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김병현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Show
김병현(金炳賢, 1979년 2월 15일 (음력 1월 19일) ~ )은 전 국가대표 투수이자, 역대 3번째로 MLB에 진출한 한국인 메이저리거였다. 선수 시절[편집]미국 프로야구 시절[편집]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2001년에 아시아인 야구 선수 최초로 월드 시리즈에 참가했고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박찬호 다음으로 한국 선수 중 MLB 승리가 많은 투수이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동양인 최초로 양대 리그(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NL),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AL))에서 우승을 경험해 본 선수이기도 하다.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6년 WBC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1999년 애리조나에 입단해 MLB에 데뷔했다. 특히 전성기 때의 슬라이더는 MLB에서 알아 주는 마구로 통했다. 2007년 이후 MLB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1] 2008년 3월에 소속 팀에서 방출됐다. 2009년 WBC 출전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여권 분실 해프닝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가운데 손가락을 내민 게 오해가 된 사건이 있어서 보스턴 시민들이 싫어하는 편이다.[2] 2010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계약을 체결했으나 얼마 안 돼서 2010년 3월 16일에 방출됐다.[3] 미국 독립야구 시절[편집]2010년 5월 7일 미국 독립 리그 골든 베이스볼 리그의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와 계약했다.[4] 일본 프로야구 시절[편집]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편집]2011년 1월 25일에 1년 총 3,300만엔(한화 약 4억 4,700만원)에 계약했다.[5] 그러나 1군에 오르지 못하고 2011년 11월에 방출됐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편집]넥센 히어로즈 (현 키움 히어로즈)시절[편집]광주일고를 졸업하고 1997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 해결 후 MLB에 진출했으나 최희섭과 함께 KBO에서 영구 제명돼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권이 말소됐다. 2007년 4월 2일 해외파 특별 지명 회의에서 현대 유니콘스에 영구 지명됐고,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그의 지명권이 넥센 히어로즈에 인계됐다.[6] 라쿠텐에서 방출된 후에도 계속 넥센 히어로즈의 제안을 거절하다가[7], 2012년 1월 18일 계약금 10억, 연봉 5억, 옵션 1억 등의 총액 16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국내에 복귀했다. 2군에서 감각을 끌어올린 후 2012년 5월 8일 LG전에 구원 등판해 1이닝 3피안타, 1실점을 기록했다.[8] 2012년 6월 20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6이닝동안 4피안타, 5사사구, 1실점으로 한국 프로 야구 데뷔 첫 승을 거뒀으며 이는 2007년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 메츠전 선발 승 이후로 4년 8개월 만이었다.[9]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2014년 4월 10일 당시 KIA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김영광과의 1:1 트레이드로 이적하였다. 2016년 시즌 전 스프링캠프에서 맹장 수술로 인해 몸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시즌을 맞이했고, 러닝 훈련을 하다가 골반에 무리가 와 1군에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며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10] 도미니카 프로야구 시절[편집]2017년 9월 23일에 도미니카 윈터 베이스볼 리그의 기간테스 델 시바오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정식 선수가 아니었기에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방출됐다. 하지만 그와 함께 도미니카 윈터 베이스볼 리그에 있던 강정호 덕분에 강정호가 있었던 아길라스 시베나스에 입단하였다.[11] 호주 프로야구 시절[편집]2018년 10월 30일에 멜버른 에이시즈에 입단하였다.[12] 2019년 1월 3일 인터뷰에서 은퇴를 선언했다.[13] 별명[편집]
한 손가락욕에서 유래했다.
출신 학교[편집]
경력[편집]
수상[편집]
통산 기록[편집]
방송 출연[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