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소련 이 - man-yag solyeon i

소련, 북한, 그리고 일본

3. 소련, 북한, 그리고 일본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창립 때부터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을통해 중국내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또한 1927년 이후 국민당의 본격적인 공격으로 중국공산당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어느 정도의 물자를 원조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직후 소련은 중국공산당이만주로 진공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도와주게 된다. 만약 만주의 일본 관동군이 가지고 있던 공장이나 전쟁물자들을 국민당이 접수했더라면 내전의 승리는 국민당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그것들을 먼저 입수하여 공산당에게 넘겨줌으로써 국민당은 국내의 거의 모든 군사력과 경제력을 내전에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만약 소련이 만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면 만주의 풍부한 자원이 국민당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국민당 북부 지배지역의 고질적인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는 자원들은 외국으로 수출하여 외환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고 1947년과 48년에 겪게 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처음부터 공산당에게 무조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하루 전에 국민당 정부와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견제할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과 일본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당의 협력을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일본의 패전 직후 소련은 국민당과의 협력 노선을 밝히고, 경제합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46년 2월 이후 장제스가 소련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다시 공산당과의 관계로 기울게 되었다.
그밖에 소련은 무역을 통해서도 공산당을 도왔는데, 무역에서 소련은 해방구에 대하여 의료, 자동차, 석유제품, 약품과 민간에서 필요로 하는 상품을 제공하고 콩, 옥수수등과 같은 농산품을 받았다. 또한 동북지역의 철도복구를 지원하여 교통이 회복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 소련은 120개에 달하는 교량을 복구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 외에도 외교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하고, 미국을 견제하였다.
국공내전 당시 북한도 중국공산당을 적극 지원하였다. 국공내전 시기 만주지방에 있던 조선족 대부분은 공산당을 지지하였고, 약 6만2천여 명이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으로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이들의 지원은 중국의 승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북한은 중국공산당과 그 부대가 국민당 군대에 밀려 남만주에서 철수해 다시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북부지방을 후방기지로 내주고 전략적 교통로도 제공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북한 지역의 후방기지를 활용해 부상병의 철수·안치, 병력 및 전략물자의 수송, 화교공작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1949년의 경우 수송물자만 30만9백 톤에 달했다.
한편 북한 측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격문을 만들어 뿌린 적도 있고, 북한 내 병력과 물자를 직접 제공했다고 한다. 1945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북한을 방문한 천윈[陳雲]의 요청에 따라10만정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으며, 중국에 광목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북한 전역에서 면직물을 징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북한과 중국공산당의 동맹, 혈맹 관계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949년 7월 북한에 들어온 조선족 출신 중국인민해방군 2개 사단 등3개 사단 5만여 명이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국공내전 시기 일본인들은 본의 아니게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양측에 이용되거나 소극적으로 참전하였다. 만주에 억류 중이던 1만여 명의 일본군은 8로군에 편입되어 공산군에 훈련과 전쟁기술을 전수하였다. 8로군은 일본 동아시아에서 분단과 전쟁 323군 군인을 교관으로 한 동북민주연군항공학교를 설립하여 항공전력을 보유하였다. 일본인 의사와 간호사 등은 중국공산당의 강요로 동북군의 병원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장제스의 의뢰를 받은 전(前) 지나(支那)파견군총사령관 오카무라야스지[岡村寧次]는 몰래 토미타 나오스케[富田直亮] 전 육군소장이 인솔하는 구 일본군장교단을 타이완으로 밀항시켜, 장제스의 군사고문으로서 지원하였다. 이들은 국민당군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함정, 항공기의 운용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다. 나중에 8·23진먼[金門]전투의 포격전방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들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처럼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양측에 의해 이용, 억류 또는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던 일본인들은 1950년대 이후에도 약 3만여 명이 있었는데, 중국과 일본 정부는 양국 적십자사를 내세워 1952년 북경에서 협정을 맺은 이후 이들을 순차적으로 귀국·송환 시켰다. 이때 중국에서 귀국한 일본인들은 전후 중일 간의 인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는 물론이고 1972년 중일 수교 과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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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소련 이 - man-yag solyeon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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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소련은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9일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참전 대가를 확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신속하게 움직인 것이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에 가까이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에 미군은 멀리 오키나와에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미군과 소련군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점령지역의 관할 경계선으로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다. 북위 38도선은 애초에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역 경계선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1943년 11월 20일 카이로에서 열린 3국 정상회담(루스벨트, 처칠, 장제스)에서 한국을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독립시키기로 합의하였는데, 이것은 일정한 기간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를 거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어서 11월 28일 테헤란에서 개최된 3국 정상회담(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40년 동안의 수습기간이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정상들은 한국을 일정한 기간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3국 정상회담(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에서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과 일본군 점령지역의 처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미군 단독으로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군 35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군이 만주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스탈린은 참전의 대가로 일본이 소유한 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 다렌(大連), 뤼순(旅順),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만주철도에 대한 통제권, 외몽골의 현상유지를 요구하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루스벨트는 중국과의 합의를 전제로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 밀약은 만주지역에 대한 소련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인정한 것으로 한반도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해 루스벨트는 미국, 중국,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였다. 다만 영국이 항의하면 영국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신탁통치기간은 루스벨트가 20년 내지 30년으로 제시하였고, 스탈린은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다고 논평했다. 스탈린은 한국이 미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미군이 한국에 계속해서 주둔할 것인지 물었고, 루스벨트는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지 않겠다고 답변하여 스탈린을 안심시켰다. 일본 본토는 미국 세력권으로, 만주지역은 소련 세력권으로 하면서, 그 중간에 있는 한반도에 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고, 7월 들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이 가시화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미국의 대소전략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루스벨트는 스탈린과의 협력을 전제로 전후 세계질서를 만들어갈 생각이었으나 트루먼은 기본적으로 소련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자폭탄 개발의 성공은 소련의 협조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린 7월의 포츠담회담은 얄타회담과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포츠담회담 기간 중에 열린 3국 군사회담에서 소련측은 쿠릴열도 공격을 위한 작전협력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를 공격하게 될 소련군에 호응하여 미군이 한반도 해안에 대한 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지 질의하였다.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에 대한 미국측의 반응을 떠본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현재로서는 공동작전이 있을 수 없다.”라고 애매하게 답변하였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를 두 세력권의 완충지대로 생각하면서 그 처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동유럽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의 점령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감하였다. 소련은 점령지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결코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의 조기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원폭 투하는 오히려 소련의 참전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참전 대가를 요구할 수 없게 될 상황을 우려한 스탈린이 신속하게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에 나선 것이다.

