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대 후부 인 - hannala dae hubu in

2천년전 여인;중국 오남성 장사시 마왕태1호고분에서 출토된 한나라부인시신인 미이라및 비단내의 칠기 과일 곡식등 한나라유물들

이규원 앵커 :

지난 72년 갖가지 유물과 함께 중국 호남성에서 발굴된 2천년전 미이라가 방송사상 처음으로 KBS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눈,코, 입 하나 손상되지 않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신비의 모습니다.

북경에서 이동식 기자가 취재 했습니다.

이동식 기자 :

지금 제 뒤에 보각으로 서 있는 곳이 2천년전 한나라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호남성 장사시 마왕태1호 고분입니다. 발굴결과 지표로 부터 16미터 깊이에 길이 6.7미터, 폭 4.9미터의 관을 넣는 나무널 안에 4겹으로 된 관이 시신을 감싸고 있었고,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전해주는 의복과 생활용구 등, 1,000여점이 넘는 유물이 생생하게 출토 됐습니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에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 부인의 시신에는 호남성 박물관의 지하2충 전시실에 깊숙이 보존돼 있는데, KBS는 1층 위인 지하1충에서 내려다보며 힘들게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2천년대의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 코,입 등이 조금도 변형되지 않고 피부도 깨끗한 상태로 보존 돼 있었습니다.

웅전신 (박물관장) :

비단을 벗겨내자 근육과 피부가 완벽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동식 기자 :

소장품 중 칠기의 첫 편에 쓰인 ‘대부가’라는 글씨를 통해 무덤의 주인공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93년의 이 지방의 대부에 봉해진 이창의 부인임이 밝혀졌습니다. 2천년전 대부부인의 시체는 이 관속에 겹겹이 쌓인 채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이 관위에는 다시 더 큰 3개의 관이 차례로 덮여 있었으며, 관위에는 옻칠로 그린 생생하고 힘찬 필치의 각종 구름무늬와 신령스런 동물들이 시신을 사방에서 보호하고 있어서 당시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부인이 입었던 비단 속옷은 맨 위에 날개처럼 얇게 들렸고 무게가 50그램밖에 안 돼 현재의 기술로도 짜내지 못하는 높은 직조기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방 만든 것 같은 옻칠로 장식한 화려하고도 깔끔한 목재 식기류, 2천여년전의 소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와 대나무 합에 담긴 쌀, 콩, 밀 등 곡식류, 배와 매화 등 과일류도 옛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마왕태 무덤은 모두 3개가 발견됐으나 그중 제1호분의 이 부인의 시신을 비롯해 그 많은 유물이 어떻게 이처럼 완벽히 보존될 수 있는가는 아직까지 현대과학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사 마왕태에서 KBS 뉴스 이동식 입니다.

  • 2천년전 여인...중국 호남성에서 발굴된 미라
    • 입력 1994-01-05 21:00:00
    뉴스 9

한나라 대 후부 인 - hannala dae hubu in

2천년전 여인;중국 오남성 장사시 마왕태1호고분에서 출토된 한나라부인시신인 미이라및 비단내의 칠기 과일 곡식등 한나라유물들

이규원 앵커 :

지난 72년 갖가지 유물과 함께 중국 호남성에서 발굴된 2천년전 미이라가 방송사상 처음으로 KBS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눈,코, 입 하나 손상되지 않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신비의 모습니다.

북경에서 이동식 기자가 취재 했습니다.

이동식 기자 :

지금 제 뒤에 보각으로 서 있는 곳이 2천년전 한나라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 호남성 장사시 마왕태1호 고분입니다. 발굴결과 지표로 부터 16미터 깊이에 길이 6.7미터, 폭 4.9미터의 관을 넣는 나무널 안에 4겹으로 된 관이 시신을 감싸고 있었고,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전해주는 의복과 생활용구 등, 1,000여점이 넘는 유물이 생생하게 출토 됐습니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에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 부인의 시신에는 호남성 박물관의 지하2충 전시실에 깊숙이 보존돼 있는데, KBS는 1층 위인 지하1충에서 내려다보며 힘들게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2천년대의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 코,입 등이 조금도 변형되지 않고 피부도 깨끗한 상태로 보존 돼 있었습니다.

웅전신 (박물관장) :

비단을 벗겨내자 근육과 피부가 완벽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이동식 기자 :

소장품 중 칠기의 첫 편에 쓰인 ‘대부가’라는 글씨를 통해 무덤의 주인공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93년의 이 지방의 대부에 봉해진 이창의 부인임이 밝혀졌습니다. 2천년전 대부부인의 시체는 이 관속에 겹겹이 쌓인 채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이 관위에는 다시 더 큰 3개의 관이 차례로 덮여 있었으며, 관위에는 옻칠로 그린 생생하고 힘찬 필치의 각종 구름무늬와 신령스런 동물들이 시신을 사방에서 보호하고 있어서 당시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부인이 입었던 비단 속옷은 맨 위에 날개처럼 얇게 들렸고 무게가 50그램밖에 안 돼 현재의 기술로도 짜내지 못하는 높은 직조기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방 만든 것 같은 옻칠로 장식한 화려하고도 깔끔한 목재 식기류, 2천여년전의 소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와 대나무 합에 담긴 쌀, 콩, 밀 등 곡식류, 배와 매화 등 과일류도 옛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마왕태 무덤은 모두 3개가 발견됐으나 그중 제1호분의 이 부인의 시신을 비롯해 그 많은 유물이 어떻게 이처럼 완벽히 보존될 수 있는가는 아직까지 현대과학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사 마왕태에서 KBS 뉴스 이동식 입니다.

