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왕 키 디시 - mal-wang ki disi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개념글 리스트

  • 어질어질... 레전드 찍은 2일간의 콜옵션 시세 ㄷㄷㄷㄷㄷ ㅇㅇ
  • 터미날 옆에 살 경우 저능아 출산 위험 ㅎㄷㄷ ㅇㅇ
  • 케리아가 후원한 단체를 알아보자...jpg ㅇㅇ
  • [속보] 1년 만에 백신 피해 보상금 지급한다 환상의테란
  • 권성동 , " MBC PD수첩은 조작된 연출" lllllll

ㄱㅇㄱ)조선 선비, 청나라 바늘을 20만개씩 질러대다.  이전 연재글인 조선은 철사, 바늘을 못만들었다 vs 안만들었다.(링크) 에서 황교익이 주장한 바와 달리 철사의 제작기술이 기원전부터 유래한 매우 오래된 기술이며, 여말선초의 전환기에 이미 철사와 바늘의 제작이 이미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료에서 철사와 바늘의 생산이 중단되었음을 추정하는 각종 사료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증언이 남아있다는 것도 이야기드렸죠. 조선에서 더 이상 바늘이 생산되지 않았던 주요한 원인에는 조선-중국간 무역이 이 시기부터 두드러지게 확대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조선의 대중국 무역의 시작과 확대 과정 사실 중국제 바늘의 유입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429년(세종 11년) 명나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 사신은 소헌왕후에게 바늘 500개, 휘빈김씨에게 바늘 500개가 포함된 선물을 주고 세종은 베와 모시를 답례품으로 교환합니다. 1431년(세종 13년)에도 명나라 사신 창성(昌盛)이 매를 잡아준 신옥경에게 상을 주었는데 바늘 300개가 포함되어 있었죠. 명나라 사신들이 바늘을 선물로 주는 사례는 부피나 무게에 비해서 많은 수를 가져올 수 있어서 육로로 가져오는 선물 용으로 적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6세기 조선과 명나라간 사신을 통한 공무역과 이 과정에서 진행되는 밀무역의 확장으로 인해서 명나라의 상품들이 상당히 조선에 유입됩니다. 이 중에 군사물자인 물소뿔이나 사치품에 해당하는 산호, 패물, 종이, 빗, 사탕과 향료등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 상품들은 주로 사라능단(紗羅綾緞)으로 불리던 고급 비단과 생사(生絲)였습니다. ----통풍이 잘되도록 성기게 짠 가벼운 비단인 나(羅)--- 사라능단은 얇고 투명하게 짠 비단인 사(紗), 문양이 거칠고 성기면서 얇게 짠 비단인 나(羅), 섬세하게 직조된 직물인 능(綾), 두껍고 촘촘하게 짠 단(緞)과 같은 고급 비단들을 일컫습니다. 명나라 비단은 조선 내에서 사치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조정이 주목할 만큼 사회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지금도 고사(古事)에 의하여 무반도 또한 참여하게 하소서. 사라 능단(紗羅綾段)은 우리 나라의 물산이 아닌데, 재상들이 입기를 좋아하므로 통사(通事, 역관) 들이 많은 금은(金銀)을 가지고 가서 무역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으니, 청컨대 채단(彩段)의 착용을 금지하도록 하소서중종실록 3년 11월 6일(1508년) 다만 이 시기 명나라에서 바늘이 수입되었는지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조선 전기에 바늘이 수입되지 않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추정할 수 있는 첫번째 이유는 중국의 민영 수공업 발전이 아직 미진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수공업 발전의 전환기는 명나라 말기입니다. 의외로 눈부신 경제적 번영으로 유명한 송나라는 국가 통제하의 관영수공업 체계였고, 원나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나라 초기만 해도 국가통제하의 관영수공업 체계의 복구에 주력했던 상태니까요.  이러한 요인이 조선 전기 명나라 바늘의 가격경쟁력이 충분히 증가하지 못하게 만들어 유통비용의 장벽으로 조선 시장에 진입하는데 실패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고려할 것은 무역규모의 제한으로 사치품 위주의 거래가 진행될 가능성입니다.  조선 후기에 비해서 공무역에 국한하여 교역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바늘과 같은 생필품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사치품 위주로 교역이 이루어지다 보니 바늘을 수입할 메리트가 부족했을 수도 있지요.