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춤 나무위키 - wang-ui chum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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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춤

감독제라르 코르비오
각본디디에 드콩
이브 드 카스트로
앙드레 코르비오
제라르 코르비오
제작도미니크 얀
출연브누와 마지멜
촬영제라르 시몽
편집필립 라브와
루도 트로흐
음악장 바티스트 륄리
개봉일

  • 2000년 12월 6일

시간115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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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언어프랑스어

왕의 춤》은 2000년에 개봉한 브누와 마지멜이 주연을 맡은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이다.

출연진[편집]

  • 브누와 마지멜 - 루이 14세 역
  • 보리스 테랄 - 륄리 역
  • 체키 카료 - 몰리에르 역

KBS 성우진 (2002년 12월 8일)[편집]

  • 김민석 - 륄리 (보리스 테릴)
  • 오인성 - 루이 14세 (브누이 미지넬)
  • 장광 - 몰리에르 (체키 카료)
  • 박민아 - 어머니
  • 김병관 - 캄베르 (요한 리센)
  • 차명화 - 마들렌 (세실 브와)
  • 박상일 - 콩티 (이드비히 스테판)
  • 안종국 - 의원
  • 김정경 - 대신
  • 탁원제 - 캄퍼
  • 김익태 - 마자랭 (세르쥬 푈라르)
  • 서광재 - 노트르 (알랭 엘로이)
  • 김은아 - 줄리 (클레르 케임)
  • 오수경 - 루이 부인
  • 주유랑 - 아르망드 (캐롤린 베이트)

외부 링크[편집]

  • (영어) 왕의 춤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 왕의 춤 - 네이버 영화

전거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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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VIAF
    • 1
  • 월드캣 (VIAF를 통해)

국립도서관

  • 독일


'루이 14세와 예술가들'

- <왕의 춤(Le Loi Danse)>로 보는 권력과 예술의 상관관계 -

<왕의 춤> 포스터

프랑스 하면 절대 왕권!

절대 왕권하면 루이 14세 아니겠습니까?

루이 14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1명입니다.

루이 14세의 권력을 보여줄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자료 중 하나가 바로,

<왕의 춤(Le Loi Danse)>일 것입니다.

<왕의 춤>은 루이 14세와 두 예술가들을 통해 -

루이 14세 시대의 정치 권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신하들과 춤을 추는 어린 루이 14세

위 장면은 어린 루이 14세가 춤으로써 자신의 권력 의지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거대한 태양 왕관을 쓴 루이 14세가 무대 중앙에 고고하게 서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신하들도 보이시나요?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를 시작으로 프랑스 왕의 권력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와 귀족들의 힘은 강력했지요.

몇 백년 묵은 기득권 세력의 힘을 한번에 뿌리뽑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의 사망으로 겨우 5살 밖에 안된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5살된 아기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루이 14세를 대신해 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섭정에 나섰지요.

즉, 루이 14세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는 절대 왕정 상태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프롱드의 난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일어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영화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루이 14세가 예술에 심취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루이 14세에 예술은 하나의 도피처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도 루이 14세는 예술을 아주 사랑한 왕이었습니다.

특히 발레를 좋아해서 직접 발레를 추고, 프랑스 왕궁 음악의 틀을 닦았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매일 같이 발레 연습을 했고,

현재 발레의 기본이 되는 5가지 발동작이 루이 14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652년에서 1670년까지 총 37편의 발레 공연에서 주역이 되어 춤을 췄습니다.

루이 14세 덕에 프랑스 궁정 발레는 대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위 사진의 장면도 어린 루이 14세가 발레를 공연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어린 루이 14세의 불안정한 권력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공연에 '콩티'라는 인물이 참여하게 되는데요,

콩티는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안 도트리슈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에,

루이 14세는 억지로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귀족들의 반란으로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의 위풍당당한 공연을 보며 어머니 안 도트리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여전히 루이 14세가 그녀의 아들일 뿐 '왕'으로서 군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륄리'와 '몰리에르'는 이때 루이 14세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온전한 권력을 지지 못해 우울해 하는 어린 왕을 위로하고 기쁘게 했던 예술가들입니다.

륄리는 작곡가로, 몰리에르는 대본을 맡아 루이 14세의 발레 수준을 높여주었습니다.

