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읽는 방법은 "나이키"지만 의외로 "나이크"로 읽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대체로 유럽에서 나이크로 읽는 경향이 있고 특히 영국은 영어의 종주국 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나이크로 읽는 사람들이 상당수이며 오히려 이에 의문을 표하면 Bike도 바이키라고 읽을 거냐고 묻는 식으로 반박한다.
[1] 1971년 5월 30일 나이키로 기업명 변경.[2] 단순히 스포츠 용품 브랜드 중 1위가 아니라 전세계 어페럴 브랜드 1위의 가치를 지녔다. 2019년 브랜드 파이낸스가 조사한 어패럴 브랜드 가치 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출처. 2019년 포브스가 선정한 기업 가치 순위에도 패션 브랜드 중 루이비통과 함께 20위 안에 들었다. 출처.[3] 드물긴 하나, 이 로고와 특유의 필기체 글꼴도 아주 가끔씩 빈티지 나이키 슈즈에 각인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4] 현재는 주로 NIKE 로고가 안 달린 버전으로 쓰지만 이 버전도 사용 빈도가 적지 않다. 스포츠, 전문 기능성 제품은 스우시 로고만 있고, 캐주얼 제품들은 사진처럼 나이키와 스우시 로고가 같이 들어가 있다. 축구 유니폼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5] 물론 요즘은 파리 생제르망 FC와 같이 에어 조던과 콜라보해 스우시 대신 조던 로고를 넣는다거나, 레트로한 느낌을 내기 위해 'NIKE' 문구가 들어간 스우시를 넣는 경우도 있다.[6] 심지어 처음부터 그래픽 디자인을 지망한 게 아니라 저널리즘 공부 도중 학점 채우기용으로 디자인 수업을 듣다가 전과했다고 한다.[7] 회사가 작았을땐 전담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부터 나이키가 외주를 주면서 데이비슨 역시 나이키 일 말고 다른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8] 2019년까지 나이키에서 쓰이던 슬로건. 한국어로는 '그냥 해.'[9] 2020년의 나이키의 슬로건으로 전 세계가 스포츠로 다른 사람들간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10] 2021년의 나이키의 슬로건으로 기존의 승리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강압적이고 부조리한 스포츠의 관습을 부수고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11] 2022년의 나이키의 슬로건으로 어느 누구 스포츠에서 뒤떨어지는 일 없이 자신이 원하는 스포츠를 찾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12] '나이키' 라는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 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다.[13] 오니츠카 타이거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신발이 바로 코르테즈다. 자동차 업계로 본다면 아식스는 미쓰비시, 나이키는 현대자동차 정도 된다.[14] 이후 나이키 재팬도 닛쇼이와이와의 합작으로 설립했다.[15] 아디다스의 미국 내 총판을 맡고 있던 미국인들로부터 판매권을 인수하는데 자금을 무리하게 동원하였다.[16] 아시아의 모 국가에서 실수로 장갑용의 가죽으로 신발을 생산하여 납품한 것이었다. 참고로 그 모 국가는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1970~1980년대 화승산업에서 나이키에 스포츠화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국내 나이키 총판을 맡기도 했지만, 1986년 나이키와의 계약 종료로 르까프 브랜드를 런칭했다. 여기에는 나이키 뿐만 아니라 리복을 위시한 타 브랜드에도 신발을 납품하려는 화승의 계획과 자사에만 독점 납품하기를 원했던 나이키와의 의견 대립이 원인이였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그 시절 세계 최대의 스포츠화 생산기지는 한국이였다. 산업화 시대 한국 제 가발과 신발이 전세계 공급의 6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전세계인들이 쓴 신발이나 가발의 절반은 한국에서 제작된 제품이었던 것. 물론 그 뒤에는 단가와 납기를 맞추기 위한 어마어마한 노동 착취가 있었다.[17] 나이키는 아디다스를 역전했지만 80년대 중후반부에 리복에게 역전당했으며, 1989년 당시 리복의 매출은 18.2억 달러, 나이키는 17.1억 달러로 앞서고 있었다고 한다. https://www.retaildive.com/news/reebok-was-meant-to-be-a-nike-killer-how-the-brand-lost-its-no-1-spot-adidas-sale-of-reebok/603733/ 또한 1980년대만 해도 나이키와 리복, 아디다스와 컨버스가 경쟁을 하던 구도였으며, 컨버스는 당시 NBA에서 연봉을 많이 받는 최고 인기선수였던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를 동시에 계약하기도 했다.