----조선후기 여지도의 의주북경사행로 지도, 중국학@센터 https://sinology.org/archives/9722 참조---- 15세기만 하더라도 조선-명나라간 사행로는 호송군(護送軍)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원나라 시기만 해도 육로무역을 통해 사무역이 이루어질 정도로 안전하던 요동은 청나라가 중국 본토 만이 아니라 만주와 몽골 지역까지 석권하기 전까지 교역로로 적합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교역량을 제한하고 사치품 위주의 거래가 이루어지게 만들었을 수 있겠죠?  세번째는 사실 밀무역으로 바늘이 수입되었으나 기록이 남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사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 공적인 문헌기록에서는 청나라에서 바늘수입하는데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특히 상대적으로 디테일하고 기술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이규경, 서유구, 이강회 같은 이들은 조선 기준으로는 매우 예외적인 인물들이죠.  위의 기록처럼 사치품인 사라능단이 조정의 이슈가 된 것은 사치품이기 때문입니다. 생필품으로 저렴한 바늘을 가지고 들어온다는건 조정의 주류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중요하지도 않고 문제될 여지도 없어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간에 중국산 바늘의 수입을 확인하려면 17세기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조선 전기 공무역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 조달을 목적으로 의주(義州)에서 중강 개시(中江開市)가 개설된 이후 보다 대대적으로 확장됩니다. 1615년에 요동이나 북경에서 철사를 구해왔다는 실록 기록은 이렇게 형성된 명나라와의 교역이 조선 조정이 계속 중강개시를 혁파하고자 시도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명나라와의 교역은 요동을 장악해 육로가 막힌 1625년(인조 3년)에도 아마도 모문룡을 통한 해상무역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명나라의 사신(詔使)이 방문했을때 명나라 사람들이 무역품을 가지고 와서 사무역을 실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사(詔使)가 객관에 머무를 때에 방민(坊民)들에게 닭을 거두어 수요에 보조하였습니다. 응당 바쳐야 할 것이 1만 3000여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 4000여 마리는 이미 바쳤으나 9000여 마리는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바친 사람들이 원망을 한다고 합니다. 듣자니 중국 사람들이 팔던 바늘, 빗, 감투 등의 물건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하니, 만약 이런 물건들로 계산하여 지급한다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 없을 듯합니다.승정원일기, 인조 3년 8월 10일(1625년)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무역이 활성화된 것은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고 화북을 장악한 이후인 1646년(인조 24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중강개시가 복구된 이후일 것입니다. 초기에 사무역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점점 해이해지게 되고 사실상 사무역이 활성화되는데 이를 중강후시(中江後市)라고 합니다. 후시(後市) 즉, 뒷거래를 한단 의미지요.----봉황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압록강으로부터 50km 정도 거리에 있다는 책문의 추정위치--- 1700년(숙종 26년) 사무역의 폐단을 막기 위해 중강개시는 폐쇄되지만, 1660년부터 이미 상인들이 사신행렬에 끼어들어 압록강 건너 만주의 구련성(九连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의 일명 책문(柵門)에서 진행되는 밀무역인 책문후시(柵門後市)가 성황을 이루다가 100여년 후인 1754년(영조 30년)에는 아예 공인되기에 이르죠. 즉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조선-청나라간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국내생산 바늘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은 조선-북경간 육로와 사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사신단 및 의주 만상(灣商)의 독점으로 인한 유통비용만이 남아있게 됩니다.    이 시기는 조선왕실의궤에서 침장(針匠)이 등장하지 않기 시작하는 시점과 교묘하게 겹쳐지고 있지요. 만약 중국제 바늘의 증가하는 대청무역의 과정에서 조선의 국산 바늘의 입지를 위협했다면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요? 