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사관 - joseon-wangjosillog sa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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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사관 - joseon-wangjosillog sagwan

사관(史官)이란 조선시대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언행 및 행동 뿐만 아니라 관리들에 대한 평가와 주요 사건, 사고 등 당시의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사관은 국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국왕의 언행 및 행동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사관의 역할로 인하여 왕과 신하는 은밀히 만나 정사를 의논할 수 없었으며, 열린 정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국왕과 대신들의 부적절한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방지할 수 있었지요.

사관은 역사의 서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지식을 갖춰야 하며, 글을 잘 쓰는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기록(이것을 직필(直筆)이라고 합니다)해야 하기에 권력 앞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관들은 여러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사관이 직필의 원칙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다음의 예시로 알 수 있습니다.

1404년(태종 4년)에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태종은 급히 일어나서 좌우를 둘러보며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관은 태종이 한 말까지도 사초에 기록했습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기묘) 4번째기사

이렇게 사관들은 직필의 원칙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의 국왕은 사관의 기록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관은 실록을 편찬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인 ‘사초’를 작성했습니다. 사초란 사관이 왕 옆에서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관은 매일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또 하나의 사초를 작성하여 집에 보관했습니다. 이렇게 사관이 개별적으로 집에서 보관하던 사초를 ‘가장사초’라고 하는데, 가장사초는 이후 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설치되면, 그 때 실록청에 제출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사관은 가장사초에 자신이 직접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실록에는 ‘사실’과 함께 ‘비평’이 담겨 있습니다.

실록과사관, 최고 권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기록정신 최근 남북 정상회담의 대화록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여,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반면 교사로서 조선시대 역대왕들의 행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관한[조선왕조실록]의 기록정신이 새삼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太祖로부터 25대 철종哲宗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으로서 기록문화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정족산본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0생활 등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특히 전임 사관史官을 두어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게 하고, 왕이 사망한 후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 시스템은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01 국보 제151호[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사관史官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국왕의 사후에 전 왕대의 실록이 편찬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국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영사領事·감사監事, 수찬관, 편수관, 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시정기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 받아 춘추관에서 그 중 중요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 『춘추관일기』, 『의정부등록』, 『승정원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매년 책으로 편집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보관된 시정기는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책은 편찬이 완료되면 국왕에게 바쳤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예외였다. 편찬의 완성만을 총재관이 국왕에게 보고하고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후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왕의 열람을 허용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사실史實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관史官이라 칭하였다. 좁은 의미의 사관은 예문관의 전임관원인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으로서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한림 8원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사관이 되어 입시, 숙직, 사초의 작성, 시정기의 작성, 실록편찬, 실록보관을 위한 포쇄(暴灑 : 실록을 병충해나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람에 말리는 일, 대개 3년에 한 번씩 포쇄 작업이 이루어졌다)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림 8원의 직위는 매우 낮은 편이었으나 청화淸華한 벼슬로서 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었다. 또한 문벌이 좋지 못하여도 되지 못하였다. 조선초기부터 사관을 선임하는 법은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사관에 결원이 있으면 춘추관의 당상 6품 이하의 문신 가운데서 경서와 사기 및 문장을 시험하고, 또 그 문벌을 조사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뽑아서 임명하였다. 사관 8명은 번을 나누어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궁중에 숙직하고 조회, 조참, 경연 등 국왕이 참여하는 행사는 물론이요 중신회의와 기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중대 회의에도 대부분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국가의 눈과 귀가 되었던 셈이다.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고 보고 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까지를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대 사관들의 역사인식까지 담겨져 있다. 또한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였고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사관들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나 정확히 사실을 기록했던가는 다음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태종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 2월 8일 위의 기록은 『태종실록』의 한 부분으로서,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사실을 기록하지 말라고 한 발언까지 기록한 사관의 철저함이 나타나 있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中草,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초초와 중초의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세척하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차일암遮日巖이라 불린 널찍한 바위에서는 물에 씻은 종이를 말렸으며, 말려진 종이는 조지서造紙署에서 새로운 종이로 재활용되었다. 세초를 했던 개천과 조지서의 모습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선명히 표시되어 있다.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행사인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

조선후기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하였다. 사고는 실록 등 주요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다.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 1556~1623)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 안의(安義, 1529~1596)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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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보다 안전하게 사고를 지키게 했는데 전등사(정족산사고), 안국사(적상산사고), 각화사(태백산사고), 월정사(오대산사고)가 이러한 기능을 하였다.

실록의 관리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3년을 주기로 하는 정기적인 포쇄 작업이었다. 포쇄는 책을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쇄 작업은 사관들의 주요 업무이기도 했다. 왕명을 받은 전임 사관들은 사고에 가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으며, 포쇄를 한 정황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실록형지안’과 ‘실록포쇄 제명기’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쇄는 지방의 4대 사고를 거친 현존 『조선왕조실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실록 중에서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의 원본 실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현재까지도 실록의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에는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가 큰 몫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사관들이 철저히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을 관리, 점검한 모습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글·사진.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