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불침번 - gundae bulchimbeon

‘청춘의 한 시절을 썩히는 곳’, ‘얼차려로 지고 새는 곳’. 군대 하면 떠올리는 오래된 인상이다. 흔히 ‘요즘 군대’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세간의 인식은 여전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잊혀질만 하면 터져나오는 각종 사고 탓에 ‘역시나’하는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하지만 통계상으로는 군대 내 각종 사건사고가 정말 많이 줄어들었다. <국정브리핑>은 군 장병들의 생활 속으로 직접 찾아가 ‘요즘 군대’의 변화상을 직접 보고 체험한 내용을 기획 시리즈' 요즘 군대 가봤더니…' 를 통해 소개한다. 시리즈는 육군, 공군, 해군 순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

①육군 제6사단 청성부대(경기도 포천ㆍ강원도 철원)
②공군 제17전투비행단(충북 청주)
③해군 제1함대(강원도 동해)

병사자치위원회 발족, 동기생 생활관, 일과 후 동아리활동, 불침번제와 당직근무제 통합운영 등 충북 청주에 위치한 공군 17전투비행단이 자랑하는 병영문화 개선 사례들은 ‘여기 군대 맞아’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혁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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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은 단 대표병사(왼쪽에서 2번째)가 병사자치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병사자치위원회 대표병사 4명은 전임

지난 22일 찾아간 17전투비행단(17전비)에서는 병사자치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 안건은 10월 중 열릴 예정인 병사체육대회. 병사자치위원회는 현재 각 부대별로 진행 중인 종목별 예선전의 진행은 물론, 심판과 행사계획까지 모두 담당한다. 종목별 결승전과 다양한 게임 등이 펼쳐질 10월 행사는 대학 축제처럼 진행하고 병사의 부모들도 초청할 방침이다.

17전비가 지난해 9월 도입한 병사자치위원회는 이처럼 위원회 업무를 전담하기 위해 다른 업무에서는 완전히 열외된 전임병사 4명과 각 부대를 대표하는 대표병사 등 26명으로 구성돼 병사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비행단을 대표하는 단 대표병사는 각 대대의 대표병사들이 모여 투표로 선출한다.

26명의 병사자치위원회 위원들은 한 달에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병사식단 메뉴조정과 사회문화생활 체험 등 병사들의 애로사항 등을 수렴한다. 수렴된 안건들은 단 대표병사가 비행단의 주임원사단 회의에 참석해 보고하고 주임원사는 이를 지휘관에게 보고한다. 병사자치위원회와 주임원사단은 상호 간 이해와 협조를 위해 부대 밖의 장소를 골라 1박2일간의 정기적인 워크숍도 개최하고 있다.

장세은 단 대표병사(병장)는 병사자치위원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한 구체적인 사례로 ‘자율병영실천지도캠페인’을 들었다. 그는 “병영문화 개선이라는 게 말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서 병사자치위원회가 캠페인을 벌이기로 결정했다”며 “캠페인에 필요한 제반경비는 단에서 지원해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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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전비 병사자치위원회 대표병사들이 생활관을 찾아 병사들에게 캠페인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자율병영실천지도캠페인이란 17전비가 올 초부터 시행한 병사자율점호와 병사들의 취미·여가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자율적인 생활관 분위기 등을 확립하고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내무반이 아니라 생활관

17전비는 공군이 선정한 동기생활관 시범부대로 지난 4월부터 동기, 혹은 같은 계급으로만 구성된 생활관을 운영 중이다. 현재 1,600여 명의 병사 중 450명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동기생활관을 운영중인 비행단은 업무특성 상 동기생활관 운영이 어려운 헌병대 등 일부 단위부대를 제외한 전 부대로 이 제도를 확대할 예정이다.

병사자치위원회 위원인 황운성 병장은 동기생활관에 대해 “처음 시작했을 땐 보상심리도 있고 해서 불편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행하다보니 괜찮은 제도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며 “일과 시간 중의 근무는 과거와 다름없으나 일과 후의 ‘생활관’ 환경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내무반이 아닌 생활관일까. 성일환 17전투비행단장(준장)은 “과거 내무반의 경직된 분위기를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전환하고 일과 후 직장에서 가정으로의 퇴근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 생활관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국방부는 지난 3월1일부터 내무반이 아닌 생활관이란 명칭을 쓰라고 지시했다.

일과 중 근무시간이 직장생활이라면 퇴근 후의 생활은 가정 같은 생활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취지다. 성 단장은 “군대는 청춘을 썩히는 곳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연장”이라고 강조한다.