조선 장인(匠人)의 솜씨가 실학자들의 말마따나 구차스럽기 그지 없어서????  여기에는 이규경 외에 실학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 바늘이 아주 싸다는거죠. 문제는 솜씨가 아니거든요.조선 사신단, 계주(薊州) 방균점(邦均店)의 단골이 되다. 조선 사신들은 거진 200년간 청나라에 파견될 때마다 바늘을 꾸준히 구매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명나라 시기부터일런지도 모릅니다. 다만 최초 기록이 청나라 초기에 나타납니다. 백가점(白家店)을 지나 방균점(邦均店)에서 아침을 먹었다. 성은 고려포와 같지만 시장과 여염의 번성함, 누로(樓櫓)의 웅장함이 현ㆍ읍(縣邑)보다 못하지 않았다. 거주하는 백성 모두 바늘〔針〕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데 바늘의 정교하고 예리함은 중국 최고다. 귀암집 12권, 귀암이원정연행록(歸巖李元禎燕行錄) 1670년(현종11, 경술) 8월 7일  이원정(李元禎, 1622~1680)은 인조~숙종대의 문신으로 1670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간 바 있습니다. 그는 계주에서 출발해 방균점(邦均店)에 들르면서, 이 곳의 바늘이 중국 최고란 기록을 남깁니다. 바늘을 샀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방균점의 바늘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보입니다.(제가 찾은 기준으로는...) 물론 바늘을 샀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평가했으면서 바늘을 안사갔을 가능성은 별로 없겠죠?----계주 남서쪽에 위치한 방균점의 추정 위치, 북경가는 길에 있다.---- 방균점(邦均店)은 계주(薊州)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방쥔진(邦均镇)으로 추정됩니다. 점(店)이란 상인이 모이는 곳을 지칭하는 오래된 지명이고, 청나라의 공식적인 지명은 방균진(邦均鎮)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북경으로 가는 사신단의 이동경로상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미 명나라 시기에도 바늘 이야기는 없지만 1581년(선조 14년) 북경에 사신단으로 간 최립(崔岦)에 의해 방균점(邦均店)에 투숙했다는 기록이 그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 남아있습니다. 즉 바늘에 대한 기록은 없어도 사신단이 그 이전부터 이곳에서 바늘을 구매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는거죠. 이후 꾸준히 200년간 조선 사신단은 방균점에서 바늘 쇼핑을 한 기록을 꾸준히 남기게 됩니다. 이 방균점에 옛 성터가 있고 성안에 거리와 문루(門樓)가 있었다. 또 바늘 가게가 있어, 일행이 모두 여기서 바늘을 샀다. 옛적에 이채(李彩)의 바늘이 원근에 유명했으나 지금은 벌써 죽었고, 이 방균점 묘가(妙哥)의 바늘이 유명하다 한다. 연행록(燕行錄), 1712년(숙종 38년) 방균점(邦均店) 50리를 가 성 바깥 유씨(劉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잤다. 이 점(店)은 강철 바늘을 전업으로 만드는데 일행 중에는 값을 많이 주고 샀다. 이날에는 100리를 갔다.연행기사(燕行記事), 1777년(정조 1년) 12월 또 50리를 가서 저물어서야 방균점에 도착했다...(생략) 이곳은 바늘이 좋기로 본디 이름 있는 곳이다. 강침(鋼針)의 기호(記號)가 많이 씌어 있었다.연원직지(燕轅直指) 출강록(出疆錄) 1832년( 순조 32) 12월 17일 조선 사신들이 방균점에서 바늘을 꾸준히 구매했다면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합니다. 대체 어떤 메리트가 있기에 바늘을 구매했을까요? 품질? 물론 품질이 우수한 것도 중요하겠습니다만, 바늘은 사치품이라기보다는 생필품에 가깝습니다.  일정한 품질을 달성한다면 바늘을 구매할 가장 큰 메리트는 역시 가격이었을 겁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시장에서 1문(文)의 동전이면 청나라에서 수입한 3~4개의 바늘을 살 수 있으며 비싸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 노년기인 1850~1855년 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청나라에서 바늘을 구매할 때의 가격은 얼마였을까요? 평명에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방균점(邦均店)에서 조반을 먹었다. 이 점은 바로 침점(針店)이다. 이채(李彩)가 죽은 뒤에 묘가(苗哥)란 자가 그 업(業)을 전수했으나, 딴 사람도 묘가의 상표를 도인(圖印)해서 ‘묘침(苗針)’이라 통칭하였다. 일행 중에서 많이 산 자는 혹 한 바리나 되기도 했는데, 만 개 값이 은 2냥 8전(萬介之價。二兩八錢銀)이었다. 