어. 그렇지만 그때마다 이런 어려움보다 나와의 관계 속에서 얻는 더 큰 가치에 대해 얘기하더라고.

팬데믹 상황에서 직장인인 다닐과 4학년 취준생인 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을 것 같아. 이 시기를 둘은 어떤 방식으로 보내고 있어?

코로나 이후, 오히려 나한테 이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더 또렷해진 것 같아. 헤어짐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는 상황에서 나와의 관계를 얼마나 유지하고 싶은지 다닐의 진심을 더 느껴서 내가 용기 아닌 용기를 얻게 되었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얼굴 보고 풀릴 사소한 문제도 안 풀릴 때도 있거든. 그때마다 다닐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찾고, 개선할 의지를 보여주니까 한 번 더 해볼 용기를 얻게 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나도 가능성을 믿게 된 것 같아.

그래도 여전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있을 것 같아.

물론이지. 아무래도 추억이 제한적으로 쌓이잖아. 연인 관계는 함께 하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원동력으로 관계가 더 끈끈해진다고 생각하거든. 그에 비해 알록달록한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를 유지하는 게 씁쓸할 때도 많아.

그래서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만의 문화를 쌓아가고 있어. 예를 들면,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같은 영화를 같은 시간에 틀고 본 다음 대화를 하는 거야. 이것도 다닐이 생각 한 아이디어야. 그러다 보니 이것도 나름 우리만의 연애 방식 같더라고. 어쩌면 보통의 연애라는 게 내가 생각한 또 하나의 모범답안이었던 것 같단 생각도 들어.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현재를 더 단단하게 해주는 따뜻한 추억

기약 없는 팬데믹과 각자의 상황에 따라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도 할 텐데. 앞으로의 대해 어떤 마음이나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마지막으로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 함께 이별의 기준까지 세웠어. 미래가 어떻든 한국에서 딱 한 번은 만나고 앞으로 어떡할지 결정하기로 한 거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까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보자고 약속한 거지. 그러고 나니 괜한 불안함이 사그라 들더라고.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느끼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함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느껴지더라. 이 불안의 원인은 사실 다닐이 아니라 여러 복합 요인이 합해진 거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아.

이 관계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결정한 뒤에 오히려 불안함이 사라진 거네.

응. 우리도 서로 ‘이렇게 만나는 게 맞나?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 코로나가 끝나지 않더라도 자가 격리 기간이 완화되는 기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내겐 원동력이 돼.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불안함인가 스스로 점검해볼 수도 있고.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공유할 수 있도록 규칙을 많이 정했거든. 서로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흔적을 공유해. 예를 들면, 나는 오늘 할 일의 일정표, 다닐은 오늘 배운 한국어를 공유하는 등 각자의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고민은 조금씩 줄이자고 했어.

다닐과 만나면서 사랑, 연애, 결혼에 관한 가치관이 변했을까?

응. 특히 결혼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했어. 이전까지는 이성과의 관계가 불편했고, 나 혼자인 게 편해서 평생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상대가 다닐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알면서 변한 거지.

#OUTRO.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혹은 ‘다닐이 나를 진심으로 위하는구나’라고 느낀 순간이 있다면?

만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다닐을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는 거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은 확신하지만, 이만큼 이성을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비교 군도 없고. 그러다 최근에 이 관계의 갈등과 제약과 별개로, 다닐이 하는 일과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잘 풀리길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을 느꼈을 때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어.

반대로 다닐의 진심이 느껴질 땐, 부모의 마음으로 나의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고 걱정해 줄 때 같아. 사실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그러니 그런 다닐의 마음이 더 고맙더라고.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렇게 오래 깊이 알아간다는 건 너한테 어떤 의미야?

나를 발견하는 과정 중 하나 같아. 내가 가졌지만 모르던 좋은 모습을 다닐이 채굴해 주는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다닐은 나와 달리 정말 낭만적인 사람이거든. 꽃을 선물하거나,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등 나에게 하는 모든 것에 마음을 담아. 그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할 때도 진심으로 대하고, 나와 달리 밥 한 끼 먹더라도 정성을 담는 사람이야. 그런 다닐의 행동에 내가 크게 감동하는 걸 보면서 ‘내가 이 정도로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싶더라고.

너를 인터뷰했는데 너뿐만 아니라 만나지 못한 다닐에 대해 더 알게 된 것 같아. 너는 어땠어?

나도 그래. 다닐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뽀뽀해 주고 싶었어. (웃음) 나는 지금껏 내 결핍과 처한 상황의 문제를 찾는데 초점을 맞춰왔다면, 다닐은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 같아. 그동안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 답안에 어긋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내 탓이라고 여기고 스스로를 평가하며 살았거든. 다닐을 만나면서 먼 미래보다 현재를 충실히 보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걸 느껴. 그래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의지가 생기니까.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봄이 최근에 가장 와닿았다는 나태주 시인의 글

연인 관계는 연차가 쌓일수록 고차원의 미션이 주어진다. 가장 치명적인 건 최종 빌런이 나라는 사실이다. 회피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반복해서 마주해야하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동시에 상대의 한계 또한 받아 들이는 과정의 연속이다. 나 혼자 바로서기도 벅찬 와중에 타인과의 균형까지 맞춰야 한다니. 그 어려운 것을 해내기엔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고, 그 마음 또한 부질없이 연약하다. 그러니 아무리 굳건한 마음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바래지기 쉬울 수 밖에.

러시아에서 한국까지 이어진 이 둘의 원동력을 이제야 알겠다. 주어진 문제에 좌절하기 보다, 불안한 미래 앞에 흔들리는 초라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바라봐주는 것이다. 감히 누가 이들의 마음을 평가하고, 끝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함께 정한 마지막 결말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사람만의 모범 답안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의 일상에 물들어 흔적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일테니.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봄의 용기에 박수를, 정처없이 흔들리던 봄의 곁을 지켜준 다닐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러시아까지 가득 담아 보내본다.

장거리 비밀 연애 - jang-geoli bimil yeon-ae

클릭하면 사소한 인터뷰를 카카오톡에서도 받아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