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관한 좋은글 - san-e gwanhan joh-eungeul

<산행하는 이들을 위한 시 모음>    윤수천 시인의 '산이 있는 풍경' 외

+ 산이 있는 풍경

산을 내려갈 때에는
언제나 허리를 낮추어야 한다
뻣뻣하게 세우고 내려갈 수는 없다
고개도 숙여야 한다
고개를 세운 채 내려갈 수는 없다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면
아,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이것이다
산이 보여주려는 것
하늘은 무척 높다는 것
푸르다는 것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것
이것을 보여주려고
산은 날마다 손을 내밀어
오라 오라 했나보다
(윤수천·시인)

+ 산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 색 구절초 꽃 곁을 지날 때
구절초 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 지는 꽃이야
너도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뿌리를 내려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밑을 지날 때
구름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었네
산은,
지금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네
(김용택·시인)

+ 산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희덕·시인)

+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법이다
때로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깊은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골짜기나 다 낯설다
그렇지만 우연히 선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가는 곳이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아득히 멀고 큰 산을 오르기 전에는
낮은 산들을 오르고 내림은 당연하다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오른 뒤에는
또다시 내려가는 길밖에 없는 까닭이다
(양성우·시인)

+ 무제(無題)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박재삼·시인)

+ 겨울산

절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을 정수리에 이고 가부좌 틀면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영하의 묵언수행!

폭포는 성대를 절단하고
무욕의 은빛 기둥을 곧추세운다

온몸이 빈 몸의 만월이다
(문현미·시인)

+ 산의 사진 찍기

언덕은
편히 앉으세요.

앞산은
몸을 낮추고
뒷산은
반듯이 서세요.

먼 산은
까치발로 서고
어깨 사이사이로
봉우리는 얼굴을 내미세요.

찰칵!

앞산, 뒷산, 먼 산 봉우리들의
다정한 어울림.
(박소명·아동문학가)

+ 산의 눈물

아버지랑 산에 가서
두릅을 따고
다래순도 따고
취도 뜯었다

비빔밥 해 먹으려고
어머니가 산나물을 데치는데
냄비 속 물빛이 푸르다
산 빛깔이 우러나왔다

산나물이 냄비 속에서
푸른 눈물을 흘렸구나!
푸른 피를 쏟아냈구나!

산에게 미안해서
슬그머니 산을 쳐다보니
산은 꿈쩍 않고 푸르다
(김은영·아동문학가)

+ 먼 산

먼 산은
나이 많은 영감님 같다
그 뒤는 하늘이고
슬기로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이고
통일이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면
달라지리라고--

먼 산은
애오라지 역사의 거물
우리 인간은
그 침묵에서 배워야 하리
(찬상병·시인)

+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정채봉·아동문학가)

+ 제 앞만 보고 걷기

    산에 오를 때마다 보폭이 짧아진다.
시선은 항상 제 앞만 보고
일정한 리듬으로 산을 오른다.
넓고 높게 보면 까마득한 능선
부지런히 숨 고르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있다.

산다는 것은 그저 별것이 아닌 것
내 일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작은 목표를 향해 차곡차곡 세월이 가면
어렵게만 보았던 그 정상이
어느새 쾌감처럼 내 앞에 있다.

정상은 오르라고 있는 것
중간에 포기란 없다.
게으른 토끼보다 부지런한 거북이
큰 부자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지만
제 몫 충실한 개미는 바위도 뚫는다.
산에 오를 때는 보폭을 작게 한다 
(牛甫 임인규·시인)

+ 산길

산을 오릅니다
산기슭의 길은 넓고 편합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간혹은 손을 잡고
마주보며 웃음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길은 좁고 가파릅니다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없습니다
혼자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혼자 걷는 산길은 오를수록 비탈져
숨이 막힙니다
앞서 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가물거리며 사라집니다
마지막 길은 혼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압니다
(남성희·시인)

+ 행복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허형만·시인)

+ 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도종환·시인)

+ 절정의 노래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최후를 마치리.
(이성선·시인)

+ 산을 오르며

우람한 산 앞에 서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

겸허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교만이 고개를 치켜드는

아직도 많이 설익은 나의 인생살이를
산은 말없이 가르쳐 주지

높음과 깊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

깊숙이 내려앉기 위해
가파르게 오르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말없이 산은 내게 이야기하지
(정연복)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