연행록(燕行錄) 일기(日記) 계사년(1713, 숙종 39) 2월 17일 1712년 최덕중(崔德中)이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부사(副使) 윤지인(尹趾仁)의 군관으로 정사(正使) 김창집(金昌集), 서장관(書狀官) 노세하(盧世夏)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일기에 바늘을 구매한 사례가 나옵니다. 여기서 한 바리(駄)란 말이나 소에 싣는 짐의 단위를 말합니다. 실록 기준으로 200근이니 120kg 정도가 최대 무게라고 할 수 있죠. ----중국 관광객 유커(游客)들의 쇼핑은 유명하죠. 과거 한국 관광객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겠지만요. 그래도 120kg은 안되어 보입니다.--- 바늘만 120kg을 사다니 무슨 중국 관광객도 아니고..----청나라 50냥짜리 마제은--- 1만개의 바늘을 사는데 2냥 8전의 청나라 은화가 든다고 설명합니다. 1냥(兩)은 10전(錢), 10전은 100문(文)에 해당하므로 280문인 셈이죠. 1문의 은화로 35.7개의 바늘을 구매할 수 있는 셈입니다.  상평통포의 환율은 1678년 기준으로 공정환율이 은화 1전(錢)당 상평통포 4전(錢)으로 책정되었으나, 1710년대에는 동일할 때도 있었고 18세기 중엽에는 은화 1냥당 동전 2~3냥 수준이었고, 1850년대에는 1:5를 상회했다고 합니다.----조선시대 상평통보---- 1850년대 기준으로 하면 조선의 상평통보 1닢(文)에 해당하는 은으로 사신단이 사올 수 있는 바늘의 수는 7개 정도 되는 셈입니다. 1710년대에는 36개나 되죠. 이걸 조선의 시장에서 1문당 3~4개씩 판다면 1710년대 기준으로는 9배 이상 비싸게 팔 수 있는 셈입니다. 상평통보 가치가 낮은 1850년대 기준으로도 2배 정도 비싸게 팔 수 있습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의 장터길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참조, 아마도 말에 짐을 싣고 장터에 물건을 판 다음 되돌아가는 행상 무리를 묘사한 것 같다.---- 조선 후기에도 마차보다는 짐말을 주로 사용한 우리 조상들은 짐말에도 일종의 안장을 설치하고 그 위에 짐을 양쪽으로 나누어 실었던 것 같습니다. 구한말 조랑말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사신단도 이런 짐말에 바리(駄) 단위로 짐을 실었겠죠? 실록의 1792년(정조 16년) 기록에 따르면 중국 사신단에 투입되는 말 1필에 실을 수 있는 무게는 200근을 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이는 약 120kg 정도입니다. 바늘 1개의 무게는 대략 0.6그램 정도인데, 말 1필에 실을 수 있는 짐(馬駄)에 따르면 20만개의 바늘을 1필의 말에 실어올 수 있습니다. 많이 사는 사람은 무게만 따지면 최대 20만개의 바늘을 실어올 수 있는 셈이죠. 바늘의 포장 상태에 따라 그 양은 훨씬 줄어들겠지만요.  즉 바늘을 많이 산다고 할 때 사신단은 혼자서 1마리 짐말에다가 최대 20만개의 바늘을 실어올 수 있으며 약 60냥의 은화를 자본으로 투자해서 60~480냥의 은화를 이문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바늘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육로인데다 짐말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바늘을 가져오는게 가능하며, 이익률도 무척 높은 편이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에서 사신단이 가져오는 바늘로 조선 바늘을 대체할 만큼 공급하는건 가능할까요? 18세기 후반 조선 인_구 추정치는 대략 1,500만 전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박지원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기준으로 평균적인 농부 가호인 1호가 5명이라고 가정할 경우 하면 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호구까지 300만 가구가 존재한다고 추정해보겠습니다.----일제시대 바느질 사진 엽서, 부산시립광역박물관 소장--- 300만 가구에서 1년에 최소 1개의 바늘이 부러져 새로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1년에 조선에서 필요한 바늘의 수는 300만개에 달합니다. 조침문(弔針文)에서는 27년동안 사용한 청나라 바늘에 대해서 나오긴 하지만, 조침문의 저자 유씨 부인도, 무수하게 많은 바늘을 부러뜨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봐서는 1년에 1개도 적게 잡은 걸 수 있습니다.  조선이 필요한 바늘을 짐말을 사용해 육로교역으로 가져온다고 가정하면, 15마리의 짐말에 각각 120kg에 달하는 바늘을 실어오면 조선이 필요로 하는 바늘을 모두 공급할 수 있습니다.  1637년(인조 15)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조선에서 청에 간 연행사는 총 507회로 연평균 2회 정도의 사신이 파견되며, 사신단의 규모는 30인이지만 수행원까지 합치면 200~300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1년에 15마리의 짐말에 바늘을 실어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이죠. 