(1984년에 두 선수가 같이 함께 컨버스 광고를 찍다 친해졌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유튜브에도 영상이 남아있다) 1980년 당시 나이키가 한때 업계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운동화 시장의 절반을 집어삼켰다는 건 과장이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나이키와 리복은 팽팽했으나, 1990년대가 꺾이고 나이키가 독주, 아디다스가 열심히 따라가는 사이 리복은 지지부진하며 완전히 둘에 비해 뒤쳐지게 된다.[18] 나이키는 1979년에 미국 런닝화 시장 지분의 절반을 차지했다. 1970, 1980년대 당시 나이키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성장하며 아디다스, 컨버스처럼 기존의 강자들을 앞서나가던 시기였지, 1990년대 중반 이후처럼 절대강자가 아니었다.[19] 별다른 문구 없이 흘러가는 시간만을 표시했음에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광고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광고계에서 엄청난 주목도를 받았다.[20]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카를로스 테베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호나우지뉴, 세스크 파브레가스, 로빈 반페르시, 보얀 키르키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아르센 벵거등 당대 최정상 축구스타와 감독들이 참여하였다.[21] BIGBANG의 태양, 2NE1의 산다라 박, 축구선수 박지성, 테니스 선수 정현이 카메오 출연.[22] 후에 에어 조던 29에 프린트되어 나왔다.[23] 마이클 조던이 아디다스의 팬이었고, 계약을 맺을 당시 나이키보다 아디다스와 계약하기를 고대했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4년 당시 나이키의 주식은 폭락을 거듭했었지만 조던과의 계약 후 최초의 시그니쳐 개념을 가진 Air Jordan이란 메이커가 대박을 친 후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상황이 역전됬으며 또 1990년대 초반, 즉 마이클 조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당시에는 몇몇 사람들이 Air Jordan을 나이키에서 독립시켜 독자적 브랜드로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Air Jordan은 세계 3위의 신발 제조 회사가 되었을 것이다.[24] 번역하면 '우리 딸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25] 즉, 나이키는 보수주의자나 시골 공화당원, 트럼프 지지자는 필요없다는 것. 또한 사회적 이슈로 광고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펩시나 스타벅스와 달리 예전부터 나이키는 '반항아'적인 광고를 해왔으며, 이러한 광고가 나이키의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26] 실제로 4천 3백만 달러 가치의 SNS 버즈량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27] 유명한 Think different 광고로 Apple을 다시 전성기로 회귀시킨 스티브 잡스도 칭찬했었다.[28] 조던이 당시 신었던 모델은 에어 쉽 모델이었다.[29] 그러나 피니시라인은 서로 치수가 안 맞는 신발을 보내는 경우가 있어 "막장 라인"으로 불린다. 실제로는 물건을 직구로 구매하고 받아놓고선 못 받았다고 카드 결제를 취소해버리고 물건도 보내지 않는 블랙컨슈머가 많아서 안 받는다는 말이 있다. 다른 풋 계열은 잘 받는 중이고 변팔만 잘되면 미국 공홈에서 충분히 한국카드 사용 가능하다.[30] 나이키의 베스트셀러 제품을 여러 컬러웨이나 소재를 바꿔 재창조[31] 실제로 칸예웨스트는 패션계 입문 전부터 펜디의 인턴사원으로 일하며 디자인을 배웠다.[32] 나이키 디자인의 드라이빙 슈즈와 티셔츠가 들어있는 알루미늄 케이스의 패키지며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33] 사실 에어 조던 역시 예정하고 있지만 나이키 산하의 조직이다.[34] 폴 조지 시그니처[35] 상술한 애플 워치 나이키 에디션에 나이키 페이스와 기본적으로 설치된다.[36] 심지어 배트맨 리턴즈의 에어 조던같은 경우에는 발바닥에 조던 마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른바 걸을 때마다 땅에 마이클 조던 발자국을 남기는 배트맨이었다.[37] 사실 이건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수밖에 없는게 디자인도 못하고 재질도 2018월드컵 까지는 한단계 아래등급으로 유니폼을 제공했다. 근데 이건 조중연이 8년 호구 계약을 맺은게 크긴 컸다 |