비행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정삼차 주임원사는 “과거에는 내무반이 근무시간의 연장공간으로 인식돼 하급병사들의 심리적인 부담이 컸으나 동기생활관 제도를 도입한 후에는 선임병사의 횡포로 고통 받는 내무반 문화가 사라졌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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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전비 동아리 중 가장 인기가 좋다는 밴드동아리 NRTS의 공연모습.

군대에서 밴드활동도 하고 시도 쓰고

17전비가 자랑하는 또 다른 제도는 병사들의 취미와 여가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운영하는 24개의 동아리활동이다.

동아리 중에는 정기연습을 통해 공연을 하고 전시회까지 여는 마술, 밴드, 랩 프라모델(비행기조립), 통기타, 시, 만화 동아리가 있다. 이외에도 수영과 야구, 내림낚시, 볼링, 배드민턴, 테니스, 탁구, 인라인, 족구, 축구, 농고, 배구, 풋살, 클라이밍, 루어낚시, 기독교 동아리 등에 각각 수 십명의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는 밴드동아리”라고 소개한 장세은 대표병사는 “지원자들이 많아 오디션을 거쳐 회원을 뽑는다”고 설명했다. 밴드동아리의 이름은 NRTS로 New Rock in This Section의 약자인데 비행단 내부의 ‘병사의 날’ 행사는 물론 각종 부대행사나 초청행사 등을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헌병대대 병사들이 운영 중인 시 동아리 ‘구름 속 이야기’도 특이한 동아리 중 하나다. “시를 쓰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시인”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는 ‘구름 속 이야기’는 이미 2004년과 2005년 각각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고 2004년에는 병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7전비에는 불침번이 없다

17전비의 병영문화 개선 사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침번 제도를 당직근무제로 통합한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자다가 일어나 불침번을 서고 나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탓에 다음 날까지도 피곤했던 기억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비행단이 도입한 당직근무제는 기지 경계 임무를 제외한 병사들의 당직근무와 불침번 근무를 통합해 병사들의 야간 근무시간을 축소하고 피로누적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됐다.

지난해 12월 시행한 당직근무제 도입 이후 병사들의 야간근무 시간은 현격히 줄었다. 하루 평균 야간근무 인원도 117명에서 14명으로 줄었다. 당직도 생활관 단위가 아니라 동별(대대규모)로 1명이 선다. 당직을 선 병사(일·이병은 당직근무에서도 제외)는 다음 날 일과에서 제외돼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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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상태에서 일석점호를 받는 17전비 병사들.

17전비의 병영문화 개선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세대 병사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편안한 생활관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자율점호제도를 도입했다. 내무실장이 생활관의 인원과 건강상태를 확인한 후 당직계통에 보고하면 끝이다. 병사들은 점호시간에 누워서 TV를 보거나 앉아 책을 읽는다.

점호시간이 끝난 후 더 공부를 하고 싶은 병사는 자정까지 생활관 건물 층마다 위치한 독서실과 휴게실에서 책을 보거나 TV를 볼 수도 있다. 점호에 앞서 청소하고 모포 각을 잡은 후 ‘침상 삼선에 정열’을 외치던 과거 일석점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김재웅 병장은 지난 5일 정보처리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여가시간을 이용해 하루 2시간씩 공부해 자격증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며 “자격증 시험을 본다고 하면 부대에서 외출증을 끊어준다”고 말했다. 17전비 병사들은 주말에는 부대 내의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기도 한다.

“군기는 직무에 필요한 것이지 휴식에 필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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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17전투비행단 성일환 단장이 병영문화 개선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병사들에게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 ‘군기 빠진 군대’가 되는 건 아닐까.

성일환 단장은 “군기는 일과생활 중 근무에 필요한 직무군기가 중요한 것이지 퇴근 후 휴식시간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며 “아무리 편하게 해줘도 군대는 군대이기 때문에 남모르는 병사들의 어려움을 더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일과 후에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일과생활 중의 근무 효율성도 높아지고 직무군기도 바로세워진다는 것이다.

비행단 인사처장을 맡고 있는 박상욱 중령은 “이제는 병사들이 내 방을 직접 찾아와 고충을 털어놓기도 할 정도가 돼 실상 과거보다 일은 훨씬 많아졌다”면서도 “그래도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군대를 만들고 있다는데서 느끼는 보람이 더 크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17전투비행단 병사들의 얼굴은 참 밝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