게다가 이것은 사신단을 통한 사무역에 한정된 것이고, 비공식적인 책문후시(柵門後市)를 고려하면 청나라에서 조선에 소요되는 바늘을 수입해오는 것은 바늘의 무게 및 부피대비 가치를 생각할 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운송비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청나라의 바늘이 품질 및 가격경쟁력에서 우수하다면 조선 바늘을 조선 내수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은 조선-청나라간 무역의 활성화로 인해서 손쉽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근데 이 바늘가격이란게 조선 기준으로는 싼게 확실한데, 청나라 기준으로는 조선 사신단이 100년이 넘게 사기를 당해 비싸게 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항가 상인[項商]은 방균(邦均) 사람이다. 우리 사신 일행이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을 때, 항가 상인은 그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여러 통역들을 환영하였는데 말하고 웃고 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였다....... 중국은 태평 시절이 오래 계속된 까닭으로, 인물(人物)이 번성하여서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더구나 정가 상인이 패망한 뒤로는, 우리 나라를 대상으로 하여 장사하는 이가 50여 인이 되고 보니, 상업 판매의 흥망은 또한 상업을 통역하는 이들을 누가 잡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먼 길도 꺼리지 않고 술과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가지고 와서 그들의 환심을 샀으며 남보다 뒤질세라 분주히 간청하였다. 그래서 심양(瀋陽)으로부터 서쪽으로 오면서, 그들의 설쳐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가 상인은 비교적 부요(富饒)한 편이었다. 사신 일행이 방균에 도착하자 항가 상인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서 통역들을 초대하였는데, 초대에 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담헌서(湛軒書) 연기(燕記) 포상(鋪商), 홍대용  홍대용(洪大容)은 1765년 청나라 동지사의 서장관이자 작은아버지인 홍억(洪檍)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연기(燕記)라는 기록물을 남깁니다. 여기에 조선 사신단이 방균점에 항상 머물러 물건을 구매했던 이유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방균점에 꾸준히 조선 사신들이 머물렀던 것은 이들을 안내하는 조선의 역관(譯官)들과 방균점의 현지 상인인 항씨(項氏)가 긴밀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방균점에서의 조선 사신단의 바늘 구매가 방균점의 바늘이 특별히 우수하고 더 저렴했기 때문인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아침에 출발하여 40리 방균점(邦均店)에 이르렀다. 한낮에 항씨(項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고 또 전진하였다.연행기사(燕行記事), 1778년(정조 2년) 2월 이러한 방균점의 항씨 상인가문과의 커넥션은 꽤나 오랜 기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방균점의 바늘이 사실 훨씬 더 저렴했던게 아니라는 것을 추정하는 자료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죠. 방균점(邦勻店)은 모두 강침(鋼針)으로 업을 삼는데 값은 비싸지만 품질이 연경보다 좋아서 연경 사람도 여기에서 사 간다. 그래서 우리는 매매 가격을 정하여 미리 가은(價銀)을 주고 돌아오는 길에 추심한다.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 1777년에 동지사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온 이갑(李?)의 연행기사(燕行記事)에서는 방균점의 바늘 가격이 북경보다 더 비싸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갑은 품질이 북경의 것보다 좋아서 여기서 사간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이 거래를 주선하고 통역하는 이들이 역관들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https://youtu.be/JKIbPVzfbKk---임상옥에게 담합을 걸었다가 발리는 사악한 청나라 상인--- 실제 청나라와의 사행무역 과정을 보면 청나라 상인들이 담합을 했다면 조선 역관이나 상인들이 강짜를 부려서였을 가능성이 꽤나 높아보입니다. 