귀족들 앞에서 압도적인 발레를 선보이는 성인 루이 14세

위 장면은 영화에서 나오는 루이 14세의 2번째 발레 공연입니다.

영화를 보시면 두 공연이 아주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번째 공연은 왕과 신화들이 조화를 이루어 공연을 했지만,

2번째 공연의 주인공은 오로지 루이 14세입니다.

그것은 어른이 된 루이 14세의 진한 화장과 춤동작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륄리의 충성스런 음악이 더해져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에 대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마치 나를 방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포스를 팍팍! 풍깁니다.

그는 장엄한 선율에 맞추어 절도 있는 춤사위를 보여주며,

힘찬 고함소리로 관람하는 귀족들을 제압합니다.

발레라는 예술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바로 루이 14세가 어머니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 재상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어머니와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이제 자신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발레는 1661년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된 후 가장 첫번째 수혜자가 됩니다.

그는 왕립무용학교(후에 음악을 추가하여 왕립음악무용학교)를 설립합니다.

국가가 무용을 인정하고, 직접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절대 권력 앞에서는 자유의 상징인 것 같은 예술조차 무릎 꿇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를 반증하듯, 루이 14세는 예술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과시하였습니다.

륄리와 몰리에르 역시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을 증오했기에,

그런 루이 14세의 편이 되어 예술을 무기로 기득권 세력들을 앞질러 나가기 시작합니다.

코미디 발레 무대에 선 륄리와 몰리에르

루이 14세는 젊을 때는 날씬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체중이 불어나게 됩니다.

나이든 루이 14세 초상화는 여전히 날씬한 몸매로 그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사기입니다: )

그러면서 더 이상 발레를 출 수 없게 되고요.

사랑하는 발레를 출 수 없게 되자 루이 14세의 관심은 다른 분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륄리와 몰리에르가 공동으로 만드는 '코미디 발레'라는 장르였습니다.

'코미디 발레'는 노래와 춤, 희극, 웅장함이 고도로 양식화된 일종의 혼합극입니다.

발레와 희극을 최대한 주제에 맞게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것이지요.

코미디 발레는 음악과 발레가 결합되어 궁정 축제적인 분위기를 내면서도,

희극의 비중이 훨씬 높아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은 장르였습니다.

특히 몰리에르는 연극적 희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대의 사회악들을 풍자했습니다.

몰리에르가 사회 부조리와 신분 질서에 본질적인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루이 14세 시대의 사회적 폐단들을 끄집어내어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묘사했지요.

독선적이고 타산적인 부르주아들,

부조리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위선적 종교인들과 귀족들이 주 등장인물이었습니다.

타락한 성직자를 풍자하는 연기를 한 몰리에르 

이런 특징 때문에 몰리에르표 코미디 발레는 루이 14세 친정 초기의 권력 성격과 부합하였습니다.

친정을 선포하긴 하였으나 아직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완벽하게 넣지 못한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의 코미디 발레를 통해 귀족들의 위상을 끌어내림으로써 그들을 복종시키려 했습니다.

때문에 몰리에르의 코미디 발레는 당연히 논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루이 14세는 적극적으로 몰리에르 극단을 옹호해주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루이 14세는 경박스러운 웃음을 지을 정도로 몰리에르의 코미디 발레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두 예술가, 륄리와 몰리에르의 위치가 상승한 것은 당연지사였겠지요.

코미디 발레를 보며 즐거워하는 루이 14세와 그의 가족들

그러나 륄리와 몰리에르의 앞길은 곧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두 예술가의 흥망성쇠 역시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완성과 함께 루이 14세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지기 시작합니다.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더 왕의 가까이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프랑스 궁정 문화는 유행이 되어 프랑스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요.

이 시기 국가 권력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최강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루이 14세는 더 장엄하고 절제된 -

고전주의적 음악과 춤, 공연을 원하게 됩니다.

자신과 프랑스 왕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루이 14세는 자신의 이상이 완성되어 갈 수록 고전주의적인 음악과 오페라를 선호했습니다.

그러니 몰리에르의 코미디 발레는 더이상 왕이 원하는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몰리에르의 비판 정신과 자유주의적인 예술관은 루이 14세의 절대주의적 정치 철학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권력이 안정된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귀족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지요.