1972년에 발견된 중국 호남성 장사 부근의 마왕퇴(马王堆) 무덤은 중국 서한 초기의 장사국(분봉국)의 승상 이창의 부인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약 2100여년이 지난 서한 초기의 무덤입니다. 무덤은 모두 3개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호 고분이 가장 유명한 마왕퇴의 미이라가 발굴된 무덤이라고 하네요.

수 없이 많이 지속된 도굴 등으로 인해서 대형의 처녀분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실제로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대 말 이후 부터인데, 즉 문화혁명이 가장 드세던 1970년대 초중반에 발굴된 무덤이 많으며 그 이유로는 1960년대 진행되었던 대약진 운동의 무차별적인 개발과 1970년대 초의 소련과의 마찰로 만든 각종 방공호 그리고 과거를 부정하고 모두 봉건으로 몰아 버리는 4인방의 문화혁명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발굴을 거치지 못한 수 없는 파괴가 이루어진 덕분에 사실 발굴도 일부는 같이 진행되었다고 하니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항상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에 방공호를 파다가 발견된 마왕퇴 무덤은 모택동의 고향 부근이라는 이유와 당시 힘겹게 4인방과 격전을 치르던 총리 주은래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비교적 정확한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서한 경제 때의 장사국 재상이었던 이창의 부인의 미이라가 출토된 것인데 실제로 당시에는 천자만 쓸 수 있던 4겹의 관을 사용한 덕에 그리고 지상으로 부터 약 15미터 지하 또한 관곽 외부에 두터은 백고니 층을 덮은 이유로 외부 공기에 누출되지 않고 제대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발굴하여 이 부인의 피부를 건드렸을 때 탄력이 있었고 마치 산 사람의 피부와 같았다고 하니까 사실은 서한 초기의 장례 기술과 꼼꼼함이 드러나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이 아주 좋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발굴 당시 워낙 장비나 시설이 없어서 학생들이 지원을 나오고 무덤이 너무 커 파놓은 흙이 무너질까봐 졸속 발굴이 된 부분도 없다 아니할 것이지만 당시 고고학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 맞고 그 상황하에서는 그래도 유물 보전이 최대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3기의 고분에서는 다량의 직물과 당시의 요리 가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비단과 죽간 등에 써내려간 약 100여 종류의 고 기록이 나왔는데 이로 인해서 해당 시대나 그 전후에 쓰여진 고대 사서의 진실성을 비교할 수 있게되어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주는 발굴이 되었습니다. 전국시대의 합종과 연횡과 관련한 소진의 문장이나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관련된 사서 자료와 천문도, 절기도 등과 또 벽화 등이 발굴되어 가히 고대 왕국의 현실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던 황제 내경 외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황제 외경과 도덕경과 관련된 각종 자료, 또한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지리지 등 그 동안 구전 혹은 기록으로 여러 가지 판본으로 내려와 문제가 많이 있던 사서 내용이 이 발굴을 통해 많이 정정되었으며 실제로 고대 역사학자들의 기록이 상당히 객관적이고 정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다고 하네요.

북경의 십삼릉과 같이 문혁 기간 중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마왕퇴의 경우는 그나마 무지했던 일부 공산당 지도자 (특히 4인방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발결된 시체를 해부하여 현재 장사의 마왕퇴 방물관에서 전시 중이며 지금도 그 부인의 내장과 시체는 별도로 유리관으로 보관하여 전시 중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발굴 내용을 상세히 소개한 웨이난의 소설 마왕퇴의 귀부인을 읽어보면 당시 문화혁명의 허황됨과 어처구니 없음을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거의 돈도 없이 발굴을 주도하고 중국 고고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 학자들 또한 문혁의 과정에서 발굴을 주도하고 승인하고 보호에 최선을 다했던 중국의 고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하내 마지막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정치화 하지 않으려는 주은래의 노력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소설과 같이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사라는 곳이 호남성 성도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가려고 하는 곳은 아니기에 저 역시 아직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무한-장사를 거쳐서 고대 문명을 탐방해 보려고 합니다.

비록 도굴이 되지 않고 2100여 년을 처녀분으로 버티었지만 발굴된 미이라는 지금 세상에 전시되고 있으니 참 세월의 흐름이 격세 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발굴된 귀부인의 시체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토하며 지켜보는 가운데에 해부가 행해져 현재는 완전히 내장 및 각종 장기, 뼈 등을 분할하여 전시 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 발굴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해부를 통해 당시의 질병과 소화상태 그리고 당시 한나라 사람들의 인체 구조를 파악했다고 하니까 꼭 한쪽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귀부인의 시체는 보기에는 엄청나게 끔직하지요.

전 한국의 어딘가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무덤이 발굴되어 끊어져 버린 우리의 역사의 단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고대인 들 중 사서와 관련 자료를 가지고 이승을 떠난 사람이 있을테니까요. 제 컴에 문제가 있어서 사진은 집에 가서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