현지 청나라 상인과 조선 사신단의 역관들과의 거래관계는 꽤나 오랜 기간, 독점적으로 유지되었고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바가 컸습니다. 특히 비단거래를 주도하던 청나라의 정씨(鄭氏) 상인 집안은 과도하게 조선과의 거래에 의존하다가 사치품 규제로 수요가 감소해 결국 파산하는 상황에 빠지기까지 했고, 역관 서종맹이 조선 사신단을 설득해 빚 일부를 탕감시켜 주는 사례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사행인원을 선발하고 통제하며,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역관(譯官)들이 현지 상인과 결탁해서 사신단의 사무역 과정에서 방균점에서 바늘을 사도록 유도하는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현대 패키지여행의 가이드들의 쇼핑 강매와 역관들은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까?----- 역관(譯官)들은 조정에서 공식적인 보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사행무역을 통해 수익을 얻고, 사행과정의 경비도 일부 담당해야 하므로 현대의 여행가이드들이 패키지 여행에서 하듯이 현지 상인과 결탁해서 사신단의 쇼핑을 유도하고, 대신 방균점의 항씨 상인과 같은 이들에게 대접을 받고, 사신단의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고 이익을 분배하는 상호호혜적 관계가 유지되었을 것이라 의심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물론 이정도 근거만으로 제가 이야기한다면, 당시 조선시대 사람이 병신도 아니고 그걸 속겠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7~18세기에 비해 해외 상황에 대한 정보도 풍부하고, 언어와 지식수준도 우수한 현대인도 무수하게 여행 쇼핑사기에 휘말리는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방균점의 바늘이 당시 사신들이 남긴 기록처럼 중국에서 최고로 우수했기 때문이라 사신단이 꾸준히 산게 아니라고 의심하는건 단지 이런 이유만이 아닙니다. 계주 방균점에서 생산하는 바늘이 중국 제일이라거나, 바늘 제작이 유명하다는 조선 사신단의 기록은 중국쪽에서는 상대적으로 찾기 어렵고, 중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조선시대의 연행기록 문헌자료를 통해 방균점이 이렇다더라.. 하고 인용하기 때문입니다.---홍위병의 문화대혁명 당시 산동성 곡부의 공자묘 비석 파괴---- 물론 청나라 시기 방균점에서 바늘 생산이 전국을 떨어 울렸는데, 군벌내전과 2차대전의 혼란기, 그리고 홍위병들의 문화재 파괴등을 거치면서 그 전통과 기록을 모두 잃어버린 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북경에서 나름 잘나가던 중국산 명품 바늘이 존재하고, 그 명성과 기록이 잘 유지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방균점이 아니라면?  한번 의심해 볼 만한 것 아닐까요?산서성(山西城) 대양(大陽), 명청시대 중국의 대표적 바늘생산지  왕여풍(王汝豐)의 북경회관비각문록(北京會館碑刻文錄)은 북경에 존재했던 다양한 회관(會館), 즉 명대 이후 동향 출신이나 동업자들의 상호부조, 제사등을 위해 설립한 기관들의 비석 비문들을 모아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 남겨진 비문 중 1779년(건륭 44년) 설치된 속수침조유선옹묘비기(續修針祖劉仙翁廟碑記)는 북경에 바늘의 시조(針祖) 유선옹(劉仙翁)을 제사지내는 침조묘를 수리한 기록입니다.-----북경의 침조묘 비석 탁본, 중국국가도서관 자료 참조---- 비문을 작성한 유백령(劉柏齡)은 산서성 택주(澤州) 출신의 관료였으며, 또다른 작성자 장무구(張無咎)는 택주(澤州) 대양(大陽) 출신의 무과급제자이자 청나라 무관이었던 장대경(張大經)의 아들로서 이 건축행사의 주최자이거나 비문을 새긴 사람으로 추정되며, 1779년 택주(澤州) 대양(大陽)의 자성사(資聖寺)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 장대경은 청나라 무과에 합격한 후 무관으로 복무해 전공을 세우고 1773년 전사했습니다. 장대경은 1757년 대양진의 침옹묘(針翁廟) 보수기록인 "補修妝飾針翁廟碑記"에서 기증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장대경과 그 아들 장무구로 이어지는 이 가문이 고향의 바늘 생산 및 유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두꺼비를 탄 신선 유해섬, 재물신으로 인기가 좋은듯...--- 북경에 세워진 이 침조묘는 산서성 대양진을 동향으로 하는 이들이 오호십육국 시대 실존했던 도사, 또는 전설적인 신선으로 알려진 유해(劉海) 또는 유해섬(劉海蟾)을 바늘의 시조로 섬기는 사당입니다. 산서성 출신 사람들이 고향에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바늘의 시조 사당을 북경에 세웠다는 이야기죠. 