한 때 왕을 즐겁게 하고, 날카로운 정치적 무기가 되었던 몰리에르는,

결국 1673년 왕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상상병 환자'를 공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주의 왕정을 구축해나가는 루이 14세, 그는 더이상 웃지 않는다

그에 반해 륄리는 오직 루이 14세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륄리는 이탈리아인이었음에도 프랑스적인 것을 굉장히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프랑스인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륄리는 1670년에 모든 연극과 오페라에 대한 독점권을 따내면서 다른 극단들이 설 자리를 없애버립니다.

이것은 친구였던 몰리에르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륄리는 실제로도 권력욕이 대단히 강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면은 영화에서 나오는 륄리의 대사 한 부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전 빛나는 음악으로 폐하의 영광을 드높여왔고 모두를 이기게 해드렸죠, 모두를요. 음악으로 된 비극을 쓰겠습니다. 프랑스의 오페라죠. 그 주체는 폐하여야 하며, 폐하께 영광을 가져다 준 발레와 접목된 곡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고결하고 숭고한 일을 그토록 천박한 이탈리아식으로 노래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함이 있어야죠. 베이스와 바리톤을 통해 남성적인 폐하의 위용을 살려야 돼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으시지만 무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그 무대에 폐하의 영광을 불어 넣으세요. 그 영광 속에서 폐하를 느끼고 폐하를 숭배하게 하세요. 모든 인간들이 폐하를 숭배하게.

독점권을 따낸 륄리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 음악계를 독점하였다고 합니다.

륄리는 이탈리아의 음악에 기초를 두면서도 -

프랑스의 고유한 음악적 전제와 프랑스어 특유의 조건에 적용시키는데 성공,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습니다.

륄리의 업적 덕분에 프랑스의 음악은 한층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와 륄리 음악의 고전주의적인 특징상,

예술의 다양성과 개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네요.

륄리의 뒤를 이은 륄리스트들은 향후 100년간 프랑스 음악을 좌지우지했다고 하니,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이 나실 겁니다.

저도 유럽여행 때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 앉아 륄리풍의 음악을 감상해본 적이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위용에 걸맞는 웅장한 음악들이었지요.

륄리의 음악은 힘과 빠른 박자 속의 생동감,

그리고 슬픔을 나타내는 악장에서는 깊은 감정을 호소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유스러운 이탈리아의 음악과 달리,

륄리에 의해 재탄생한 프랑스 음악은 의식적으로 고상하고 틀이 잡힌 언어를 사용하고,

형식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륄리 음악의 모든 특징들은 루이 14세와 프랑스를 찬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이자 좋지 못한 혈통으로 륄리는 누구보다 루이 14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륄리의 충성과 프랑스 음악에 대한 애착은 루이 14세로 하여금,

몰리에르보다 륄리를 지지하도록 만들었을 겁니다.

프랑스의 태양이 된 루이 14세,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영화 말미에서 륄리는 점점 추락하게 되지만,

그것은 루이 14세의 애정이 식었다기 보다는 -

루이 14세의 절대주의가 만성화에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봅니다.

륄리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루이 14세는 더 이상 웃지 않습니다.

아니, 위엄있어 보여야 하기에 웃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프랑스 왕의 사생활은 모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이 먹고, 마시고, 입고, 관심있어 하는 것들은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또 루이 14세 시대 후기로 갈 수록 전쟁이 계속되면서 부채가 잔뜩 쌓이게 되고,

귀족들은 루이 14세에게 충성하기 보다 루이 14세에게 복종함으로써 따라오는 막대하고 화려한 부를 더 사랑했습니다.

권력이 강력해질 수록 루이 14세는 어쩐지 외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지요.

웃지 못하게 된 고독한 왕, 루이 14세

이렇듯 루이 14세 시대의 예술은 권력과 부합하면서 흥망성쇠를 같이 하게 됩니다.

권력과 예술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의도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 참고 포스팅

<루이 14세,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의 결정체 - 베류사유 궁전의 상징 (1)> 보러가기

http://blog.naver.com/prpub/40146914702

<루이 14세,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의 결정체 - 베류사유 궁전의 상징 (2)> 보러가기

http://blog.naver.com/prpub/4014692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