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작 이 시기 한나라에서는 당나라나 통일신라 복식과 많이 다르게 생긴 곡거(曲裾)라는 복식이 가장 유행했을 때였는데, 웃기게도 극 중 한나라출신 인물인 현도군 태수 양정과 그의 딸이자 대소의 부인인 양설란은 고증에 맞게 곡거를 입고 나온다. 그런데 원후, 유화, 예소야 같은 부여의 왕실 여성들은 고증에 맞지 않은 당나라 혹은 통일신라풍에 가까운 복식을 입고 나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 사극인데 한국보다 중국 의상 고증이 더 좋은 황당한 시츄에이션[19] 사실 제작진들이 참고한 당나라 혹은 통일신라 복식은 서역이나 선비족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복식들이라 순수 한푸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의상이다. 오히려 흉노를 제외하고 이민족과 교류가 거의 없던 시기에 입던 의상이자 극 중 양정과 양설란이 초반에 입고 나오던 곡거가 훨씬 한족의 색이 짙은 한푸의 원형에 더 가까운 의상이다.[20] 하지만 외형적으로 무조건 비슷했던 것도 아닌데, 기본적으로 고대 한민족은 상하의가 투피스로 나뉘어진 의상이 유행했던 반면 중국은 몇몇 호복의 영향을 받은 복식 빼고는 기본적으로 상하의가 나뉘어져있지 않은 원피스형 의상이 많이 유행했었다. 특히 극 중 주몽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기원전 중국 한나라의 경우 아직 이민족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 때라 더더욱 그러했으며, 실제 춘추전국시대나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목용들이 입은 의상을 보면 죄다 남녀노소 원피스형 치마에 가까운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 사극 대진제국 시리즈에서 당시 유행하던 복식인 곡거(曲裾)와 직거(直裾)가 잘 선보여진 편.[21] 고구려가 삼국 중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중국까지도 위협했던 역사가 있는 국가다보니 대중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고구려 역시 건국 초기에는 약소국이었으며, 부여, 선비 등 주변 강국에게 늘상 털리는 샌드백 신세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주변 소국을 제압하면서 강성해지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부여는 3세기 무렵부터 기울기 시작하더니, 결국 전연에 의해 몰락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잔존세력도 광개토대왕에게 털린 후 결국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된다.[22] 화약은 중국에서조차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인 것은 당나라 말기 무렵부터이며, 본격적으로 무기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북송시절부터이다. 당연히 이 시기의 화약은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도교의 연단술 재료로써 쓰이는 것이 옳다.[23] 이는 주몽이 당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창 시끄럽던 시절에 제작, 방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동북공정 문제가 한창 대두되면서 한중간의 큰 사회적 이슈가 있었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와 만주 벌판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열풍이 한창 불 때였다. 그러다보니 다소 고증에 어긋나더라도 현대 한국의 근간이 된 국가(고구려)가 현대 중국의 근간이 된 국가(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는 스토리를 통해 국민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논란이 되었던 후반부 고구려와 부여의 연합 스토리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부득불은 흑치 장군에게 주몽이 다물군을 포기하지 않으면 제거해야 한다고 얘기한 다. 다물군은 부여의 안정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에 흑치장군은 결단을 내린다. 흑치 장군은 금와의 호위무사에게 주몽과 그 일행의 동태를 잘 살피라 당부하고, 없애야 할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이른다. 주몽은 유화에게 금와가 다물군을 해체하고 부여로 돌아오라 했다 얘기를 한다. 유 화는 주몽에게 어떤 결단을 내리든 주몽의 편에 설 것이나, 다물군은 이미 주몽과 한 몸이라고한다. 한편, 소서노와 연타발은 부득불을 만나 부여와 계루의 관계를 다시 예전과 같이회 복하기를 요청하고 회신을 기다린다. 주몽은 다물군을 포기하지 않고 부여를 떠나기로 결단을 내리고, 유화는 예소야에 게 주몽을 따라 갈것을 권하나 예소야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유화 곁을 지킬거 라 한다. 그때 주몽이 군사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