이 사당의 설립시기는 명확하게 알수 없지만, 1712년(강희 51년) 9월에 중건한 기록이 또다른 비석인 "중수침조유선옹묘기(重修針祖劉仙翁廟記)"에 남아있어 적어도 18세기 초에는 사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문기록을 통해 산서성 대양 사람들이 북경에 진출해, 적어도 1개 이상의 바늘판매 상행(針行)을 세웠으며, 고향에 세운 침옹묘(針翁廟)처럼 침조묘(針祖廟)를 건축할 정도로 나름의 부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상점을 만들어 상행위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동향인들이 북경에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의미죠. 작디작은 강철바늘을 잘 만들어서, 천하 4대경에 판다네.  동경(東京)에서 팔아 변량(汴梁, 카이펑)에 이르고, 서경(西京)에서 팔아서 장안성(長安城)에 이르며, 남경(南京)에서 팔아 응천부(應天府, 남경)에 두루 퍼지고, 북경(北京)에서 팔아 순천성(順天城, 북경)에 두루 퍼진다네.산서성 대양진의 민요, 강침가(鋼針歌) 산서성 대양에서는 명나라때부터 시작해서 청나라 시기에 바늘을 대량생산해서, 중국 곳곳에 대량으로 바늘을 유통시키고 있었습니다. 대양진의 민요는 이를 자랑하는 내용을 가사에 담고 있죠. ----19세기말 중국을 여행한 독일인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 남작---- 19세기 중국을 방문해서 여행한 독일인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Ferdinand von Richthofen) 남작(참고로 1차대전 독일 에이스 파일럿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일명 붉은 남작의 삼촌입니다.)은 1869~1870년에 산서성에 여행하면서 대양진의 바늘 생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대양(大陽)의 시가지에서 철사 제작과 바늘생산이 이루어지며 한때 여기서 중국 거의 전체에 바늘을 공급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신단이 방균점의 바늘이 좋다고 열심히 사서 가져가던 18세기는 산서성 대양의 바늘이 중국에서 인기리에 사방으로 유통되던 시대였습니다. 산서성은 오랜 석탄 및 철광석을 채굴하는 광업과 이를 사용한 제철산업이 발달해 있었고 대량으로 선철을 생산했습니다. 대양(大陽)은 그 중심지에서 바늘생산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북경에도 진출해 있었습니다. 리히토펜 남작은 북경에서 온 대양 바늘을 취급하는 상인과의 대화 역시 기록으로 남기고 있죠. 중국 제일의 바늘생산지는 방균점이 아니라 산서성 대양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꽤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산서성 대양 사람들은 북경에 진출해 바늘을 거래하고 있었고, 동향조직을 구축하고 북경에 사당도 건설하고 꾸준히 중건하거나 보수할 정도로 잘 나갔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말이죠.(그 이후는???)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조선 사신단이 북경까지 먼 거리를 지나 거래한 바늘이 원래 중국의 바늘보다 더 비싸고 덜 유명한 상품을 바가지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계주 방균점이 엄청나게 유명하진 않더라도 나름 해당 지역에서 바늘생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산서성 대양의 바늘과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던 걸지도 모르죠.----메이드 인 차이나 하면 좀 과장된 느낌이지만 한국에서는 의자폭발이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시대엔 과거의 미제, 일제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방균진에서 사온 바늘은 사신단이 굳이 바늘을 짐말에 바리바리 실어올 정도로 조선 바늘과 비교할 때 저렴하고, 품질도 나쁘지 않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이것이 중국 주류 바늘인 산서성 대양 보다도 비싸고 덜 유명했던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청나라 바늘은 산넘고 물건너 6,500리(2600km)에 가까운 육로를 마차도 아니고 짐말에 실어서 가지고 와도 조선 바늘보다 더 쌀 정도로 가격차이가 날 수 있었을까요? 작성자 : lemiel고정닉

갤러리 본문 영역

말왕 실제 키 몇같냐?앱에서 작성

친구생기면디씨탈퇴함

말왕 키 디시 - mal-wang ki disi
2020.06.09 18:05:02

조회 1608 추천 0 댓글 9

추천 비추천

0

말왕 키 디시 - mal-wang ki disi
0

댓글 영역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