스탈린의 대일전쟁 준비는 1945년 3월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군 병력, 장비, 물자의 이동은 4월부터 8월까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소련군이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신속하게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5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던 것이다. 8월초까지 준비를 마친 소련군은 8월 9일 세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2일에는 한반도에 진입해서 웅기를 점령했고, 14일에는 나진을 함락시켰으며, 16일에는 청진을 점령했다. 소련군의 랴오뚱반도와 한반도 침공을 우려한 트루먼은 8월 11일 “만약 소련이 다렌(大連)항이나 한반도의 일개 항구를 아직 점령하지 않았다면 일본 항복 즉시 이 지역을 조속히 점령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양보하기로 한 다렌항까지 점령하라고 한 것은 트루먼이 소련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960 킬로미터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소련군은 바로 한반도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미군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작전에 대해 미국과 소련 간에 애매한 형태로나마 합의가 있었다. 즉 일본 본토는 미군이 점령하고 만주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중간지대인 한반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의 진격으로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점령지역의 관할에 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3부조정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수도인 서울을 확보할 수 있는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소련에 제안하기로 하였다.

8월 15일 트루먼은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점령하기로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일반명령제1호를 스탈린에게 통보하였다. 다음날인 16일 스탈린은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북위 38도선 기준의 분할점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쿠릴열도와 홋카이도 북부를 소련의 점령지역으로 포함시켜달라고 수정 제의하였는데, 홋카이도 북부를 소련의 지배하에 두게 되면 소야해협과 오오츠크해를 소련의 해협, 소련의 내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일 트루먼은 쿠릴열도에 대한 요구는 받아들이지만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요구는 거부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여기서 만약 트루먼이 스탈린의 요구를 전부 거부했더라면 스탈린은 일반명령제1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소련군이 한반도의 전역을 점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한반도 전체가 적화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9월 2일 맥아더가 일반명령제1호를 포고함으로써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점령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할점령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38도선을 넘어 진출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38도선을 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왔던 일부 부대도 합의에 따라 38도선 이북으로 후퇴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한반도에 먼저 진입한 유리한 상황에서 왜 트루먼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첫째 스탈린의 1차적 관심은 만주와 쿠릴열도에 있었다.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로부터 약속받은 쿠릴열도와 사할린 남부, 다렌(大連), 뤼순(旅順),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만주철도에 대한 통제권, 외몽골의 현상유지를 트루먼으로부터 다시 확인받을 필요가 있었다. 둘째 스탈린은 일본 본토의 점령 및 통치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두 가지 모두 미국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덜 중요한 한반도 점령을 두고 미국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킨다는 합의가 있었으므로 북위 38도선이 분단선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긴박해진 상황에서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점령지역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설정된 점령지역의 군사관할 경계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단순한 경계선에 불과했던 38도선은 그 후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처음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반영구적인 분단선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갔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9월 12일부터 런던에서 개최된 전승국들(미국, 영국, 중국, 소련, 프랑스)의 외상회의였다.

런던 외상회의는 전후 체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 중요한 회담이었다. 여기서 미국과 소련이 충돌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동유럽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든 것에 대해 얄타회담 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소련은 미국이 이탈리아와 일본을 독점하려고 한다고 항의하였다. 소련측이 일본 점령 및 통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겠다고 하였으나 미국측이 이를 거부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스탈린은 미국과의 협조관계에서 벗어나 경쟁관계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해지자 스탈린의 관심은 분할점령하고 있던 한반도로 옮겨갔다. 스탈린은 일본이나 일본과 연합한 세력이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를 발판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반도에 수립될 통일정부가 소련과 우호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 외상회담을 지켜보면서 스탈린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도가 외부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비밀지령문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보낸 것인데, 그 요지는 ‘북한의 민정 지휘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가 담당하고,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을 토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나 미국과의 협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주도로 민정을 실시하고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정권, 즉 단독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북한의 행정책임자들로 구성된 내각의 성격과 각 정당 대표가 참가하는 통일전선조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바로 스탈린이 지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정권, 즉 단독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김일성은 3월말까지 토지개혁을 완료하고, 8월까지 전 산업의 90% 이상을 국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근본적인 체제개혁을 완수한 것은 소련식 소비에트체제를 중심으로 한 통일이 아니면 분단을 택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통일정권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유엔에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이 이를 거부하였다. 할 수 없이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이 완성되었다. 이어서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양쪽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면서 점령지역의 경계선이었던 38도선은 서로 왕래할 수 없는 분단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1953년 7월에 끝난 후 휴전선으로 명칭만 바뀐 채 지금까지 한민족을 가르는 분단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